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 아저씨 개조계획
가키야 미우 지음, 이연재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2월
평점 :
절판


9.7 














 처음에 제목을 봤을 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무슨 로봇도 아니고 개조라니, 너무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얼핏 했었다. 책을 펼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개조시켜주는 걸 감사히 여기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 주인공이 꼰대라 오히려 순화된 표현이구나 하고 인상이 바뀌었다. 또 한편으로 개조란 단어가 참 적합한 단어란 생각도 들었다. 이를테면 구제라든가 갱생이라든가 쓰려면 훨씬 자극적인 표현이 있을 텐데 개조라니, 난 이 단어에서 로봇을 떠올렸다. 최근에 로봇과 관련된 소설을 읽어서 그런 걸까? 작품 중반에 주인공이 본격적으로 변화하게 되는 계기가 마치 로봇이 특이점을 맞는, 이른바 개조를 당하는 것과 같은 모습을 연상시켰다. 


 남자와 여자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여자에겐 모성이란 본능이 있기에 남자는 바깥에서 일하고 여자는 집에서 아이를 돌보면 된다고 진심으로 믿는 인간이 바로 주인공이다. 그리고 이런 캐릭터는 주인공 혼자만이 아니다. 작중에 등장하는 주인공 세대는 다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고 실제로 정년 퇴임을 할 정도의 연령대인 일본 아저씨들의 생각이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테고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씁쓸한 건 주인공과 같은 세대라 할지라도 아내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으며 주인공의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주인공의 모습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하는 짓이 판박이란 것이다. 페미니즘의 관점에서도 할 얘기가 대단히 많은 작품이지만 작중에선 적어도 성별을 근거로 꼰대의 원인을 분석하진 않는다. 




 주인공이 딸하고 설전을 벌일 때마다 '그럼 내가 구닥다리라는 거냐'고 물을 때마다 딸은 '구닥다리냐 아니냐의 문제라기 보다 그냥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 이라 선을 긋는다. 이 작품은 정년 퇴직한 아저씨들이 가정에서 외면을 당하는 사회 문제를 신랄하고 통찰력 있게 들여다본다. 단순히 그들이 남자라서가 아니라 그들이 국가 차원에서 잘못된 교욱을 받아왔기 때문이라고 어느 정도 동정적으로 접근한다. 남자들을 육아 걱정 없이 회사에서 마음껏 굴릴 수 있도록 모성이란 신화를 만들어 여자를 집안에 가두고 자연스레 집안일이나 육아를 여자나 하는 하찮은 일 - 주인공은 아예 일도 아니라서 가정 주부는 부러운 삶이라 생각한다! - 로 생각하게끔 분위기를 조성해 사회 생활에 자발적으로 매달리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전후 맥락을 떼고 적으니 꼭 음모론처럼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이 이른바 '정부의 농간'의 실체를 체감하고 자기 신념을 꺾는 것은 바로 자기를 자애롭게 길러주셨다고 믿어온 어머니가 실은 자애로움과는 거리가 먼 사람임을 오랜만에 만난 형제들의 입을 통해 듣고 난 다음부터다. 그 전까지는 아이는 엄마가 최소 3살까지 키워야 한다 -> 그래서 며느리가 일을 하는 건 무슨 가당찮은 일이냐고 생각했고 아이 돌보기는 모성을 가진 여자들이 해야 하는 일이다 -> 그래서 남자인 자신이 아들 부부가 맞벌이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손주들을 돌보는 게 당치도 않다고 어디에서건 불만을 호소했다. 하지만 자신은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올바른 어른으로 자라났다는 기본 전제가 틀렸음을 들은 순간 주인공은 자신의 논리의 구멍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어쩌면 소설 분량에 맞추느라 주인공의 개조가 약간 급작스런 감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사람이 로봇도 아닌데 기본 전제가 틀렸다는 걸 계기로 점차 바뀌어 나간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냐고 잠시 입을 삐죽거렸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의 첫인상은 딸에게 언제 결혼할 생각이냐며 모성을 운운하는 등 딸이 대꾸를 해주는 걸 감사히 여겨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답이 없는 작자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작가는 일단은 대화가 오갈 수 있다는 건 미약하나마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는 반증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적잖은 시행착오가 있을 것이고 빠른 시일 안에 가능하진 않을 테지만 학력이나 어느 회사 출신이냐를 떠나서 주인공이 가족과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아저씨라면, 말년에 그들에게 비참하게 외면당하지 않기 위해 당연히 방법을 찾으리라 결론을 내린 것일 터다. 그래, 목 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말처럼 말이다. 


 중간에 아저씨의 꼰대 마인드는 정부의 농간으로 인한 가슴 아픈 결과라며 사뭇 그들을 동정했지만, 결국 그들에게 가족들로부터 돈 벌어다주는 기계 이상 이하로 취급되다가 버려지고 싶지 않다면 스스로의 노력이 절실하다는 경고를 이 소설에선 놓치지 않고 있다. 아울러 이 꼰대 마인드가 단지 중년 세대의 전유물이 아닌 유난히 그들의 아들들에게 찰떡같이 계승되고 있는 것 역시 놓치지 않았다. 주인공보다 조금 사정은 낫지만 미래에 아내로부터 버림받으리라 뻔히 예상되는 주인공의 아들의 모습을 보면 작가가 이 작품을 단지 여자들 통쾌하라고 집필한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생각보다 비참함이 감도는 이야기지만 저자 가키야 미우의 필력 덕에 읽히기는 술술 읽힌다. 이 작가의 책을 접할 때마다 제2의 오쿠다 히데오란 생각이 늘 드는데 이번에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 확실히 느낀 것이 있는데 난 예전부터 채만식의 <치숙>처럼 암 걸리게 만드는 언행을 보이는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을 무척 좋아하는 것 같다. 결국 그 주인공이 어떤 변화를 겪을지 궁금해서 잘 읽히기도 하고, 혹은 반대로 그 주인공이 끝까지 변화하지 않고 한심하게 살아가더라도 반면교사 삼으며 만족스럽게 책장을 덮는 것 같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일종의 공공의 적이 있으면 가독성은 자연스레 확보되는구나 싶었다. 욕하면서 보게 된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건가. 


 물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전형적인 전자에 해당한다. 참으로 감동적이게도 이 이야기에서 실질적으로 개조 계획을 당하는 인물은 주인공이 아닌 주인공의 아들이다. 그 계획은 주인공이 자기 며느리와 상의한 끝에 실행된다. 주인공은 이미 아내로부터 버림받았고 딸도 지고 못 사는 성격이라 맞받아쳤을 뿐 근본적으로 자기 아버지인 주인공을 포기하고 있었다. 주인공은 어느 정도 자력으로 스스로를 개조한 것이다. 하지만 똑같이 맞벌이하면서 주말엔 자기만 쉬고 아내한테 집안일을 미루는 자기 아들의 꼬라지를 보고서 자기와 같은 전철을 밟을까 주인공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다짐을 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며느리에게 상의하는 장면은 다신 잊지 못할 것 같다. 




 <정년 아저씨 개조계획>은 세대 갈등, 남녀 갈등, 육아 문제 등 쉽게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과장되지 않고 충분히 있음직한 상황과 인물들을 보여줌으로써 흡입력 있는 이야기를 선사한 수작 중의 수작이었다. 지금까지 접한 작가의 세 편의 작품 중 가장 가독성이 좋았고 완성도가 높았다. 읽으면서 나도 우리 가족의 모습이 떠올라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모든 사람들이 읽어줬으면 하는 작품이다. 가장 변화가 필요한 꼰대들이 과연 이 책을 읽는다고 미동조차 보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니, 애당초 꼰대들이 책을 손에 쥐어준다고 해서 펼칠 것 같지도 않지만... 다시 생각해도 이 책의 주인공은 꼰대로서 약과 중의 약과가 아닌가 싶었다. 






 p.s 이 책을 읽고서 '말을 해줬어야지, 똑바로 말해주지 않는데 어떻게 알아?' 만큼 상대를 열불나게 만드는 말이 없음을 새삼 깨달았다. 앞으로 무의식적으로 이 말을 하지 말아야지 싶다가도 싫어하는 상대에게 일부러라도 해야지 라는 음흉한 생각도 들었다. 

뭐, 아무튼 뭐가 됐건 간에 지금처럼 아빠가 나설 때는 위기 상황만으로 해 뒀으면 좋겠어.

위기 상황이란 건 평생토록 없어. - 37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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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중독 ㅣ 아름다운 청소년 17
김소연.임어진.정명섭 지음 / 별숲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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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로봇에 대한 책을 읽을 필요성을 느껴서 집어든 책. 3년 전에 읽었을 때완 달리 만족도가 덜하거나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이 달라지는 등 감상의 변화가 있었다. 전엔 표제작이 제일 좋았는데 이번엔 첫 번째 수록작 '특이점을 지나서'가 더 애정이 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진로에 대한 고민을 깊게 했던 모양인지 로봇의 조언으로 자기 진로를 현명하게 바꾼 주인공의 모습에 쾌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은 역시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해야 한다. 

 개인의 적성보다 당대의 전망 있는 직업, 이를 테면 작중에선 로봇이 정복하기가 요원해 보이는 서비스업 쪽으로 학생들의 진로가 결정된다는 게 어떤 의미에선 디스토피아에 가깝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앞으로의 시대가 로봇과 경쟁하느냐 아니냐를 놓고 따질 때 무조건 후자의 노선을 취하는 게 현명한 처사라고 여겨지기에는 인간의 가능성과 잠재력은 참으로 무한하고 예측 불허하지 않은가?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발언일 수 있지만 말이다. 


 '특이점을 지나서'는 가스라이팅에서 해방되는 주인공, 로봇이라는 이질적인 존재와의 우정, 본래 인공지능 관련 용어인 특이점을 인간에게 대입해 보다 보편적인 개념으로 확장시키는 등 70페이지 가량의 짧은 분량에서 청소년 소설의 작풍에 맞게 여러 요소를 잘 다뤄낸 작품이었다. 로봇, 그러니까 인공지능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하면 자연스레 사람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특이점이란 개념을 사람이 자신의 꿈을 설정하고 나아가는 시점으로 해석한 게 퍽 인상적이었다. '특이점이 오다'라는 말이 어감에 비해 그렇게 특별하지도 않고 위험하지도 않으며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는 일임을 강조한 게 - 어쩌면 있어야만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 이 작품 '특이점을 지나서'의 놓칠 수 없는 성과였다고 본다. 

 <로봇 중독>과 <거짓말 로봇>은 로봇이란 소재를 통해 생명 존중과 선의의 거짓말에 대해 얘기하는 흥미로운 작품들이었다. 전자는 로봇을 반려 동물로 치환시켜 묘사해 상당한 따스함과 감동을 선사하고 후자는 거짓말을 하는 로봇의 위험성 - 로봇은 절대 거짓말을 못한다고 여겨지기에 사소한 거짓말도 위험하기 짝이 없다! - 과 더불어 결국 거짓말이 나쁜 것인가, 아니면 거짓말을 하는 당사자의 의도가 나쁜 것인지 고민해보게 만든다. 중요한 건 이 책에 수록된 세 작품 모두 로봇과 공존하는 미래를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묘사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작중에서처럼 발전된 인공지능이 흔해진 미래가 마냥 긍정적이기엔 기술적인 완성도가 필수적이겠고 때문에 불안 요소도 많을 텐데... 인공지능 개발과 도래가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시대의 변화라고 한다면 공존의 방향을 모색하는 게 현명하지 않느냐는 게 바로 이 엔솔로지의 취지였던 것 같다. 


 3년 전에 읽었을 때완 달리 이번엔 청소년 소설집 특유의 유치함 내지는 얕은 깊이가 드문드문 보여 '내가 왜 이 책을 다시 읽으려고 구매까지 했는가' 하는 당혹감과 마주해야 했다. 하지만 작풍이 유치하거나 깊이가 얕아 보인다고 해서 주제의식이나 작가들이 주목하는 이야기들까지 유치하거나 깊이가 얕게 느껴지지 않아 결과적으로 다시 읽는 보람을 얻을 수 있었다. 과연 정말로 우리가 로봇과 우정을 쌓을 수 있는 미래가 도래할는지 모르겠지만, 설령 그런 미래가 도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책에서처럼 일단 미래를 긍정적으로 상정하고 상상해보는 것은 결코 무가치한 일이 아닐 터다. 다시 말하지만 로봇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하면 사람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의 수록작들도 결국엔 로봇보다 청소년의 진로 설정, 생명 존중, 선의의 거짓말에 대해 얘기하고 있잖은가. 

 몇 년에 걸쳐 로봇에 대한 소설을 쓰고 있는 내 입장에서 이러한 로봇 소설의 공식은 변함없이 매력적이고 날 명심하게 만들기도 했다. 로봇에 대해 얘기하려고 하면 어느 수준까지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느냐 그게 항상 걱정이기 마련인데, 어쩌면 전문적인 지식보다 사람이란 존재에 대한 통찰이 로봇 소설을 배로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 같아 막막하던 차에 위로가 됐다. 로봇 이야기는 곧 사람에 대한 이야기... 꼭 명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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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독서
김경욱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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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8.5 







 우리나라 순수 문학 단편집을 접할 때마다 항상 드는 생각이, 첫 번째랑 두 번째 수록작을 지나면 급속도로 흥미가 식게 된다는 것인데 이 책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아주 전형적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뒤로 갈수록 수록작들이 적어도 지금 시점에선 평이하게 읽혔는데, 아주 다행인 것은 앞선 두 작품 '위험한 독서'와 '맥도날드 사수 대작전'은 너무 좋았다는 것이다. 보통 단편집의 수록작들의 과반수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고 판단됐을 경우 과감하게 아예 읽지 않은 셈치기도 하는데, 앞에 배치된 두 수록작 덕에 이번엔 그 생각을 접기로 했다. 

 뒤의 작품들도 언젠가 다시 읽어보려고 한다. '위험한 독서'도 처음에 이상문학상 수상집에서 접했을 때보다 훨씬 좋았으니까 말이다. 



 '위험한 독서' 


 사람의 인생의 흔적을 마치 독서한다는 식으로 묘사하며 풀어낸 게 제법 중독성이 있던 작품. 작가가 이 작품을 집필했을 터인 2000년대 초반에 싸이월드를 비롯한 미니홈피가 왕성해질 무렵이었는데, 그 시대상을 독서 치료사인 주인공의 내면을 통해 다시금 돌아볼 수 있다는 게 흥미롭기도 했다. 독서라는 행위에 대한 작가의 애정, 이 작가가 얼마나 다독하는지 등이 여실히 전해지는 것도 매력적이었고 스토커처럼 그녀의 일상을 훑는 듯한 주인공의 심상 세계가 나중에 어떻게 좌절되는지 밝혀지는 결말도 인상적이기 그지없었다. 

 나도 지금보다 블로그 활동을 좋아할 때, 혹은 간간이 SNS에 접속할 때마다 눈길이 가게 되는 몇몇 사람들이 오랜 기간 동안 새로운 소식을 올리지 않으면 조마조마한 적이 있는데, 이 작가는 그런 조마조마함을 변태적인 감정이자 보편적인 감정이기도 하다는 식으로 주목해 내심 찔리기도 했다. 한마디로 관음에 관한 극히 세련된 소설이지 않았나 싶다. 



 '맥도날드 사수 대작전' 


 노동에 관련된 소설을 쓰려고 할 때 동기가 추천해준 작품이다. 노동 환경의 고충을 너무 무겁지 않게 묘사하려는 내 목적에 아주 딱 맞는 작풍의 소설 - 동기야 고맙다. - 이었다. 더군다나 현직 패스트푸드 업체에서 일을 하는 내 입장에서 이 소설만큼 공감의 연속을 안겨준 경우도 흔치 않아 페이지가 순식간에 넘어갔다. 모든 것이 규격화된 맥도날드를 타겟으로 한 테러에 노출되자 한낱 알바생에 불과한 주인공과 동료들이 매니저가 지급하는 특별 수당에 현혹돼 열심히 일하게 된다는 전개가 왜 이리 웃기면서도 짠하던지... 

 짠한 것은 비단 주인공의 노동 환경만이 아니었다. 주인공의 가정 환경은 평범하면서도 애잔함을 자아냈는데, 이유는 다르지만 어쨌든 패스트푸드 알바처럼 비교적 험한 일을 테러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더 열심히 하게 되는 심정이 십분 이해가 가 도저히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이야기의 함의는 다소 평범한 구석이 있었으나 씁쓸함에도 어딘지 발랄한 분위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성공적으로 구현했다는 점에서 여운과 애정이 남는 작품이었다. 그나저나 작가가 패스트푸드 알바 경험이 있는 건가, 아니면 지인으로부터 이야길 많이 들은 걸까. 난 맥도날드가 아닌 버거킹에서 일하긴 하지만 작중 묘사 중에 실감나던 부분이 한둘이 아니라서...... 만약 실제 경험에서 비롯된 묘사가 아니라면 이 작가의 정보 수집 능력 및 실감나게 표현하는 문장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다. 정말 작가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것 같다. 

모든 약효의 팔십 퍼센트는 플라시보 효과다. 플라시보 효과로 치자면 책만한 물건도 없을 것이다. 부작용도 거의 없다. 중독? 환영할 만한 일이다. - 12p



화폐로 교환되지 않은 위험은 한낱 허깨비에 지나지 않았다. - 58p



어디에서 왔는가가 아니라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명예의 근거로 삼아야 해요. - 93p



모든 게 책으로 보이는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 조금씩 읽는다. 희망에 들뜨지 않고 절망에 굴하지 않고. 인생에서 의미 있는 것들은 대개 무의미해 보이는 반복을 견뎌낸 어떤 것이기 마련이니까. - 29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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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악몽과 계단실의 여왕
마스다 타다노리 지음, 김은모 옮김 / 한겨레출판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9.3 







 근래 접한 데뷔작 중 가장 좋았다. 이렇게 수록작 전부가 완성도가 고른 경우는 흔치 않아 읽는 내내 감탄했다. 난 또 표제작이나 수상작만 좋을 줄 알았지. 작가의 데뷔작이라던데 이 작품 이후의 다른 작품도 볼 수 있길 바란다. 



 '매그놀리아 거리, 흐림' 


 투신 자살하려는 사람을 말리기는커녕 자살을 부추기는 무책임한 군중 심리를 짜증을 유발하는 인질극을 통해 꼬집는 이야기가 독특했다. 또 세속적인 목적 없이 악의로만 똘똘 뭉친 범인에게 주인공이 끝까지 농락 당하는 전개가 몰입감이 넘쳤다. 상대가 제대로 돌아버린 작자이기에 대적할 방도가 없는 데서 비롯되는 무력함이 독자 입장에서도 확실히 와 닿았다. 그야말로 악몽이라 부르기에 적합했는데, 주인공이 억울한 한편으로 인과응보라는 느낌도 없잖았던 만큼 뒷맛이 한없이 찝찝했다. 같은 소설추리 신인상 수상작인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의 첫 번째 수록작과 닮은 구석이 많았다. 시시각각 변하는 사건의 양상이나 결말까지. 



 '밤에 깨어나' 


 반전이 사족이었던 걸 제외하면 아주 좋았던 작품. 대학도 안 가고 변변한 직장 없이 부모 집에 얹혀 산다는 이유로 주인공이 오해에 시달리다 미쳐버리고 끝끝내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파멸에 이르는 전개가 끔찍했다. 밤길에 욱하는 심정으로 여자를 겁주려고 한 그 장면만 놓고 보면 이 주인공이 경솔하다고, 한마디로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냐고... 이러니 의심을 받지' 하고 한숨이 나오지만,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점점 악의가 솟아 오르는 주인공의 심리를 실감나게 표현했기에 맥락상 자연스럽게 읽힌 게 돌이켜보니 참 무섭게 느껴졌다. 어떤 수순으로 전개될지 뻔히 보였지만 그렇기에 수록작 중 가장 필력이 돋보였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복수의 꽃은 시들지 않는다' 


 왠지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들이 연상되는 복수극이었다. 앞선 두 작품에 비해 주인공이 상대적으로 덜 억울하게 느껴지고 인과응보가 적절히 이뤄지지 않았나 싶다. 그래, 이 단편집은 억울함과 인과응보 사이의 짜증남과 씁쓸함에 잘 주목하고 있는데 이 세 번째 작품의 주인공은 누명을 썼다기 보단 타인의 범죄에 가담했고 시간이 흘러도 남의 탓을 하는 모습 때문에 - 그래서 더 인간적이었지만 - 그리 동정심이 일지 않았던 것 같다. 뭐, 그래도 다음 작품의 주인공에 비하면 이 정도면 양반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계단실의 여왕' 


 어떤 의미에서 가장 별로였던 작품. 주인공이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어서, 그리고 열등감이 폭발해서 계단에서 넘어진 이웃을 위해 구급차를 부르지 않은 것까지 이해하겠는데, 그 이후의 행보가 너무나 멍청해서... 정말이지 비호감도 이런 비호감이 다 있나 싶었다. 계단을 오가는 복잡한 전개 내지는 트릭이 있어 일본추리작가협회상 후보에도 오른 것 같은데 전개나 결말이 너무 뻔해서 수상이 불발이 된 게 납득이 갔다. 계단을 소재로 다룬 걸 빼면 그렇게 신선하지도 않았고. 단편집을 읽다 보면 표제작만 좋은 경우가 은근히 많은데 이 책은 정반대였다. 차라리 이 작품이 제일 첫 번째로 수록됐으면 어땠을까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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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ㅣ 복복서가 x 김영하 소설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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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오랜만에 김영하 작가의 소설을 읽어봤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실망했다. 전에 동기로부터 이 책을 두고 신랄하게 비평한 게 기억이 나는데 내용은 이렇다. '편집자의 개입 없이 작가 본인이 내키는 대로 글을 쓰는 것은 위험하다.' 동기가 말한 '편집자의 개입 없이' 라고 말한 부분은 잘 와 닿지 않았지만, 이 책의 수록작들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는 다소 가볍게 집필됐다는 느낌은 확실히 부정하기 어려웠다. 사실상 이상문학상 후보작이었던 '아이스크림'을 제외하면 김영하식 재기 발랄함은 있을지언정 완성도는 미묘하거나 떨어져서... 작가의 어지간한 팬이 아닌 독자한테 함부로 추천하기 어려운 책이었다. 



 '아이스크림' 


 한 젊은 부부가 평소 자주 사먹던 아이스크림에 이상한 냄새가 나자 컴플레인을 거는 소동을 그린 단편. 자기들의 입맛이 이상한 걸까봐, 공연히 일만 키운 데다 양치기 소년 취급을 당할까 노심초사하는 묘사들이 공감 갔다. 특히 컴플레인을 걸면서도 긴장을 해야 하는 특수하고 씁쓸한 상황 설정은 어디서도 당당하기 쉽지 않은 젊은 세대의 서러움... 같은 것을 생각해볼 여지를 남겨 제법 인상적이었다. 이런 감성을 보면 이 작가가 왜 '젊은 작가'로 불리는지 대번에 느껴진다. 



 '로봇'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을 인간의 연애사에 대입한 시시한 소설. 3원칙의 맹점이 충돌해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지는 로봇 서사의 묘미를 김영하 작가치고 너무 소모적으로 다루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든다. 착안점은 나름 괜찮았지만 - 정말로 로봇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선하고 좋았다. - 결과적으로 로봇인지 무엇인지 모를 남자가 자기가 로봇이며 로봇 3원칙의 충돌을 핑계로 여자 곁을 떠났다는 이야기에 불과해 솔직히 소재가 아깝다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SF 애독자들은 아예 거품 물고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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