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불편한 미술관 - 그림 속에 숨은 인권 이야기
김태권 지음 / 창비 / 2018년 1월
평점 :
9.2
저자가 서두에서 겸손을 떨었던 것치고 다루는 작품이나 주제의 다양성 면에서 실로 비범했던 미술책이다. 만화가가 집필한 미술책이란 게 사람에 따라서 전문성이 좀 떨어져 보일 수 있지만 - 난 오히려 그림을 직접 그리는 사람인 만큼 더 전문적일 듯한데. - 출신을 떠나서, 미술에 대한 저자의 관심이나 애정이 일반적인 수준을 뛰어넘어 놀란 적이 많아 행여 만화가란 직업을 얕본 사람이 있으면 그 편견, 이 책을 통해 직접 깨보길 바란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 만한 고흐나 피카소 얘기만 할 줄 알았더니 생소한 화가, 사진 작가의 작품도 많이 인용하거나 유명 화가의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품도 다뤄 이래저래 신선하게 읽혔다. 오토 딕스, 조지 크룩생크, 노먼 록웰처럼 이름도 처음 듣는 독특한 화가들을 소개받은 것은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 책에서 저자는 여권 문제, 장애인 인권 문제, 이민자 문제, 성소수자 문제 등 각각의 인권 감수성 키워드와 연관됐다고 저자 나름대로 선정한 그림들을 살펴본다.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첫째 당시 그림을 그린 화가가 문제 의식을 갖고 붓을 움직인 그림, 둘째 화가가 아무 생각 없이 붓을 놀렸다가 지금 시점에 와서 보니 불편하기 이를 데 없는 그림, 세 번째는 이유야 어쨌든 간에 일부 몰상식한 관람객에 의해 훼손된 그림으로 나뉜다. 첫째는 도미에나 쿠르베, 딕스처럼 확고한 의지로 사회 문제를 정면에서 마주한 화가들이, 둘째는 크룩생크나 록웰처럼 좋게 말하면 지금과 다른 시대상을 엿볼 수 있고, 나쁘게 말하면 고리타분한 시선을 가진 화가들, 셋째로는 해석에 따라 인상이 확 변하는 벨라스케스 같은 화가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중요한 건 이 세 부류의 작가들의 작품 모두가 우리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는 것이며 이렇게 다양한 시대의 작가들을 동일한 키워드로 묶어 짧게나마 인권 문제를 조명한 저자의 구성과 글솜씨가 흡입력이 있다는 것이다.
굳이 불만을 꼽자면 내용들이 다양한 것에 비해 비교적 짧다는 것과 인권 문제를 오직 그림을 통해 들여다보는 터라 내용들의 호소력이 여느 페미니즘, 인권 감수성 도서에 비해서 옅게 느껴진다는 것이겠다. 저자의 전달력엔 문제가 없었고 도리어 작정하고 그림을 통해 현대에 중요하게 대두된 사회 문제를 살펴보는 게 참신하기도 했으나 예상 독자층이 조금 애매하다는 것은 짚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아주 전문적인 미술책을 기대한 독자에겐 파트마다 계몽적인 문장으로 결말을 맺는 것에 질릴 수도 있고 또 아주 페미니즘적인 내용을 기대한 독자들 중 몇 명은 회화나 사진 감상에 별 관심이 없어 작가가 예상한 만큼 큰 감흥이 일지 않을 듯하다.
저자는 그림이나 인권 문제나 꽤 쉽고 거부감 없이 저술하긴 했지만 책의 내용 자체가 어떻게 보면 하이브리드적인 성격을 띄고 있으므로 어색함 내지는 불편함을 느낄 것도 같다. 그림을 통해 세상의 문제를 바라본다는 게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그렇게 일반적인 관념은 아닌 듯해서... 내가 너무 우리나라 독자들을 깎아내리는 것일까? 그림의 아름다움이 아닌 그림의 불편함을 주목하는 이 책의 주제가 얼마나 많은 독자들에게 와 닿을 것인지는 솔직히 반신반의하게 된다. 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불편하고 불쾌한 거라면 덮어놓고 거부감을 보이는 사례들이 적잖기에 하는 말이다. 이는 이 책의 내용만 보더라도 익히 나오고도 남을 감상이다. 얼마나 많은 그림들이 그런 사람들에 의해 못 볼 꼴을 당했는지 원...
김태권 작가의 책은 이번에 처음 접했는데, 알고 보니 저서의 양이 제법 되는 터라 다른 책은 또 어떨지 궁금증이 일었다. 그중 <히틀러의 성공 시대>라는 제목의 책에 눈길이 가는데, 이번에 읽은 책에서 드러난 작가의 역사 의식이 괜찮았던 기억이 나 그 책도 기대가 된다. 작가가 글을 쓰는 태도, 문제에 다가가는 솔직한 태도에도 좋은 인상을 받았던 터라 다른 저서를 읽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 같다.
p.s 벨라스케스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미술과 건축으로 걷다, 스페인>을 시작으로 연달아 세 번째 접하다 보니 직관하고 싶어졌다. 언젠가 프라도 미술관에 가서 <시녀들>을 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