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용돌이 합본판
이토 준지 지음 / 시공사(만화)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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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이토 준지의 장편은 처음 접해봤다. 단편은 기괴한 게 다였는데 장편으로 접하니 아이디어도 기발하고 결말은 여운이 있어서 왜 사람들이 이토 준지에 열광하고 <소용돌이>를 대표작으로 꼽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 작품이 제일 재밌으면 곤란한데 아무튼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다. 당장은 <인간 실격>이 제일 끌린다. 다자이 오사무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라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소용돌이를 컨셉으로 한 다양한 저주와 각각의 저주들의 끔찍하고 엽기적인 모습을 충분히 재현해낸 그림체가 가히 독보적인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달팽이 인간과 산부인과에서의 에피소드가 전부 인상적이었는데 뻔히 예상이 가는 전개임에도 - 결말은 제외 - 또 모든 장면이 역겨움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 중독적인 구석도 있었다. 난 호러라고 하면 무논리적인 데다가 자극에만 충실한 성향 때문에 폄하했는데, 이 작품이라고 내 편견을 깨뜨리지 않았지만 그 대신 내 편견을 과하게 자극하지 않아 덤덤하게 읽혔다. 이른바 무리수가 없는 공포랄까. 작가가 시각적인 잔인함으로만 점철된 공포가 아닌 분위기, 인간성의 타락 등 깊이가 있는 공포도 그려냈기에 마냥 불쾌하게 다가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결국 소용돌이의 저주의 정체는 완벽히 밝혀지지 않았고 또 완전히 묻지마 범죄 수준의 재앙들도 답답하기 그지없었지만 광기와 이성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볼 만해 그 리액션만으로도 충분히 읽는 맛이 있던 작품이었다. 소용돌이처럼 돌아버릴 것 같은 상황이 끊임 없이 휘몰아침에도 제정신을 유지하는 주인공 - 표지의 여자 - 의 멘탈은 실로 불가사의할 정도였는데 거의 코난과 김전일에 견줄 만해 이 캐릭터만은 끝내 생존할 수 있으리라고 막연하게 믿으며 읽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건 근거 없는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반전이란 주인공의 기대가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을 가리킨다고 하던가. 이 작품의 경우엔 주인공이 아닌 독자인 나의 기대가 무너진다는 점에서 반전이 성립할 듯하다. 이런 결말은 여운이 있으면서 한편으론 안타까웠는데, 이 결말을 피할 기회가 작중 초반부엔 분명 있었기에 모든 기회를 놓친 주인공이 답답했다. 한편으론 이토 준지는 공포란 극복이 불가능한 재앙으로 여긴 듯한데 이토록 긴 시간 동안 생존한 주인공과 일행에게 똑같은 논리를 적용시키는 게 참 비정하면서도 공평하단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이 살아남으면 호러가 아니다. 생각해보니 작가의 다른 단편 대부분도 주인공은 생존과 거리가 멀었던 것 같다.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과 실사 영화로도 2차 창작됐다는데 그 작품들은 필요 이상으로 자극에 충실할 듯해 보지 않을 생각이다. 만화만의 적절한 공포만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포일 듯하다. 처음에 말했듯 작가의 다른 작품들, 가급적 장편 위주로 읽어볼 생각이다. <인간 실격>, <토미에> 같은 작품들. 또 어떤 기괴함을 안겨줄지 상당히 기대된다. 일단은 <인간 실격>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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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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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예전엔 특유의 암울한 문체에 질려 읽다 포기한 책이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전보다 견문이 넓어진 덕분인지, 아니면 이 작품의 주인공 요조와 공감대가 생긴 것인지 삼십대를 목전에 둔 이 시점에 읽으니 전에 없이 술술 읽혔다.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인 이야기이자 실제로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작가의 정신 세계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라 언젠기 읽어야지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결국 성공하게 돼 뿌듯하기 그지없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민음사가 만든 다자이 오사무 영상을 봤는데 그 영상에서 '<호밀 밭의 파수꾼>, <데미안>과 함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서 판매량 top 5 안에 드는 작품'이라고 해 아무래도 관심이 갔다. 그리고 우연히 그날 독립 서점에 들렀는데, 그 서점에 이 작품이 놓인 걸 보고 충동적으로 구매에 이르렀다. 난 책을 가나다 순에 맞춰 매우 계획적으로 구매하는 만큼 이와 같은 충동적인 구매는 내게 매우 낯선 일이었다. 책을 다 읽으니 낯선 일도 해보고 볼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종종 충동적으로 책을 구매해봐야겠다. 


https://www.youtube.com/watch?v=TJtXyhcbpBE&list=PL65eoJV7XP3dn-u3A61z7oj8NTSE6VUdi&index=27

 
 이 영상이다. 관심이 있는 분은 보시길. 



 호불호가 꽤 갈릴 내용의 작품이지만 출간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읽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영상에선 인간의 나약함을 토대로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라 해석하던데 나도 그 해석에 공감한다. 언젠가 방송에서 김영하 작가가 문학은 '나 혼자만 이상한 게 아니구나' 하고 위로를 해줄 때 위력을 발휘한다며 문학의 역할과 매력을 역설한 바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봤을 때 <인간 실격>은 제목이나 소재가 파격적이라 그렇지 진실로 '위로'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말도 마찬가지로 영상에서도 나오는 말이지만, 다른 걸 떠나서 이 책의 판매량은 곧 주인공 요조의 고민과 좌절이 결코 요조처럼 소수의 몇몇 나약한 심성의 소유자만의 문제가 아님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자살은 당사자가 연약한 인간이란 반증이라고 경멸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인간 실격>은 그 경멸을 오히려 경멸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은 어떤 식으로든 사회에 녹아들 수 없고 겉돌다 도태되고 말 것이라는 불안감에서 비롯된 요조의 방황, 그리고 요조가 어쩌다 스스로에게 '인간 실격'이라 선고를 내리는지 그 과정을 쫓는 이 작품은 굳이 패전 직후의 일본 사회라는 배경을 연상하지 않아도 퍽 인상적으로 읽혔다. 개인적으로 공감했던 부분은 친구인 호리키에 대한 요조의 이중적인 감정과 호리키가 자신에게 꼰대적인 발언을 할 때 반발하면서도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 속으로만 삭히는 모습이었다. 특히 후자는 요조가 얼마나 유약한지 엿볼 수 있는 묘사임과 동시에 독자에게 '나만 저러는 게 아니구나' 라며 짙은 공감대를 선사하므로.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이자 지인들에게 가장 호평을 들었던 구절은 바로 '그건 세상이 용납지 않아.' 라고 한 호리키의 말에 요조가 속으로 '세상이 아니라 네가 용납지 않는 거겠지.' 라고 답한 부분이다. 세상이란 잣대 뒤에 숨어 자신의 가치관을 강요하는 일은 내가 당하거나 반대로 내가 남들에게 하는 경우가 너무 비일비재한 나머지 그 행위의 졸렬함이 잊히는 것 같다. 속으로 말하긴 했어도 정말 촌철살인의 지적이 아닐 수 없는데, 덕분에 요조의 지나치다고도 싶은 방황의 나날, 여성 편력 등이 완벽하게 와 닿지 않음에도 어딘지 믿을 수 있는 화자로 여겨져 요조의 섬세하고 복잡한 심리를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문장은 책의 92페이지에, 결말까지 40페이지 남짓 남은 지점에서 나오기에 내가 이 문장을 두고 <인간 실격>의 암울한 문체를 견딜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발언일지도 모르겠다. <인간 실격>의 암울한 문체는 첫 장에서부터, 정확히는 첫 번째 수기의 첫 문장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서부터 작렬하기에 내가 위에서 한 말은 마치 '90페이지에 도달하고 나서야 비로소 보답을 받았다'는 고도의 비아냥 같다는 느낌도 든다. 말을 정정하자면, 내가 인상 깊었다는 저 구절은 하나의 예시일 뿐, 한없이 암울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저 정도 촌철살인의 발언이 나올 것이라 기대하게 만들었다. 한마디로 개인적인 호불호를 초월한 채 믿음직한 작품으로 내 안에 스며들었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겠다. 여담이지만 음울한 작품이란 악명에 비해 가독성이 꽤 좋은 편인데 다자이 오사무가 비교적 행복했던 시절에 집필한 다른 작품들은 어떨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작품의 진짜 암울한 장면은 후반부에 요조가 인간 실격이란 진단을 스스로 내리고 마는 장면일 텐데, 타인이 내리는 진단은 반발만 살 뿐이지만 직접적으로 '실격'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스스로를 놓아버리는 것은 꽤 지독한 구석이 있었다. 사뭇 가벼운 어조로 '나 같은 놈은 죽어야 돼.' 하고 소리 내어 자책할 순 있어도 실격이라 말하는 것은 분명 도가 지나쳤다. 게다가 세상은 혀를 차긴 해도 정작 별 말 않는데 본인이 앞장 서서 완전히 모든 걸 포기하는 태도도 기이했다. 제아무리 본인이 자초한 비극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굴며 자책할 필요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극단적이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제대로 반면교사용 소설로 읽혔다는 뜻은 아니다. 자책의 정도와 스스로 실격을 선고하는 결론이 거부감이 드는 것이지 요조의 자책 요인 중엔 내 지금의 고민과 닮은 지점이 많아 도저히 책의 내용이 남의 일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세상이 나에게 실격을 선고하고자 서서히 벽을 좁히고 있는 듯한 답답함과 그걸 감지하면서도 크게 발버둥치지도 않은 지난날과 앞으로도 발버둥칠 여력이 좀처럼 생기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함이, 그리고 눈앞의 행복이나 쾌락에 취하려는 현재 모습에 대한 자괴감... 내가 어찌 요조에게 공감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반대로 요조가 내면은 비록 망가졌을지언정 표면상으론 어느 정도 주체성을 갖고 살아간 적도 있어서 본받아야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때문에 그가 답은 이미 정해졌다는 듯 자신은 역시 인간 실격이었다고 하는 게 불만이란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길 그가 자신을 인간 실격이라 선고한 것이야말로 진짜 인간 실격이란 증거라는데 난 그 말이 잔인하긴 해도 일리 있는 말로 들렸다. 인간이냐 아니냐 합격인지 실격인지 여부를 세상이 내렸고 그 상황에 절망했다면 또 모를까,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이 자신은 인간 실격이라 주장하다가 진짜로 그 주장을 실천해버리는 것 같은 느낌도 들어 요조에 대한 공감이나 연민과는 별개로 최후의 순간엔 그와 거리가 생겼다. 

 어제 본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조조의 명언이 소개됐다. '내가 세상을 저버릴지언정 세상이 나를 저버리게 두진 않겠다.'는 말인데 이 말은 삶을 대하는 조조의 주체성을 엿볼 수 있는 말로 해석된다. 반면 요조는 결과적으로 주체적인 삶과는 매우 거리가 멀면서도 그 주체적이지 못한 삶을 주체적으로 정하는 골때리는 행보를 보인다. 요조로 말할 것 같으면 '세상이 나를 저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세상을 저버린다.' 였으니. 그런 점에서 비참함과 비겁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내 인생은 조금씩 비참해지고 있는 건 자각이 되는데 거기에 더해 비겁해지고 있는 중인 건 아닐까? 나 역시 주체적으로 비참해지려는 비겁한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반문해보게 됐다. 


 그렇다 보니 내게 과연 요조에게 공감이니 거리감이 생겼다느니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게 됐다. 어쩌면 동족 혐오일는지도. 



 p.s 진짜 여담이지만 표지의 그림이 왠지 모르겠는데 작품의 내용이랑 너무 잘 어울린다. 에곤 쉴레의 자화상이라니... 정작 에곤 쉴레는 자기애가 매우 강한 사람이었다는데 말이다. 

즉 저에게는 ‘인간이 목숨을 부지한다.‘‘라는 말의 의미가 그때껏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될 것 같습니다. 제가 가진 행복이라는 개념과 이 세상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개념이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 불안 때문에 저는 밤이면 밤마다 전전하고 신음하고, 거의 발광할 뻔한 적도 있습니다. 저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 - 16p



인간의 삶에는 서로 속이면서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도 입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 26p



그건 세상이 용납하지 않아.

세상이 아니야. 네가 용납하지 않는 거겠지. - 9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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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홍콩 - 시간에 갇힌 도시와 사람들
전명윤 지음 / 사계절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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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수년 간 홍콩 여행책을 집필하느라 주기적으로 홍콩에 갔던 여행 작가 전명윤 씨가 집필한 <리멤버 홍콩>은 더 이상 예전과 같은 모습이기 힘들 홍콩의 역사와 미래에 대해 얘기하는 책이다. 이 책에서 살펴볼 수 있는 홍콩의 역사는 상당히 독특하고 비참해 소설 속 국가, 꼭 디스토피아물에 나올 법한 국가의 이야기라 생각하고 읽어야 터져 나오는 한숨을 줄일 수 있을 정도였다. 내가 미처 몰랐거나 홍콩의 역사, 그리고 맥락을 파악할 수 없어 뉴스로 접해도 그 의미나 심각성이 잘 와 닿지 않았던 홍콩 혁명의 전모가 깊이 있고 박진감 넘치게 적혀 있는데 이러한 글을 읽는 것은 꼭 소설을 읽는 것과 흡사한 느낌을 안겨줬다. 

 영국과 중국 어느 쪽도 의지할 수 없고 자치권을 획득할 수도 유지할 수도 없는 비참함 탓에 정말 이렇게 가까이에, 또 그렇게 작은 땅에서 저 정도로 다이나믹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게 의심스러운 사람이 과연 나 혼자일까? 내가 속한 90년대생들은 홍콩은 과거에 찬란했을지언정 지금은 빛이 많이 바랜 나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어 아무래도 실감할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만약 한 번이라도 여행을 가봤더라면 실감이 났을 텐데, 아쉽게도 지금은 코로나 시국이 아니라도 여행 가기 힘들게 됐으니 참 애석할 따름이다. 


 코로나 이전에 갔어야 할 여행지는 홍콩과 미얀마를 꼽을 수 있겠는데, 이 두 곳은 당장 낙관적인 전망을 얘기하기엔 현실이 너무나 심각하기에 진작 여행을 가지 않은 과거의 내게 애꿎은 화풀이만 하게 된다. 물론 나의 이러한 태도나 감상은 혁명의 참여자들한테 아무런 보탬도 위안도 되지 않는 무례한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혁명이란 것은 하루 아침에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자국도 아닌 외국의 혁명의 여파가 피부로 와 닿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편이므로 어쩔 수 없이 방관하며 뉴스만 검색하는 수준에 그치는 것 같다. 씁쓸한 얘기지만 지인이 그 땅에 있거나 그 나라 출신의 친구가 있지 않은 이상 몇 명이 자기 일처럼 외국의 혁명을 걱정하고 몰입할까 싶다. 

 반면 이 책을 집필한 전명윤 씨는 꽤나 주기적으로 홍콩에 다녀온 덕분에 홍콩에 지인이나 친구가 많아서 홍콩의 비극을 자기 일처럼 여기고 얘기하기 적합한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어정쩡하게 홍콩 문화를 선망하거나 몇 번 여행을 갔던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사유와 글을 선보였다. 저자가 실제 지인으로부터 직접 전해 들은 얘기가 상당한지 책에 등장하는 홍콩인은 실질적으로 몇 명 되지 않음에도 홍콩인의 비애나 처지가 실감나게 전달됐다. 책의 말미에선 지인들이 중국 정부로부터 새로 내려진 보안법으로 인해 외국인과 혁명에 대해 일체의 대화마저 금지당해서 - 어길 시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간다고 한다. - 연락이 끊겨버렸다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를 암시한다. 눈에 뵈는 게 없어진 중국 정부의 만행에 분노가 앞선 한편으로 국제 사회에서 쌓은 좋은 이미지 말곤 중국과 대적할 수단이 압도적으로 역부족인 홍콩에 승산이 적어 보여 희망을 얘기하는 것조차 공허하게 느껴졌다. 


 책의 내용에 따르면 홍콩이 중국으로부터 숨을 고를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당장 요번 달 9월에 있다고 하는데 난 솔직히 그 가능성도 마음 한구석으로 체념하면서 읽고 있었다. 너무 산통 깨는 것이 아니냐 생각할 수 있겠으나... 최근 2년 가까이 코로나 관련 뉴스나 국제 뉴스를 접하기 전에 일단 기대를 최대한 접고서 본 탓인지 희망을 언급하며 마무리 하는 뉴스는 종류를 막론하고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것 같다. 아무리 뉴스의 내용이 신빙성 있어 보인다 하더라도, 이 책의 경우엔 홍콩 사람들이 정말 딱하다고 여겨지는 것과 별개로 말이다. 내가 봤을 때 지금까지 홍콩이 걸어온 역사는 잘 해봐야 '시간 벌기'라는 인상이 강해서 이젠 어떤 결과가 됐든 그곳 사람들이 최대한 피를 덜 흘리기를 하고 바라는 수밖에 없다. 이 책이 소설이었다면 조금 더 그럴싸한 감상을, 즉 희망을 언급했을 테지만 이 책을 읽고서 아이러니하게도 희망은 정말 희망에 지나지 않음을 부정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책을 다 읽고 덮은 직후까지는 어딘지 벅찬 느낌과 희망을 느낄 수 있었는데, 막상 책의 감상평을 적으려니 비관적이고 현실적인 얘기를 하게 되는 것 같다. 이럴 때면 새삼 나란 사람이 참 이중적이면서도 진짜 많이 변했다는 걸 느낀다. 나일 먹은 탓인지 이 시국이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짐작하기로는 최근 개인적인 일로 고민이 많아서 글도 비관적으로 써지는 것 같은데, 이런 경향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고치려면 어떻게 고쳐야 할는지도 잘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평소 홍콩에 관심이 그래도 어느 정도는 있는 편이었음에도 이런 글을 쓰고 이렇게 흐지부지하게 글을 마무리 짓는 건 스스로가 별로 좋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 관심이 점점 세상이 아닌 내 주변으로 점점 좁아지는 것 같아 그게 좀 불안하다. 

혁명은 수많은 것을 약속했지만, 약속은 온데간데없이 사람들의 목숨만 삼켜버렸다. - 64p



그러나 언제나 절망 속에서 희망이 피어나고, 희망이 가장 커졌을 때 절망이 싹튼다. - 29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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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의 캔버스
하라다 마하 지음, 권영주 옮김 / 검은숲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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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직전에 <널 위한 문화예술>을 읽고 떠올라서 다시 읽게 된 작품이다. 다시 읽으니 이전과 달리 의외로 루소의 이야기가 평면적으로 느껴졌고 그 루소의 이야기를 읽는 팀과 오리에의 이야기에 더 애착이 갔다. 3년 전과 달리 지금은 미술에 관심이 지대해졌는데, 그런 나에게 이 작품에서의 루소 이야기는 퍽 기대에 못 미쳤다. 내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은 루소에 얽힌 사소한 미스터리를 파고드는 아트 미스터리를 표방함에도 흐지부지한 결말 탓에 추리소설다운 쾌감 역시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럼 루소를 향한 작가의 애정과 미술사과를 졸업하고 다수의 미술관에서 근무했던 작가의 전공이 유감없이 발휘돼 아쉬움이 무마됐느냐면, 그것도 그저 그랬다. 

 각각의 사명감을 안고서 반드시 루소의 미발표 작품 <꿈을 꾸었다>를 차지해야 하는 두 명의 루소 전문가 팀과 오리에는 <꿈을 꾸었다>가 과연 진작인지 위작인지를 놓고 대결을 펼치게 된다. 특이하게도 진작인가 위작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오직 그 그림을 가진 대부호가 제시하는 이야기, 루소가 주인공인 일곱 편의 이야기의 내용이라는데 팀과 오리에는 당황하면서도 자신들이 가장 흠모하는 '친구'인 루소의 이야기에 빠져든다. 이미 루소가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았고 그 결말을 앎에도 둘은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결말에 이르러선 여러 복잡한 상황이 맞물린 탓에 누군가 승부의 향방을 흐리는 돌발 행동을 하게 되는데... 


 늦은 나이에 그림을 그린 탓에 기본기가 부족해 흔히 '그림 못 그리는 화가'라고, 또 세관원이기에 일요일에만 그림을 그려서 '일요화가'라는 멸칭으로 불린 루소는 작품의 주요 시간대인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사후 70년이 넘도록 인정을 받지 못했던 비운의 화가였다. 어떻게 보면 사후에 비교적 금세 유명세를 얻은 고흐보다 비참하다고 볼 수 있는데 그놈의 기본기 부족을 트집 잡는 평단과 동료 화가들 때문에 강렬한 개성이 쉽게 인정받지 못했다. 지금이야 뉴욕의 모마MoMA에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와 함께 전시관 4층의 입구에 걸려있는 <꿈>을 그린 화가라며 꽤 인정을 받는 편이지만 불과 40년 전만 해도 세간의 평은 지금만 못했던 모양이다. 

 <낙원의 캔버스>는 루소의 작품이 어떻게 빛을 보게 됐는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가상의 그림 <꿈을 꾸었다>로 하여금 루소의 삶을 살펴보는 이야기라 본질적으로 팬픽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는 작품이다. 말인즉슨 미술사적 지식이나 사실보다 루소에 대한 작가의 애정, 일종의 헌사에 초점이 맞춰져서 추리소설뿐 아니라 역사 소설적인 매력도 느끼기 힘들다. 작품 서두의 흡입력과 실제로 루소라는 화가가 뿜어내는 존재감을 떠올리면 전반적으로 중후반부는 기대에 보답하지 못했는데, 특히 루소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상관없을 정도로 어쩐지 이야기의 흐름에 별 영향력을 주지 못하고 있고 실제로도 정말 그렇게 됐기에 허무하기까지 했던 기억이 난다. 


 작가는 실존했던 화가인 루소와 피카소, 그리고 유명한 미술관들을 대거 등장시키는 만큼 나름대로 실제 역사를 과감히 등지는 시도를 하지 않은 듯한데, 오히려 작가가 미술 업계에 실제로 종사했었기에 집필이 소극적으로 이뤄진 것 같아 아쉽기 그지없다. 중반부부턴 여러 변수가 등장해 팀과 오리에가 <꿈을 꾸었다>의 미스터리를 풀어야 하는 동기가 변질된 것, 오리에가 조연으로 밀리면서 프롤로그에서의 존재감이 거의 사라진 것 등도 아쉬운 부분이었다. 주인공은 둘인데 왜 팀의 시선에서만 전개를 풀어나간 걸까? 프롤로그에서 들여다봤던 오리에의 내면이 무척 인상적이어서 정작 소설 본편에서 별 활약다운 활약이나 존재감을 내비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이렇게 홀대하기엔 너무 아까운 캐릭터임을 에필로그에서 제대로 확신할 수 있었다. 물론 팀도 좋은 캐릭터지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분량을 할애하기엔 오리에가 안쓰러웠다. 안 그래도 경력이 단절된 것도 서러운데... 

 내가 루소의 열렬한 팬이 아니라 그랬던 걸까? 루소의 이야기도 지루한 편이었는데 특히 루소가 이 작품에선 기구한 운명의 화가라는 것말곤 특별히 인상적인 내면이나 행동을 보이지 못하고 그저 예정된 수순대로 비참한 말년을 보내다 퇴장해버려서 팀과 오리에가 이 이야기를 읽고 동요를 보이는 것에 크게 공감이 가지 않았다. 단,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른 이러이러한 뒷이야기가 있으면 좋겠다는 작가의 바람이 담긴 듯한 후반부의 전개는 미술에 관심이 좀 있는 사람으로서 눈길이 갔는데, 어디까지나 작가의 상상에 지나지 않음에도 어딘지 내 마음까지 따뜻해졌다.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는 황당무계함과 별개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법이지만 이 작품의 경우엔 현실과 픽션 사이를 교묘히 파고들어 은근히 그럴싸한 리얼리티를 제공했다. 그리고 아마 실제로도 이런 식의 뒷이야기가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 그런대로 독특한 여운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작가의 책 중에 <암막의 게르니카>라고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소재로 한 소설이 나왔다는데, 이 책이 아트 미스터리나 역사 소설적인 요소에 있어서는 미묘하고 실망스런 완성도를 보인 탓에 그 작품도 특별히 기대되지 않는다. 하지만 피카소라고 하니 읽지 않을 수가 없는데... 기대하지 않고 읽었다가 오히려 감동하게 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모든 걸작은 상당한 추악함을 지니고 태어나는 법이다.

이 추악함은 창조자가 새로운 것을 새로운 방법으로 표현하기 위해 싸웠다는 증표다.

미를 거부하는 추악함이야말로 새로운 예술에게 허락된 ‘새로운 미‘다. - 18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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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위한 문화예술 - 미술관에서 길을 잃는 사람들을 위한 가장 친절한 예술 가이드
널 위한 문화예술 편집부 지음 / 웨일북 / 2021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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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유튜브 채널 '널 위한 문화예술'의 구독자가 40만 명이라고 한다. 40만 명의 구독자 중 한 사람으로서 이 책의 출간이 반가웠는데, 책에는 과연 유튜브에서 다루지 않았던 내용을 다뤘을지 궁금해 예상보다 빨리 구입해 읽게 됐다. 다행히 유튜브에서와는 다른 이야기를 펼치긴 했지만 아쉽게도 영상이 아닌 활자로 하는 예술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밋밋하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감각적인 영상의 힘을 빌리지 못하니 아쉽게도 내용의 전문성이라든가 주제의식, 주제의식을 끌어내는 필력은 여러모로 부족하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글의 깊이에 대해 단적으로 말하자면 입문용 수준이라 정말로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추천하기 애매하다. 

 가령 좋아하는 화가가 나오는 파트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작가들이 다루는 이야기나 정보의 디테일은 '수박 겉 핥기'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내 기대에 턱없이 못 미쳐서 실망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내가 인상 깊게 읽은 파트는 그 화가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겐 실망스러울 수도 있으리란 얘기다. 각 화가에게 할당된 분량은 매우 적은데 저자들이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거나 다른 건 몰라도 이건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 싶은 내용 위주로 채워져서 오히려 너무 구색만 갖춘 건 아니냐며 별 감흥이 남지 않은 적도 있었다. 파트를 줄이고 분량을 더했다면 어땠을까 싶다. 여담으로 내가 실망한 파트는 뭉크와 클림트, 호쿠사이, 달리이고 인상 깊었던 파트는 얀 반 에이크, 젠틸레스키, 마티스, 쿠르베, 그리고 클로델이다. 


 기대가 큰 탓에 실망도 적잖았지만 그럼에도 소장 가치는 있는 책이었다. 그림이 많이 실렸기 때문도 있지만 중간에 스페셜 파트인 '색의 비밀' 코너가 제법 유익했기 때문이다. 파란색, 분홍색, 흰색, 보라색, 빨간색, 초록색, 노란색의 역사, 일화 등을 상세히 적은 게 흥미로웠는데 내용에 따라선 참고할 만한 그림이나 사진이 있었다면 더없이 유익한 글이 됐으리라 본다. 책에 컬러로 된 그림이 실릴수록 값이 올라가 최대한 아낀다고 아낀 듯한데, 색깔에 대한 이야기야말로 이 책이 아니면 쉽게 접할 수 없는 내용인 만큼 좀 더 정성을 다하지 않은 게 은근히 아쉬웠다. 

 개인적으로 저자들이 서두에서 '예술의 쓸모'에 대한 고민을 토로하는 부분이 이 책에서 가장 얘기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들이 너무 엉뚱한 부분에 에너지를 쏟는 것 같아 그들의 고민이 크게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예술의 쓸모'에 대한 고민인데... 물론 예술이 우리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는 것 자체는 매우 바람직하나 저런 고민을 한 계기인 '예술이 무슨 쓸모가 있냐'는 어떤 네티즌의 질문은 가볍게 넘겨도 무방하지 않은가 싶었다. 아니, 예술을 즐길 때 쓸모를 왜 따지는지? 예술과 쓸모는 본질적으로 공존할 수 없다고, 동전의 양면 같다고 생각하는 나로선 저런 어불성설의 질문은 질문이 아닌 트집으로만 여겨졌다. 


 예술은 경우에 따라선 시간 낭비일 수 있고 공허한 행위일 수 있고 심지어 무의미할 수 있지만 관점만 바꾸면 그것을 즐기게 되면 언젠가 자연스럽게 삶에 긍정적이든 때론 부정적이든 간접적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예술의 존재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쓸모 있는 예술이란 것을 의도한다면 만드는 사람은 완성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고 설령 완성한들 관객은 즐기고 싶어도 즐길 수 없을 것이다. 예술은 백 번 양보해서 말하자면 쓸모 있는 행위로 착각될 수 있을지언정 쓸모 있는 행위와는 거리가 있기에 그런 의도로 접근하면 만인에게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굳이 쓸모가 있다면 작품 활동으로 돈을 버는 예술가들에겐 예술의 쓸모란 것을 논할 수 있을 텐데 그 경우는 '예술의 쓸모'에 대한 답은 되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요구하는 '예술의 쓸모'에 대한 답은 감상자 입장에서의 예술이니까. 

 우리는 예술이 우리 삶에 대단히 쓸모가 있길 바라며 즐기지 않는다. 내 경험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런 의도로 접근했다가 제대로 감상이 이뤄진 적이 없다.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했다가 감동을 먹거나 깨달음을 얻거나 지식이 풍부해지는 경우는 훨씬 많아도 말이다. 순수하게 즐거움을 위한 접근이야말로 아이러니하게도 삶을 풍부하게 해주고 지혜를 더해준다고 보는데, 쓸모를 요구하는 순간부터 자세가 공격적으로 변해 결국 즐길 수 있는 예술이라곤 하나도 남지 않게 될 것이란 게 내 지론이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이고, 책에서 소개되는 예술의 창작 배경을 보면 대단히 혁명적인 의지에서 탄생된 경우도 적잖아 단순히 즐기기 위해서란 내 지론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감이 있다. 하지만 반대로 그런 위대한 작품은 '예술의 쓸모'를 요구하는 질문에 대한 훌륭한 답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예술의 종류나 의도나 사람들의 인식은 실로 다양해서 각각의 지론에는 그에 해당하는 적절한 답변이 있다.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아니 조금의 생각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명한 일이다. 그렇기에 내게 '예술의 쓸모' 운운하는 것이 질문이 아닌 단순한 트집에 불과하다 여겨진 것이다. 정말 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질문하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빠져들 만한 예술을 찾았을 것이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예술에 선입견 때문에 접근을 꺼리는 것 같다. 하지만 예술엔 명확한 기준 같은 건 없고 실제로 예술이란 그 기준의 명확함을 흐린 괴짜 내지는 천재들 덕분에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즐겨져 왔다. 이 책의 제목이 그렇듯 이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을 위한 다양한 예술이 있다. 우린 그중 자신에게 맞는 예술을 찾아 나서야 할 텐데 그럴 생각은 않고 예술을 이렇다 저렇다 규정을 지으며 수동적으로 자세를 취하는 것은 참 답답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예술의 쓸모' 운운하며 트집을 잡는 것이야말로 정말 쓸모없는 행위가 아닌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모든 역주행의 아이콘이 그렇지 않을까요. 예술의 가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변할 뿐이지요. -7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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