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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홍콩 - 시간에 갇힌 도시와 사람들
전명윤 지음 / 사계절 / 2021년 4월
평점 :
9.2
수년 간 홍콩 여행책을 집필하느라 주기적으로 홍콩에 갔던 여행 작가 전명윤 씨가 집필한 <리멤버 홍콩>은 더 이상 예전과 같은 모습이기 힘들 홍콩의 역사와 미래에 대해 얘기하는 책이다. 이 책에서 살펴볼 수 있는 홍콩의 역사는 상당히 독특하고 비참해 소설 속 국가, 꼭 디스토피아물에 나올 법한 국가의 이야기라 생각하고 읽어야 터져 나오는 한숨을 줄일 수 있을 정도였다. 내가 미처 몰랐거나 홍콩의 역사, 그리고 맥락을 파악할 수 없어 뉴스로 접해도 그 의미나 심각성이 잘 와 닿지 않았던 홍콩 혁명의 전모가 깊이 있고 박진감 넘치게 적혀 있는데 이러한 글을 읽는 것은 꼭 소설을 읽는 것과 흡사한 느낌을 안겨줬다.
영국과 중국 어느 쪽도 의지할 수 없고 자치권을 획득할 수도 유지할 수도 없는 비참함 탓에 정말 이렇게 가까이에, 또 그렇게 작은 땅에서 저 정도로 다이나믹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게 의심스러운 사람이 과연 나 혼자일까? 내가 속한 90년대생들은 홍콩은 과거에 찬란했을지언정 지금은 빛이 많이 바랜 나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어 아무래도 실감할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만약 한 번이라도 여행을 가봤더라면 실감이 났을 텐데, 아쉽게도 지금은 코로나 시국이 아니라도 여행 가기 힘들게 됐으니 참 애석할 따름이다.
코로나 이전에 갔어야 할 여행지는 홍콩과 미얀마를 꼽을 수 있겠는데, 이 두 곳은 당장 낙관적인 전망을 얘기하기엔 현실이 너무나 심각하기에 진작 여행을 가지 않은 과거의 내게 애꿎은 화풀이만 하게 된다. 물론 나의 이러한 태도나 감상은 혁명의 참여자들한테 아무런 보탬도 위안도 되지 않는 무례한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혁명이란 것은 하루 아침에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자국도 아닌 외국의 혁명의 여파가 피부로 와 닿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편이므로 어쩔 수 없이 방관하며 뉴스만 검색하는 수준에 그치는 것 같다. 씁쓸한 얘기지만 지인이 그 땅에 있거나 그 나라 출신의 친구가 있지 않은 이상 몇 명이 자기 일처럼 외국의 혁명을 걱정하고 몰입할까 싶다.
반면 이 책을 집필한 전명윤 씨는 꽤나 주기적으로 홍콩에 다녀온 덕분에 홍콩에 지인이나 친구가 많아서 홍콩의 비극을 자기 일처럼 여기고 얘기하기 적합한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어정쩡하게 홍콩 문화를 선망하거나 몇 번 여행을 갔던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사유와 글을 선보였다. 저자가 실제 지인으로부터 직접 전해 들은 얘기가 상당한지 책에 등장하는 홍콩인은 실질적으로 몇 명 되지 않음에도 홍콩인의 비애나 처지가 실감나게 전달됐다. 책의 말미에선 지인들이 중국 정부로부터 새로 내려진 보안법으로 인해 외국인과 혁명에 대해 일체의 대화마저 금지당해서 - 어길 시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간다고 한다. - 연락이 끊겨버렸다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를 암시한다. 눈에 뵈는 게 없어진 중국 정부의 만행에 분노가 앞선 한편으로 국제 사회에서 쌓은 좋은 이미지 말곤 중국과 대적할 수단이 압도적으로 역부족인 홍콩에 승산이 적어 보여 희망을 얘기하는 것조차 공허하게 느껴졌다.
책의 내용에 따르면 홍콩이 중국으로부터 숨을 고를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당장 요번 달 9월에 있다고 하는데 난 솔직히 그 가능성도 마음 한구석으로 체념하면서 읽고 있었다. 너무 산통 깨는 것이 아니냐 생각할 수 있겠으나... 최근 2년 가까이 코로나 관련 뉴스나 국제 뉴스를 접하기 전에 일단 기대를 최대한 접고서 본 탓인지 희망을 언급하며 마무리 하는 뉴스는 종류를 막론하고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것 같다. 아무리 뉴스의 내용이 신빙성 있어 보인다 하더라도, 이 책의 경우엔 홍콩 사람들이 정말 딱하다고 여겨지는 것과 별개로 말이다. 내가 봤을 때 지금까지 홍콩이 걸어온 역사는 잘 해봐야 '시간 벌기'라는 인상이 강해서 이젠 어떤 결과가 됐든 그곳 사람들이 최대한 피를 덜 흘리기를 하고 바라는 수밖에 없다. 이 책이 소설이었다면 조금 더 그럴싸한 감상을, 즉 희망을 언급했을 테지만 이 책을 읽고서 아이러니하게도 희망은 정말 희망에 지나지 않음을 부정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책을 다 읽고 덮은 직후까지는 어딘지 벅찬 느낌과 희망을 느낄 수 있었는데, 막상 책의 감상평을 적으려니 비관적이고 현실적인 얘기를 하게 되는 것 같다. 이럴 때면 새삼 나란 사람이 참 이중적이면서도 진짜 많이 변했다는 걸 느낀다. 나일 먹은 탓인지 이 시국이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짐작하기로는 최근 개인적인 일로 고민이 많아서 글도 비관적으로 써지는 것 같은데, 이런 경향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고치려면 어떻게 고쳐야 할는지도 잘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평소 홍콩에 관심이 그래도 어느 정도는 있는 편이었음에도 이런 글을 쓰고 이렇게 흐지부지하게 글을 마무리 짓는 건 스스로가 별로 좋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 관심이 점점 세상이 아닌 내 주변으로 점점 좁아지는 것 같아 그게 좀 불안하다.
혁명은 수많은 것을 약속했지만, 약속은 온데간데없이 사람들의 목숨만 삼켜버렸다. - 64p
그러나 언제나 절망 속에서 희망이 피어나고, 희망이 가장 커졌을 때 절망이 싹튼다. - 29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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