바베이도스.

 

1816, 4월 14.

 

바베이도스에서는 부사 반란도 일어났다부활점 밤에 개시했고지도자 이름을 딴 봉기로는 바베이도스 섬 역사로는 최대 규모아프리카인 노예 반란이었다노예들은 부활절을 맞아서 잠시 일손을 놓고는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기회를 이용해서 봉기를 조직했다낱 사탕수수 재식 농장(플랜테이션)에서 지도자를 뽑은 사람들은 자유 흑인 3명씩 같이 돌아다니면서부터

반라자들과도 만났다봉기로는 세인트필립사탕수수밭을 불 지르면서부터 시작했고다른 70여 개농장에서 일하던 400여 명남녀들도 합세했다.

 

영국 식민 당국으로는 이튿날 계엄령을 선포했다신속하게 봉기를 진압했다백인은 2명만 살해됐고노예는 진압 기간 가운데 120명을 살해했다뒤로는 144명을 처형했고, 132명은 국외로 추방했다.


1937년 7월 26.

 

바베이도스의 영국 식민 당국이 노동조합 설립을 시도하던 클레먼트 페인을 비밀리에 트리니다드로 추방했다트리니다드에서 기다리던 경찰은 금서를 소유했다는 혐의로 그를 체포했다.

체포 전 페인은 바베이도스인이라고 허위 신고를 했다는 혐의로 고발당했는데그가 바베이도스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출생지는 트리니다드라는 이유 때문이었다페인은 유죄판결에 항소했고항소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는데도 섬에서 쫓겨났다그러나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며칠 동안 파업이 확산됐다.

 

 

1958, 48.

 

바베이도스, 인접한 재식업(플랜테이션) 농장, 2곳에서 일하던 사탕수수 노동자들은 톤 당, 15%씩 임금을 인상해주지 않는다면 수확을 거부하겠다고 하며 일손을 놓았다. 톤 당 6%인상을 제안받은 노동자들은 작업을 중단하고는 1958, 사탕수수 노동자, 살쾡이 파업에 돌입했다. 파업은 전국 각지 재식업(플랜테이션) 농장, 수십 곳으로 확산했다.

   

19601130.

 

바베이도스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1625년 에스파냐가 바베이도스 원주민들을 절멸한 뒤로 영국은 섬 소유권을 내세웠다. 1640년 사탕수수가 섬에 들어오며 영국은 제식 농장에서 일할 아프리카 출신 노예 수만 명을 데려왔고, 노예들이 곧 인구 대다수를 이뤘다. 이들이 잇따라 반란을 일으키면서 결국 노예 제도는 폐지됐지만, 영국 지배는 계속됐다. 20세기에는 식민 당국 진압에도 쉽게 잦아들지 않는 노동 계급 소요 물결이 전국 각지에서도 일어났다.


벨리즈.

 

 

1935101.

 

벨리즈 코로살에서 열린 대중 집회에서 이발사이자 노동운동 조직가인 안토니오 소베라니스 고메스가 발언한 뒤, 영국 식민 당국은 선동적인 언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그를 기소했다. 그는 실업자 조직화 및 항만 노동자와 철도 노동자가 벌인 최근의 파업에서 핵심적인 역항를 한 바 있었다. 총독은 흑인 대 백인의 대결로 비치지 않도록 흑인 판사에게 사건을 맡기면서 상당히 긴 징역형에 처하기를 바란다는 뜻을 내비쳤다. 재판이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노동자들이 소베라니스의 변호 기금을 모으는 한편, 당국은 집회 일체를 금지했다. 결과적으로 소베라니스는 모욕적인 단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85달러의 벌금형을 받고 풀려났다.

 

볼리비아.

 

 

1816, 33.

 

볼리비아에서는 케추아족계 혼혈로 태어난 후아나 아수르두이는 아마조나스라는 여군 부대를 비롯한 반식민 전투부대를 이끌었고 비야, 인근에서 벌인 에스파냐군과 전투에서 승리했다.

 

1965, 517.

 

볼리비아, 군부 독재 정부는 총파업에 대한 대응으로 계엄령을 선포했다. 노조를 상대로 전면전을 개시했다. 정부는 노조를 해산하고는 19-50세 국민을 징집하는 법안을 통과하게 했다.

 

20071024.

 

볼리비아 성노동자 35000명이 경찰 괴롭힘에 항의하고자 파업에 들어갔다고, <타임>이 보도했다. 전미성매매여성해방기구(NOEWSP) 성노동자 노동 조합으로 조직된 여성들은 경찰이 괴롭힘을 중단할 때까지 의무 성병 검사도 거부했다.

 

20111115.

 

볼리비아 트리니다드에서 장애인 한 무리가 정부에게 장애인 지원을 늘리고, 장애와 관련된

사회적 낙인 문제를 해결하라고 촉구하고자, 수도 라파스를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행진 대열은 어린이를 포함해 200명으로 늘어났고, 지지자 수천 명이 라파스에 모였다. 20122, 행진 대열이 라파스에 진입하자 전투 경찰의 공격이 시작됐다. 행진 여파로 궁지에 몰린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은 시위대 요구 몇 가지를 받아들였다.

 

브라질.

 

1898년 9월 20.

 

무정부주의 이주 노동자 폴레니체 마테이는 상파울루에서 경찰에게 살해 당했다당시 브라질의 노동 운동은 무정부주의자들이 주추을 이뤘고 이들은 일일 노동 시간 단축과 의료 보험을 요구하는 것과 함께 전쟁에 반대하며 싸웠다무정부주의자들은 일간지 4종을 비롯한 100여 종의 잡지와 신문을 펴냈다정부는 수백 명을 수감 및 추방하고 수십 명을 살해하며 반격했다.


1917년 7월 18.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한 가구 노동자가 상파울루에서 파업이 벌어진다는 소식을 접하고

일손을 놓았다동료 2명도 동참했다오후가 되자 노동자 150명이 조업을 중단했고다음 날에는 5개 공장의 노동자들이 일손을 놓으면서 파업은 계속 확대됐다. 7월 22하루 최대 8시간 노동과 20%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총파업이 소진됐다금속 노동자와 공장 노동자 수만 명이 파업에 합류하면서 산업이 마비됐다정부 계엄령 선포에도 노동자들은 파업을 이어갔고결국 다음 달 요구를 관철하며 고용주들의 수용을 이끌어냈다.


1917년 7월 11.

 

브라질 상파울루 경찰이 조제 마르티네스를 때려죽였다. 21세 제화공 마르티네스는 높은 생활비에 항의하는 노동자 시위가 벌어지던 중 우연히 그 옆을 지나가던 행인이었다마르티네스의 장례 행렬에는 대규모 인파가 모여들었고경찰은 인파를 칼로 공격했다노동계급은 도시 곳곳에서 폭동으로 대응했으며 폭동 이튿날 1만 2500명이 파업에 나섰다다음 날에는 5000명이 추가로 파업에 합류했고이후 총파업으로 발전했다노동자들은 10% 임금 인상을 광범위하게 확보하고 나서야 조업 복귀에 동의했다.

 

 

1919, 54.

 

라우데자네이루, 공장 노동자, 5만 명은 하루 최대 8시간 노동, 20% 임금 인상을 요구하면서,

파업에도 들어갔다. 6, 상파울루 노동자들은 파업 대열에도 합류했고, 7, 파업을 깨뜨리는 데도 실패한 정부로는 고용주들에게 두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요구를 수용하라고 강요했다.

 

1978, 512.

 

브라질, 상베르나르두에서 위치한 사브 스카니아 자동차 공장 기계 수리실에서 주간조로 일하던 노동자들은 군사 정권 아래임에도 불구하고, 조업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파업은 곳곳으로 확산했다. 2주 만에 20여 개 공장, 45000명 노동가들은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는 연장을 내려놨다. 뒤로부터 파업은 몇 주에 걸쳐 우사스쿠, 상파울로로 확산했고, 모든 자동차 회사는 11%-13.5% 임금 인상에도 합의했다.

   

1988119.

 

브라질 군경이 파업 노동자 3명을 살해하고, 수십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나시오날제철 소속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과 정치적인 신념을 이유로 해고된 노동자들에게 복직을 요구하면서 파업을 벌이고 있었다. 살해 당한 노동자는 19세 카를로스 아우구스투 바로수와 22세 윌리엄 페르난지스 레이테, 27세 발미르 프레이타스 몬테이루였다. 탄압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2주 넘게나 연좌 파업을 이어갔다. 학살을 전두지휘한 것은 군사 독재가 무너지고 새로 세워진 민주 정부였다.

 

19881222.

 

브라질 고무 노동자이자, 농촌 활동가이고, 환경 운동가, 원주민 권리 운동가인 시쿠 멘지스는 목축업자에게 암살 당했다. 노동조합 고참 간부인 멘지스와 고무 노동자들은 아마존 열대 우림을 보호하고자 정부에다 삼림 파괴를 막을 수 있도록 보호 구역을 지정하라고 요청했다. 카쇼에이라 고무 노동자들은 보호 구역 일부를 매입한 목장주 다를리 아우베스 다 시우바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리케이드를 세웠다. 이후 멘지스는 다 시우바가 또 다른 지역에서 진행하는 벌목을 막고자 운동을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다른 곳에서 저지른 곳으로 추정되는 살인 사건에 대한 영장을 받아내는 데도 성공했다. 멘지스는 영장을 경찰에다 전달했지만, 경찰은 집행하지 않았다. 1222일 목요일 저녁, 자택에 있던 멘지스는 다 시우바의 아들에게 암살 당했다. 같은 해 브라질에서 열아홉 번째로 살해된 농촌 활동가였다. 살인 사건으로 다 시우바와 그의 아들, 그리고 그들의 직원은 한 명은 19년 간 투옥됐고, 세계적인 지지

운동이 벌어진 뒤 시쿠 멘지스 벌목 보호구역이 만들어졌다. 이곳 이후 설정된 다른 보호 구역들의 총 면적은 현재 3300만 에이커에 이른다.

 

처음에 나는 고무나무를 구하고자 싸운다고 생각했고, 다음에는 아마존 열대 우림을 구하고자 싸운다고 생각했다. 이제 나는 인류를 위해 싸운다는 것을 깨달았다. - 시쿠 멘지스


2018, 3월 14.

 

 

리우데자네이루에서는 아프리카계 브라질인양성애자사회주의여성주의자마리엘리 프랑쿠는 암살당했다도시 판자촌(파벨라)에서 자랐고, 11세부터 일을 시작한 프랑쿠는 최저임금을 받고 일하면서 홀로 딸을 키우다가 2016시의원으로 당선됐다암살당하기 전날 프랑쿠는 경찰과 준군사 조직을 법적으로는 정당하지 않은 살인에 반대하는 의견을 공개적으로 밝혔다프랑쿠를 죽인 총알은 연방 경찰이 구매했다공안부 장관은 우체국에서 도난당한 총알이라고 내세웠지만우체국은 공개적으로 부인하자 발언을 취소했다.

 

살인 혐의로 체포된 용의자 4명은 모두 주 경찰과도 연관된 인물이다. 2명은 우파 대통령 자이르 보우소나루 가족과 관련 있으며또 다른 용의자로는 한 전직 경찰관은 2020, 2체포 과정에서 경찰 총에 맞아 사망했다.

 

   

세인트 빈센트 그레나딘.

 

 

19351021.

 

영국이 점령한 카리브해 섬나라 세이트 빈센트의 수도 킹스타운에서 고물가에 항의하던 노동자들이 경찰 총격을 받으면서 노동 항쟁이 시작됐다. 노동자들은 또한 소비자를 희생해 생산자에게 이익을 주는 설탕 관세를 유지하려는 계획에도 항의했다. 시위대는 정부 청사 앞에서 격렬한 집회를 열면서 청사 창문을 깨뜨리고 관리들의 차량을 파손했다. 총독과 법무상이 공격 당했고, 군중들은 고문관이자 제식기업 농장주인 사무실을 약탈했다. 일부 시위대는 교도소로 쳐들어가서 죄수 열 명을 풀어줬다. 무장 경찰이 폭동범을 낭독한 뒤 군중에게 발포를 시작했고, 사망자 한 명과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뒤로 폭동이 조지 타운과 샤토벨레어로 확산되는 가운데 시위대가 전화선을 끊고, 다리를 파괴했다. 같은 날 밤 자정에 영국 전함 한 척이 도착했다. 이튿날 당국이 선포한 비상 사태는 3주 간 지속됐다.

 

세인트키츠.

 

1935, 129.

 

세인트키츠 섬, 사탕수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전날 임금 인상을 요구하면서 사탕수수 수확 노동자들로부터 벌인 파업에도 가세했다. 노동자들은 버클리, 플랜테이션 농장 앞마당에 모였다. 해산을 거부하자. 관리자는 총을 쏴 노동자 몇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뒤이어 영국 무장 경찰도 도착했지만 노동자들은 끝까지 해산을 거부하면서 관리자를 체포하라고 요구했다. 경찰은 관리자를 체포하는 대신 노동자들에게 발포해서 3명을 죽이고는 8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다음 날, 영국 군함도 도착했고 파업을 진압하고자, 해병대도 상륙했다. 파업 노동자 39명은 체포됐으며, 가운데 6명은 2-5년 징역형을 받았다.

   

아르헨티나.

 

1896, 1월 8.

 

아르헨티나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세계 최초로 무정부 여성주의라고 공공연하게 표방한 신문이던 <라스보스데라무헤르>(여성 목소리)도 출간했다신문은 계급 투쟁여성 해방성적 자유를 주장했다.



1901년 10월 23.

 

아르헨티나 로사리오 한 제당 공장이 파업을 하는 와중에 경찰이 무정부주의 이주 노동자 코스메부디슬라비치를 살해하자노동자들이 총파업으로 대응했다.

 



1918, 1월 10.

 

아르헨티나바르셀로나 가정주부 200명은 노동계급 지구를 행진하고대다수 여성들은 섬유 노동자들을 향해 높은 생활비에 항의하는 파업을 벌이자고 호소했다신임 군정장관은 계엄령을 선포했으며시민에 대한 권리를 일시 중단했으나파업과 시위상점석탄저장소에 대한 습격은 계속됐다.

 

1919, 17.

 

아르헨티나, 비극의 한 주로 알려진 사건도 벌어졌다. 부에노스아이레스항에서 해운 노동자들은 임금인상,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하는 파업으로부터 투표를 진행했으며, 이근에 있던 영국인 소유, 바세나 공장에 있떤 경찰들은 파업하던 금속 노동자들을 습격해서는 5명을 사망하게 하고, 20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며칠 간 도시 전역으로도 파업은 확산했고, 폭력 사태도 발발하자, 노동자들은 손에 무기를 쥐었다. 우파 폭도들은 유대인 박해에도 나서고, 유대인 지구를 습격해서는 사람들을 구타하거나, 죽였다. 반유대주의자들은 심지어 유대인을 향해,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들과 연관됐다고 여겼다. 군대는 반란을 진압했고, 100-700여명을 살해했고, 400-2000명에게 부상을 입히고는, 5만여 명을 투옥하게 했다.

   

1921, 121,

 

아르헨티나, 산타크루스 파업 노동자들은 라아니타, 라프리마베라 목장을 점거하고는, 목장주들과 경찰 부청장을 인질로 잡았다. 양모 노동자, 농장 노동자는 대다수, 파업 노동자들로부터 임금 인상, 토요일 휴무, 식사 질 개선, 매달 양초 한 묶음 지급 등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노동자들은 대열을 이루었으며, 작업장으로 이어 행진하면서, 식량, 무기를 입수했다. 경찰과도 충돌했지만, 군대가 도착한 뒤로는 노동자들은 대부분 요구 조건을 보장 받는 대가로 무기를 반납하고는 인질을 풀어줬다. 그러나 1년도 지나지 않아 당국은 노동조합 사무실을 급습했으며, 노동자들에 대한 총파업을 개시하자, 엑토르 베니그노 바렐라 대령은 병력 200명을 끌고 달려와서 무력 진압에도 나섰다. 1922, 1월까지, 무려 1500명 노동자는 살해당했다. 1946, 121, 2차 대전 직후 대규모 파업 물결이라는 일환으로, 철강 노동자 75만 명은 파업에 나서면서 참가자 수로는 미국 최대 규모 파업은 벌어졌다.

 

1923, 127.

 

무정부주의자, 광부 쿠르트 빌켄스는 아르헨티나군 엑토르 베니그노 바렐라 대령을 암살했다. 대령은 1921-1922년까지 파타고니아에서 노동자 1500명은 살해된 사건에서 핵심 인물이었다. 빌켄스는 체포된 뒤로부터 곧바로 교도관들은 몰래 들여보낸 전진 경찰관으로부터 살해됐다. 사망 소식이 알려지지 아르헨티나에서는 전국 각지에서도 무기한 총파업도 벌어졌다.


1928, 5월 8.

 

아르헨티나, 18무정부주의 공장 노동가루이사 라야나는 부두 노동가 파업 가운데파업파괴자에게 살해당했다이전 달에 시작한 파업은 로사리오부두 노동자들은 5년 만에 처음으로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행동이었다만시니 삼베 자루 공장에서 일하던 라야나동료 몇 명은 부두 노동자들을 지지하고는 항구여성위원회(WPC)에서 만든 전단을 나눠줬던 순간부터,

극우 준군사조직 아르헨티나애국연맹(LPA) 구성원파업파괴자이던 후안 로메로는 머리에다 총을 쐈다라야나는 같은 날 오후 사망했다.

 

다음 달지역 노동 조합무정부주의 노동 조합아르헨티나지역노동자연맹(FORA), 공산당도 항의하고는 총파업을 소집했다수천 명은 연장을 내려놓고는 행진에도 나섰고여성 1000명은 대열을 이뤄 라야나장례 행렬을 이끌었다경찰은 장례식 참가자들을 폭력 진압했고,

전함 2척은 경찰준군사 조직을 지원하고자항구에도 도착했다같은 달총 11명은 노동자 파업 과정에서도 살해당했다파업시위로는 1년 넘게 지속확산했고규모도 커졌다.


 

1969, 5월 23.

 

아르헨티나로사리오인근 산업 벨트에서 군부 독재에도 맞서장기간 벌어진 로사리아소 항쟁 일환으로 노동자들은 대규모 파업을 시작했다.


1969, 5월 29.

 

아르헨티나코르도바에서는 파업도 벌어진 가운데자동차 공장 노동자막시모 메나는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죽음을 계기로도시 전역에서는 노동자학생들도 벌인 폭동시위 물결도 일어났다훗날 코르도바소로 불린 항쟁으로는 코르도바 노동계급들에게 전설적인 저항으로후안 카를로스 옹가니아 장군도 이끈 군사 정부는 끝장난 계기였다.

 

1975, 320.

 

아르헨티나, 이사벨 페론 정부는 전투적인 산업 노동자 조직을 깨뜨리고자 비야콘스티투시온시에 경찰, 군인, 수백 명을 투입하고자 파라나, 붉은 뱀 작전을 개시했다. 군경은 노동자 307명을 체포했다. 반격에 나선 노동게급은 파업을 지속하고, 공장을 점거해서 구금된 동료들에 대한 석방을 요구했다. 점거는 326일까지 지속하다가, 경찰은 무력으로 진압했다. 두 달간 정부는 국가 전복에도 맞서 싸운다는 이름 아래 계속해서 노동자를 검거하고는 블랙리스트를 작성해서는 살해했다. 군사독재 아래에서는 같은 갈래로 탄압은 비일비재하지만, 대다수 노동조합 지지를 받기도 한 페론 탄압은 덜 알려졌다.

 

 

1976, 324.

 

아르헨티나에서는 미국 지원을 받은 우익 쿠데타도 일어났다. 대중주의(포퓰리스트)였던 이사벨 페론을 몰아냈다. 새로 만들어진 군사 정부는 급진적 노동자, 공산주의를 상대로 페론도 벌였던 전쟁을 가속화하면서부터 수만 명을 살해하고는 실종하도록 했다. 미국 국무부 장관, 헨리 키신저는 인권 탄압에 항의하는 목소리도 커지기 전에 신속하게 반대 세력을 쓸어버리라고, 군사 정권에다 조언했다.

 

 

2001년 12월 19.

 

아르헨티나 노동자와 실업자들은 경제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가끔 폭력적인 시위와 거리 봉쇄공장 점거를 벌였다같은 운동이 내건 구호로는 전부 몰아내자!’였다정치인과 정부를 모조리 몰아내야 한다는 의미였다정부의 폭력 진압으로 39명이 사망했지만마침내 페르난도 데 라 루아 대통령은 사임했다.

 


 


 


아이티.


1793년 9월 19.

 

아이티 혁명 가운데 자메이카에서 파견된 영국 군인 600명이 아이티 제레미에 상륙했다앞서 영국과 비밀 합의문에 서명한 프랑스 백인 자산가들은 군인들을 환영했다프랑스는 영국의 지원에 대한 대가로 생도맹그를 영국 식민지로 내주고노예제를 다시 도입해 유색인 시민권을 박탈할 예정이었고영국은 식민지 정착민들에게 유리한 경제 정책을 시행할 계획이었다영국군은 5년 동안 싸웠지만 결국 아이티 혁명군에게 패배했다.

 

 

1804, 11.

 

생도맹그로 불린 아이티 독립 공화국은 노예제, 프랑스 식민 지배에도 맞선 반란으로 시작했다. 수익성이 높았으며, 북아메리카 대륙은 많은 세입을 창출하하고자 했다. 막대한 부를 쌓고자, 아프리카인 노예, 커피,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죽을 때까지 일했다. 1791, 822일에는 노예제, 식민 지배를 폐지하고자 요구하는 노예 반란도 일어났었다. 반란자들은 식민 강국으로는 역대 세계 최대 규모였던, 프랑스, 스페인(에스파냐), 영국 연합군을 물리쳤다.

1804년 독립선언은 생도맹그 식민지 체제를 폐지하고, 원주민 타이노족으로 아이티를 복원했다. 그러나 유럽과 미국은 신생 공화국이었던 아이티에다, 수출입 금지 조치를 내렸으며, 극심한 경제적 곤경도 안겨줬다. 1824, 프랑스에서는 아이티 독립을 승인했으나, 전 노예주들에게 15000만 금프랑(268000억 원>을 배상하라는 조건을 붙였으며, 몸값 때문에 극심한 빈곤에 빠졌으며, 금액은 1947년까지도 상환하지는 못했었다. 미국은 1862년에 들어서야 아이티 독립을 인정했었고, 1915년에는 아이티를 침략하고는, 점령했다.


1915년 7월 28.

 

아이티를 침공한 미국이 저항을 분쇄하고 독재 정부를 세웠다독재 정부는 이후 20년간 아이티를 통치했다.

 

2004, 229.

 

아이티, 우익 세력이 일으킨 군사 쿠데타로,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 대통령은 실각했다. 아리스티드는 미국은 쿠데타를 지원했다고 주장했으며, 미국 하원의원들에 대한 증언을 포함한 상당 수 증거들도 주장을 뒷받침했다. 아리스티드는 전에 2차례 대통령을 지냈으나, 민간은 군을 통제하려고 시도했으며, 군부에서도 인기를 잃었으며, 국부에 대한 약탈을 막고자 조치를 취해서 도입하고자 했지만 부유층에게도 인기를 잃었으며, 19세기, 20세기에 갈취 당한 노예주 보상금 반환을 요구하면서부터, 옛 식민 강국 프랑스에게도 외면마저 받았다. 이끈 정부는 최저 임금을 2배 인상하고는, 빈곤층에 대한 식비 보조금을 지급했으며, 엄청난 수로 된 학교, 병원을 짓는 등 많은 진보적 개혁들을 시행했다.

 

 


 


에콰도르.

 


 

1922년 11월 15.

 

에콰도르 과야킬에서 총파업이 벌어지는 동안 노동자 300명에서 1000명이 국가로부터 학살 당했다앞서 전력과 전차 부문 노동자들이 경제적 생활 조건 악화에 항의하고자 파업을 벌이자 도시에 있던 다른 노동자들도 합세한 참이었다파업 노동자들과 가족들은 11월 15일 평화 집회를 열고자 모였다아무 도발이 없었는데도 무장 군인과 경찰이 군중에게 발포하며 수백 명이 사망했다.

 

19301230.

 

에콰도르 북부 고산지대 페시오에 자리한 대농장에서 일하는 원주민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과 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고, 인근 다른 노동자들도 파업에 가세했다. 노동자들은 대농장 본관을 습격하고는 현지 관리들을 내쫓았다. 정부는 군대를 보내 파업 지도자들을 검거하고는 그들의 주택을 파괴했었지만, 노동자들은 굳게 버텨서 양보를 얻어냈다. 같은 노동자들의 행동은 무엇보다도 에콰도르 전역에서 농촌 시위 물결이 촉발되는 데 일조했다.


1994, 2월 3.

 

에콰도르노동자들은 식스토 두란바예 대통령도 이끄는 보수 정부 경제 정책특히나 휘발유 가격은 71퍼센트 상승한 데 항의하고자 전국 총파업을 벌였다전날 총파업에 이어서 벌어진 총파업이었다.

 

 

엘살바도르.

 

1980, 624.

 

엘살바도르에서 미국을 등 업은 군부 독재, 반란군 암살대에 항의하는 총파업도 이틀간 벌어졌다. 경제 85%는 마비했고, 8만 명은 거리로도 쏟아져 나왔다. 경찰, 군대는 델가도 교외에서, 바리케이드를 세우던 2명을 살해했다.


1980년 12월 2.

 

엘살바도르 내전 중정부 지원과 함께 미국에서 훈련 받은 우파 암살대는 미국에서 온 가톨릭 수녀 4명을 납치해서 강간하고살해했다. 20여 년 동안 이어진 내전에서 노동자와 농민 조직은 물론이고 좌파 종교 단체들도 잔인한 폭력에 시달렸다.


1981년 12월 11.

 

엘살바도르 엘모소테에서 미국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지원을 받은 암살대는 1000명 가량을 학살했다희생자 절반은 어린이였다대다수는 살해되기 전에 고문을 당했고, 10세 소녀들까지 미국이 훈련한 병사들에게 강간을 당했다암살대는 좌파 반란 세력과 싸웠지만엘모소테 마을 사람들은 대체로 중립을 지키는 상태였다.

 

 

19891116.

 

미국이 지지하는 엘살바도르 군부가 예수회 사제 6명과 가정부, 가정부 딸을 살해했다. 정권은 사제들을 전복 세력으로 간주했다. 군인들은 사제들을 살해한 뒤, 좌파 유격대 소행으로 현장을 꾸몄다.

 


 

 


우루과이.

 

1858년. 1904. 11.

 

우루과이 항구도시 몬테비데오에서 혁명도 일어났다. 미국에서는 소유 자산을 보호하고자, 전함 2척에 탄 미군들은 우루과이에도 상륙했다. 1904년 같은 날 미국, 영국 해군도 도미니카 공화국에도 개입해서 211일까지 남았다. 미국 이익을 보호하고자 함이었다.

 

1932, 224.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경찰청장, 루이스 파르데이로, 운전사는 암살 당했다. 파르데이로는 미겔 아르캉헬 로시그노를 비롯한 구금 상태에서 무정부주의를 따르던 사람들을 고문했다. 로시그노는 에스파냐에서는 전설적인 혁명가 부에나벤투라 두루티와 함께 은행을 턴 인물이었다.

암살은 우루과이 아나키스트 소행으로 여겨졌다. 같은 날 밤, 파르데이로 빈소에서 방명록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쓴 문장도 있었다.

 

 

1972, 511.

 

우루과이 무정부주의 연맹(FAU), 무장조직이던 혁명 민중 조직(OPR-33)은 노동가들은 파업을 벌이는 공장 소유주, 세르히오 몰라게로라는 제화업자를 납치했다. OPR-33은 제화업자 몸값으로, 1000만 달러를 받아 우루과이 독재 정권이 저지른 범죄를 국제 사회에도 널리 알렸다.

 

1976, 628.

 

우루과이, 교사이자 무정부주의, 군부 독재 반대자였던 엘레나 킨테로스는 군부 구금에서도 탈출해서는 베네수엘라 대사관 구내로 들어갔다가 납치됐다. 우루과이무정부주의연맹 구성원이던, 킨테로스는 호송 군인들 틈에서도 도망치고는 대사관 담을 넘어 들어가 보호를 요청했다. 대사관 직원들도 도와주고자 했었지만, 군인들을 붙잡으면서, 줄다리기를 벌였고, 킨테로스 다리는 부러졌다. 마침내 군인들은 킨테로스를 끌어내고는 군 고문실로 이송했고, 킨테로스는 실종됐다. 베네수엘라 대사는 킨테로스 귀환을 요구했으나, 우루과이 정부는 거부했고, 커다란 외교 사태로까지 번지면서, 베네수엘라는 우루과이로부터 외교를 단절했다.

 

1976713.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 군인 무리가 우루과이 아나키스트 사라 멘데스와 그의 친구를 납치했다. 미국이 지지하는 독재 정부가 운영하는 고문실에서 깨어난 멘데스는 어린 아들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군인들이 강제로 떼어내 입양을 보내버렸기 때문이다. 모자는 2002년까지 상봉하지 못했다.

 

자메이카.


1935, 5월 19.

 

자메이카킹스턴 항구에서 자리한 유나이티드프루트에 고용된 바나나 운반 노동자, 200명은 파업에 들어갔다파업둘째 날역구 식민 경찰 발포로부터 여성 노동자 한 명은 부상을 입었다탄압에도 불구하고파업을 확산했고며칠 만에 도시 전역에서도 총파업은 벌어졌다.

군경 통제를 회복하는 데는 몇 주나 걸렸다.

 

1938, 14.

 

자메이카 세인트 토머스 구에서 서지아일랜드농장에서 일하던 노동자 400-500여명은 전면적인 파업을 밀어붙였다. 작물 수확을 재개하고자, 임금 인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영국 식민 당국이 보낸 경찰들은 파업을 깨고자 조치에도 나섰으며, 노동자, 63명이 연행, 113일에는 사흘에 걸친 재판도 진행했다. 주동자 3명에게는 1개월 중노동 징역형, 18명은 벌금형을 받았으며, 나머지는 풀려났다.

   

칠레.


1905년 10월 22.

 

칠레 노동자 3만 명이 열악한 노동 조건과 생활비 상승에 항의하며 봉기했다도살업자제화공시가 제조공태피스트리 제조공전신 노동자 등이 항쟁에 참여했고철도 노동자들은 선로를 폭발하기도 했다경찰보다 시위대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부유층은 백위군을 결성해서 노동자를 학살했다. 250명이 살해된 뒤로 항쟁은 잦아들었지만노동 계급 운동은 꾸준하게 세를 키워갔다.


1907년 12월 21.

 

역사상 최악의 파업 노동자 학살 사건이던 산타마리아 학교 학살이 발생했다칠레군은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살해했다이키케에 있는 산타 마리아 한 학교에서 천막을 치고 생활하던 파업 질산염 광부들과 부인자녀들이 몰상 당했다한 무정부주의자는 후에 학살 주범인 장교를 암살하고자 했다.

 

 

1914년 12월 14.

 

파업 광부와 그들의 부인과 자녀 2000여 명을 학살해서 칠레 역사상 매우 유혈적인 학살로 손 꼽히는 산타마리아 학교 학살의 주범인 로베르토 실바 레나르드 장군은 거리에서 안토니오 라몬 라몬의 칼에다 일곱 군데를 찔렸다라몬은 학살 사건에서 형제를 잃은 에스파냐의 무정부주의자였다레나르드는 칼을 맞고도살아남았지만 장애를 얻었다노동자들은 라몬을 구금하자그를 옹호하는 대중적인 운동을 벌였다라몬은 5년 징역형을 받았다.


1920년 7월 22.

 

칠레 정부군이 세계산업노동자연맹 산티아고 본부를 침탈했다세계산업노동자연맹 소속 해운노동자들이 국내에서 기근이 벌어지는 동안 곡물 수출을 막고자 3개월 간 벌이고 있던 파업을 깨뜨리려는 시도였다전국적으로 아나키스트들을 겨냥한 대대적인 탄압이 이어졌지만세계산업노동자연맹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1923년 다시 해운 파업을 조직했다.


1920년 9월 29.

 

칠레의 무정부주의 싱니이자 세계산업노동자연맹 회원인 호세 도밍고 고메스 로하스가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정신을 잃은 뒤 불과 2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4만 명이 넘는 인파가 장례식에 참석했고그가 수감 중에 쓴 시 <동정심의 항의>가 낭독됐다이 시는 이후 칠레를 지배하는 과두 집단에 반대하는 무정부주의와 평화 단체의 상징으로 남았다.

 

 

1934, 4월 27.

 

산티아고칠레노동자연맹(FOCH), 본부로는 기업주들로부터 동원한 민병대경찰 습격을 받았다노동자 7어린이 1명은 사망하고는 200명은 중상을 입었다.

 

1902년 7월 2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대통령의 군사통치에 항의하고자 칠레 노동자들의 2일간 총파업이 시작됐다미국과 영국에게 지지를 받은 독재자는 통치 기간 동안 수만 명의 노동자와 반대파를 고문하고 살해했다.

 

 

1946, 128.

 

칠레, 산티아고, 불네스 광장에서 물가 상승에 항의하고 시위를 벌이던 수천 명에게 경찰은 발포하면서, 6명은 사망하고, 몇 명은 부상을 입는 학살도 벌어졌다. 사내 식료품점 가격 인상에도 항의하는 초석(비료, 화약 원료, 광물) 노동자들에 대한 파업을 진압했으며, 다른 노동자 수천 명은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지지 행진을 벌인 뒤에 벌어진 일이었다.


1973년 9월 11.

 

칠레 우파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키며 선거로 선출된 살바도르 아옌데가 이끄는 좌파 정부를 무너뜨렸다아옌데는 지난 달 피노체트를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는데피노체트는 지위를 이용해서 쿠데타를 전두지휘했다첫째 날새 정부는 수 천 명 대부분은 노동 계급 활동가와 좌파를 일제 검거해서 국립 경기장에 밀어 넣고 다수를 살해했다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 지지를 받은 잔인한 군사 독재는 신자유주의 세력인 경제학자 그룹 시카고 보이스의 가혹한 우파 경제 사상을 실행으로 옮겼다국제 전문가들은 그 결과로 경제 기적이 이뤄질 것이라고 예고했지만실상은 국민 절대 다수의 생활 수준 하락이었다임금 감소와 함께 보건교육죽 등 분야에서 정부 지출이 삭감됐기 때문이다조금이라도 저항할 기미가 보이는 노동자들은 살해되거나고문을 받거나투옥 또는 실종됐다당시 일반적인 처형 방법으로는 헬기에 태워 바다나 안데스 산맥 위에다 던져버리는 것이었다오늘날 대안 우파의 많은 구성원은 이런 살인을 헬기 밈으로 묘사하면서 찬양한다그 뒤로 17년 간 3000명 이상이 정권에게 살해됐고, 3만 7000여 명이 불법 투옥되거나 고문 당했다많은 수감자가 간수들에게 조직적인 강간과 성적 학대를 당했다특히 여성들이 표적이 됐다일부 여성들은 교도관에게 강간을 당한 것 외에도 개나 쥐거미 등을 이용한 성폭행을 당했고가족인 남성과 성관계를 강요 당하기도 했다살해된 이들 가운데 많은 자녀가 가톨릭 교회로 넘겨지거나 다른 가정으로 입양됐는데아이들은 부모에 관한 아무런 정보도 받지도 못하거나 사고로 사망했다는 이야기만을 들었다.


1973년 9월 16.

 

칠레 공산주의자포크 가수음악가인 빅토르 하라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이 지휘하는 부대에게 살해됐다미국이 지지하는 쿠데타가 벌어지고 며칠 뒤에 일어난 일이었다하라는 다른 수천 명과 함께 포로로 잡혀서 칠레 국립 경기장에 억류됐고경비병들은 그를 고문하며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손을 으스러뜨린 뒤 기타를 쳐보라고 강요했다곧이어 하라는 40발이 넘는 총알 세례를 받았다. 2019년 칠레 각지에서 폭발한 노동 계급 항쟁의 물결 속에서 거대한 대열을 이룬 시위 군중은 <평화롭게 살 권리>를 비롯한 하라 노래들을 거리에서 목청껏 불렀다.


1974년 9월 18.

 

칠레 교사이자 혁명가 플로라 사누에사 레보예도가 63세 나이로 사망했다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우익 정권에게 잡혀 고문 당한 결과였다플로라는 1935년 에스파냐로 가서 내전 기간 동안 사회 혁명에 참여했다파시스트 세력의 승리 뒤로 프랑스로 망명해 1942년까지 정치범으로 억류됐다가 칠레로 돌아왔다. 20세기 초에 존재한 노동 계급 문화 협회에서 감화를 받은 프롤라는 이키케에서 여성 방적공을 위한 루이즈미셸무정부문화협회(ALLM)를 창설했다가브리엘 곤살레스 비델라의 독재 아래로 파시스트들이 무정부주의자와 공산주의자를 박해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프롤라는 사실상 많은 활동을 은밀하게 진행했다. 1953년 루이즈미셀무정부문화협회학교로(ELLM) 일므을 바꾸었다전성기에는 정규 학생은 70명도 넘었지만 1957년 문을 닫았다프롤라는 피노체트 쿠데타 뒤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가택 연금을 당한 플로라는 뒤로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1976년 9월 21.

 

칠레의 망명 사회주의자 오를란도 레텔리에르와 정책 연구소 직원 로니 모피트는 워싱턴D.C에서 살해 당했다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의 비밀 경찰이 자동차에 설치한 폭탄으로부터 희생됐다미국이 지지하는 독재자의 요원들이 벌인 이 같은 살인은 미국이 지원하는 라틴아메리카 반공 프로그램인 콘도르 작전의 일환이었다이 작전으로 최대 6만 명의 노동 계급 투사사회주의자무정부주의가 살해됐다.

 

1912년 9월 22멕시코에서 노동조합주의 노동 조합 세계노동자의집(CDOM)이 창설됐다.

하지만 멕시코 혁명의 격변이 벌어지는 동안 이 노동조합은 분쟁에 연루된 자본가 파벌 베누스티아노 카란사의 입헌주의 세력을 지지하기 시작해 결국 에밀리아노 사파타의 혁명적 농민군과 싸우게 된다훗날 세계노동자의집이 더 이상 쓸모 없다고 판단한 카란사 정부는 등을 돌리고 노조를 해산했다.

 



 

201184.

 

칠레에서 교육개혁을 요구하는 대중적 운동이 폭발하는 가운데 시위대와 군경 사이에 폭력적 충돌이 벌어졌다. 5월에 시작된 시위는 주로 교육에 대한 국가의 지원을 확대하고, 더 많은 저소득층의 고등교육 진학과 원주민 마푸체족 학생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학교를 개선하기를 요구했다. 84, 파업에 참여한 학생들이 수도 산티아고에 있는 대통령궁을 향해 행진하던 중 전투경찰의 습격을 받았다. 그러자 도시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도로가 봉쇄됐으며 폭력 사태가 벌어졌다. 과도한 할부이자를 붙이던 대형 쇼핑몰 라폴라르가 불에 타기도 했다. 그날 하루에만 847명이 연행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몇 달 간 시위는 더욱 확대됐고, 정부가 저금리 학자금 대출을 도입하는 등 일정한 타협안을 제안해도 불만은 가라앉지 않았다.

 

2011824.

 

전투적 학생 운동이 펼쳐지는 가운데 칠레노동자총연맹(CUT)이 전국적인 2일 총파업을 선언했다. 무려 60만 명이 거리로 나왔고, 경찰 대응으로 750명이 체포되고 훨씬 많은 수가 부상을 입었으며 16세 소년 한 명이 사망했다. 며칠 뒤 정부는 학생 운동과 노동 운동 핵심적 요구를 받아들이며 영리 교육 기관에 대한 국가 예산 지원을 금지했다.

 

 캐나다.


1919, 5월 24.

 

캐나다앨버타주탄광 노동자수천 명은 임금생계비노동 조건을 둘러싸고는 쟁의를 벌이고 파업에도 나섰다하나로큰노동조합(OBU)으로 조직한 광부들이었다혁명 노동조합은

사회를 장악해서는 집단으로도 운영하고자모든 노동자를 단일한 노동 조합으로 조직하고자 했다앨버타주드럼헬러에 있던 13개 광산 회사는 교섭을 거부하고는 귀국하던 참전 군인들을 고용해서몽둥이쇠파이프로 무장하도록 했다그러고는 공짜 술을 제공하고파업 노동자들에게 겁을 주고는 조직 책임자들을 두들겨 패고는 고문하라고 부추겼다경찰은 수수방관할 뿐이었다.


1919, 6월 21.

 

캐나다역사상 매우 유명한 총파업으로는 위니펙 총파업은 벌어진 가운데피 묻은 토요일 사건도 벌어졌다파업 노동자 3만 명은 시위를 벌이고자모이자 위니펙 시장은 노동자들을 위협하고자 엄중 경고했다군중들을 향해 돌격한 기마 경찰은 곤봉을 휘두르고는 총 쏘았다.

폭력 진압은 파업 노동자 2명 사망으로 이어졌다마이크 소코월스키는 심장에 총 맞았고,

마이크 셔저바노위츠는 두 다리에도 총 맞아 괴저로 사망했다밖에도최대 45명은 부상 입고는 많은 사람들도 체포했다당시 검거된 동유럽 이민자 4명 가운데 2명은 추방당했다.

같은 날 시위로는위니펙은 군대에게 점령당하면서 끝났다나중에 경찰은 피 묻은 토요일 사건에 대한 논평을 썼다는 이유로파업 노동자들 신문, <웨스턴레이버뉴스>를 폐간하고는 편집진들을 연행해갔다파업은 탄압으로 깨졌다.

 

 

1932, 45.

 

1907-1939, 영국 자치령이었던 현재 캐나다 뉴펀들랜드, 래브라도주에서 1만 명 군중들은 중앙 정부 청사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는 물가 상승, 연금 축소에도 항의했다. 시위대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한 어린이 머리를 곤봉으로 때린 경찰들은 예상 밖 저항에도 부딪혔다. 한 경찰관들은 말에서 끌어 내려져 몰매를 맞았고, 시위 군중들은 청사를 박살내고는 불을 지르고,

총리를 찾겠다고 쳐들어갔다. 경찰관, 사제 무리는 총리를 안전한 곳응로 피신하고자 했지만,

총리는 몇 차례 구석으로 몰리다가 얼굴에다 주먹을 한 대 맞고는 가까스로 피신했다. 시위대는 시내 주류 판매점을 전부 약탈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붕괴했다.


1935, 6월 18.

 

브리티시컬럼비아주벤쿠버에서는 무장 경찰왕립캐나다기마경찰(RCMP), 마운티스는 수백 명을 직장 폐쇄로부터 쫓겨난 1000여 명부두 노동자지지자들을 폭력 진압했다노동자들은 파업 파괴자들에게 배에서 짐을 부리는 걸 막고자밸런타인 부두로 가던 길이었다.

도망치려다가 다리에도 총 맞은 1명을 포함해서노동자 몇 명은 병원에도 입원했다폭력 진압 뒤로는 파업은 주춤했다그러나 파업을 계기로 새로운 독립적인 노동 조합을 설립하는 길은 열렸고새 노동조합 조합원들은 몇 년간 많은 파업에서도 승리했다.

 

1972, 411.

 

퀘벡, 공공 부문 노동자, 20만여 명은 총파업에 참가하면서부터 주 전체는 마비됐다. 정부는 대투쟁을 진압하고자 했지만 더 많은 노동자들은 거리로 쏟아졌다. 30만여 명은 스스로 조직한 자발적 파업 물결에도 참가했다.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하고는 한 라디오 방송국까지 접수하면서부터 파업 방송을 내보냈다.



1972년 10월 22.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벤쿠버 여성주의자들이 캐나다서비스 사무직 소매노동조합(SORWUC)을 결성했다이들은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은주변화된 저임금 부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대변하고자 했다대기업 노동 조합들은 우선 순위에 두지 않는 부문이었다노동 조합 간부는 노조 규약에서 정해진 최고 임금 이상을 받지 않았고기층 조합원들이 단체 협약 목표를 직접 결정했다노동 조합은 또한 원주민 여성성노동자싱글맘 권리에 집중했고어린이집 운동을 벌이고임신 중단권을 옹호했다급진주의 때문에 고용주와 노동 운동 계급 관료 양쪽 모두에게 표적이 됐다. SORWUC는 1986년에 해산했다.

 

 


1989년 12월 6.

 

캐나다 몬트리올이공대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나 대부분 공학 분야에서 공부하던 여성 14명이 사망했다. 25세 총기난사범은 자신이 여성주의와 싸운다고 주장하며 특히 여성을 겨냥했고, 28명에게 총격을 가한 뒤 자살했다피해자 중 4명은 남성이었다사망자는 준비에브 베르주롱엘렌 콜강나탈리 크로토바르바라 데뇨안마리 에드워드모드 아비에르니크마리즈 라가니에르마리즈 르클레르안마리 르메소니아 펠레티에미셸 라샤르아니 생아르노아니 튀르코트바르바라 클루츠니크비다예비츠 등이다캐나다는 이날을 여성 폭력에 반대하고희생자를 추모하는 국경일로 기린다.

   

콜롬비아.

 

1920, 212.

 

콜롬비아, 안티오키아주 벨로에서 자리한 섬유 공장에서는 최초로 여성들이 조직한 파업도 일어났다. 400여 명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과 동일 임금 지급, 관리자 성추행 중단, 병가에 대한 벌금 폐지, 노동자 감시, 몸수색 축소, 아버지, 남편이 아닌 여성 노동자, 본인에게 임금 지급 등을 요구하면서 일손을 놓았다. 조직자들로는, 테레사 타마요, 아델리나 곤살레스, 카르멘 아구델로, 테레사 피에드라이타, 마틸데 모토야, 베트사베 에스피노사 등이었다. 공장에서 일하는 남성 노동자들은 대부분 여성들 파업을 무시한 채로 일했으며, 경찰은 파업을 깨뜨리고자 애섰다. 그러나 메데인 시민들에 대한 폭 넓은 지지와 다른 노동자들로부터 연대 기금을 받기도 해서 여성 노동자들은 끝까지 버텼다.

 

쿠바.


1843년 11월 5.

 

카를로타 루쿠미라는 한 여성 노예는 쿠바 마탄사스에서 봉기를 이끌었다카를로타와 동료들은 마체테를 휘두르고케틀드럼을 울리며 다른 노예들을 불러 모은 뒤 사탕수수 제식 농장의 노예주들을 살해하고계속해서 이웃 제식 농장으로 이동하며다른 노예들을 풀어줬다반란은 이듬해까지 지속되다가 당국으로부터 폭력 진압됐다카를로타는 말 네 필에 사지가 묶인 채로 갈가리 찢어졌다. 1886년에 이르러 마침내 쿠바에서 노예제는 폐지됐다.


1933년 7월 27.

 

쿠바 수도 아바나의 버스 운전사들이 파업에 들어갔고곧이어 지역의 다른 운전사들도 연대 파업에 돌입했다노동자와 학생들의 총파업으로 정점에 이르게 되는 소요의 시작이었다총파업으로 국가 전체가 마비되자 잔인한 독재자 헤라르도 마차도는 권좌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마차도는 노동조합 지도자들 및 쿠바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최후 협상을 시도하며파업을 끝내면 노조와 공산당을 합법화하고 지원도 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거부당했고경찰이 시위대 20명을 살해한 뒤에도 파업은 계속됐다. 8월 9군부는 마차도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기로 결쩡했고이틀 뒤 정부가 붕괴됐다.

 


1934년 7월 6.

 

쿠바 도시 트리니다드에 위치한 플랜테이션 농장 2곳에서 일하는 노동자 800명이 관리인 사무실 앞에서 시위를 벌이며 일거리가 부족한 데 불만을 토로했다경찰이 시위대 접근을 막자 노동자들이 약탈로 대응하면서 폭력 사태가 일어났다소요는 다른 농장으로도 퍼졌다노동자들은 사장 2명을 습격했고회사 본부 중 1곳에 돌멩이를 던지고 불을 질렀다영국 식민 경찰은 시위자 12명을 체포했다.

 

1952, 310.

 

쿠바, 풀헨시오 바티스타는 쿠데타를 이끌고는 대통령까지 올랐다. 미국과 경제계(재계), 부유층 엘리트들에게 지지를 받은 바티스타 정부는 반공 숙청으로 수천 명을 살해했다. 바티스타는 1959, 혁명으로 쫓겨났다. 상원의원 존 F. 케네디도 훗날 연설에서 바티스타 통치를 묘사하기도 했다.

   

19621027.

 

쿠바 미사일 위기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 소련 잠수함 B-59 바슬리 아르히포프는 미국 군함을 향해 핵어뢰를 발사하라는 함장 명령을 거부했다. 그가 명령을 따랐더라면 초강대국 간 최후 핵전쟁이 벌어졌을 것이다. 미국 군함들은 잠수함이 핵무기를 탑재하고 있음을 알지 못한 채로 잠수함이 부상하게 만들고자 근처로 폭뢰를 떨어뜨렸다. 모스크바 무전이 끊긴 상태였던 소련 장교들은 3차 대전이 시작됐다고 결론지었고, 두 장교는 수면 위에 있는 군함들을 폭파하는 데동의했다. 세 장교가 만장 일치로 동의해야 하는 발사 조건은 아르히포프의 반대로 충족되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건 아르히포프가 의견을 달리한 덕분이다.

 


   

트리니다드 토바고.

 

1919년 12월 1.

 

트리니다드토바고 부두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는 가운데 운영 중인 창고를 습격해 파업 파괴자들을 쫓아내고 시내에서 행진을 벌이면서 회사들이 문을 닫았다공공 부문 노동자석탄 운반공인도인 농업 노동자 등도 파업에 들어가며 사실상 총파업이 벌어졌다식민 본국인 영국은 군대를 보내 파업 노동자 수십 명을 검거해 82명을 투옥하고핵심 조직자 4명을 추방하는 식으로 대응했다정부는 또한 파업과 시위를 중단시키고자 엄격한 법을 제정했다. 그럼에도 부두 노동자들은 25% 임금 인상을 쟁취했고다른 회사 노동자들도 양보를 얻어냈다.

 

1937, 619.

   

고용주들은 석유 노동자, 임금 인상 요구에도 동의하지 않자, 트리니다드섬(트리니다드토바고 섬)에서 한 유전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파업에도 들어갔다. 영국 식민 당국은 쟁의를 이끄는 데 조력하는 석유 노동자 출신, 전도사 유라이어 버틀러를 체포하고자 했지만, 노동자는 군중들이 둘러싸고 지켰다. 경찰관 2명은 사망했다. 노동자들은 경찰과 한 명에게 등유를 끼얹은 뒤 불태웠다. 버틀러는 몸을 숨겼고, 파업은 순식간에 곳곳, 유전으로 퍼져나갔고, 곧이어 산업 전반에서도 파업은 일어났다. 비상사태는 선포했고, 영국 군함 2척은 622, 23일에도 서둘러, 섬으로 달려왔다. 잉글랜드, 아일랜드에서도 해병대와 추가 경찰 인력을 싣고 왔다.

현재 2개 군부대도, 노동자들을 진압하는 데 동원했다. 많은 노동자는 체포됐고, 투옥되자,

반란을 진정됐다. 버틀러는 9, 잡혀서는 선동죄로 2년형을 받았다.

 

 


파나마.

 

19251012.

 

파나마에서 대규모 집세 납부 거부 운동과 노동 파업이 한창인 가운데 경찰이 조직가 2명을 살해하고 로돌포 치아리 대통령이 항쟁을 진압하고자 미군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다음 날, 미군 보병 3개 대대와 1개 기관총 포대가 도착해서 파나마 시티를 장악하고는 5인 이상 모이기를 금지하고 집회를 열려는 파업 노동자들을 모두 체포했다. 앞서 파나마 시티 세입자들은 임대료 인상과 비위생적인 주거 환경에 항의하고자 집세를 내지는 않고 있었다. 경찰이 세입자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면서부터 몇 명을 살해하고, 수십 명에게 부상을 입히고는 많은 사람을 체포하고, 국외 추방한 뒤, 파업은 콜론까지 확산되며 노동자들의 총파업은 시작됐다.

 

페루.


1912년 12월 15.

 

페루지역노동자연맹(FORP)은 2차 총회를 열어 하루 최대 8시간 노동 요구안을 채택했다. 10월에 결성된 연맹에는 전기 노동자섬유 노동자일용직 노동자 노동 조합뿐만 아니라무정부주의 노동 단체 등 수 많은 노동조합이 가입했다.

 

1913, 17.

 

페루 노동자들은 고용주들 제안을 거부했으며, 하루 최대 8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파업을 벌였다. 엘 카야오에서는 가스 노동자, 공장 노동자, 인쇄공, 제빵사 등 노동조합에도 속한 노동자들은 파업에 들어가면서 산업 전체는 마비됐다.

 

 

1919, 527.

 

페루, 리마, 노동자들은 높은 생활비에 항의하고는 총파업을 선언, 지역 경제 활동을 완전하게 마비하게 했다. 정부는 최소한 100명 시위자를 살해하고는 수백 명에게 부상을 입히고는 투옥하는 식으로 파업을 진압했다.

 


   

푸에르토리코.

 

1937, 321.

 

푸에르토리코, 폰세에서는 평화적인 시위대를 습격한 경찰은 19명을 살해하고는 수백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시위대는 투옥된 분리주의 운동가이자 지도자였던, 페드로 알비수 캄포스에 대한 석방을 요구하면 행진했다. 경찰은 미국에서 임명한 총독 지시를 받고는 행동했다. 사망자도 나타나자, 자위적 조처였음을 주장하고자, 한 사진기자와 함께 사진을 조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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