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
카렐 차페크 지음, 김희숙 옮김 / 모비딕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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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이 작품을 드디어 읽었다. 로봇은 '노동'을 뜻하는 체코어 robota에서 비롯됐으며 그 말은 동명의 희곡에서 처음 고안된 용어다, 라는 말을 접하고 몇 년이 지난 다음인지 모르겠다. <로봇>은 - 원제는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이다. - 정확히 100년 전인 1920년에 창작된 희곡으로 체코의 국민 작가로 추앙받는 카렐 차페크에 의해 집필됐다. 여러모로 기념비적인 작품이거니와 특히 로봇, 인공지능이란 소재를 좋아하는 나에게 있어 왜 이제서야 읽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중요한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오래 전에 집필된 지라 다소 투박한 구성에다 설정도 느슨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신적인 작품이었다. 하나 고백을 하자면, 고전에 읽고서 딱히 할 말이 없을 때 거의 의례적으로 혁신적이라고 말을 하곤 했는데 <로봇>만큼 그 말을 진심으로 해본 적은 처음인  것 같다. 그야말로 제목 그대로 로봇에 대한 담론이 A to Z까지 담겨졌던 것이다. 후에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와 그 작품을 원작으로 둔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익히 다뤄진 논쟁들이 이미 <로봇>에서 다뤄진 것들이란 게 - 그러고 보니 작중 로봇의 설정이 <블레이드 러너>의 레플리칸트를 연상시킨다. - 소름 돋는 일이었다. 로봇만큼 인간에 대해 돌아보기에 좋은 소재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 점을 100년 전부터 시사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희곡답게 모든 전개를 대사로만 처리하느라 로봇을 묘사함에 있어 한계가 있던 건 분명 아쉬웠다. 인간의 모습을 갖췄으나 대놓고 영혼은 없다고 공장 직원들이 못을 박지만 헬레나 등 여러 변수로 인해 로봇들은 인간에게 반기를 들게 되고, 인간은 수세에 몰려 결국 멸망하고 만다는 게 작품의 주된 내용이다. 로봇의 태동, 로봇의 변화, 로봇의 반란, 로봇의 지배까지 빠르게 전개되는 이야기는 인물들의 단편적인 대화로 전달되는 통에 극적인 면이 덜했다. 이건 내가 희곡을 불호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한데, 이 작품의 경우엔 공연이 아닌 대본으로만 접해서 더욱 와 닿지 않았던 것 같다. 공연을 직접 봤으면 좋겠는데...

 캐릭터 구성이나 설정은 그런대로 적절했는데 서막에서 1부로 넘어갈 때 10년이란 세월이 흘러가면서 헬레나가 느닷없이 도민과 결혼했다는 건 지금 봤을 땐 좀 어처구니 없는 전개로 비춰졌다. 남자가 구애했다고 그렇게 간단히 부부가 된다는 게 요즘 통념에선 여간 황당한 게 아니었지만... 헬레나를 세상 물정 모르고 무턱대고 로봇의 권리만 주장한다거나 인간성의 회복 운운하느라 일을 그르친다는 식으로 묘사한 걸 보면 그 당시 여성관이 정말 편협하긴 했다는 생각에 씁쓸하게 읽혔다. 그래도 비중이며 역할이며 상당히 의미 있는 캐릭터인데... 만약 오늘날에 공연한다면 이 부분을 현대적으로 손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원작 그대로 공연했다간 공연히 논란만 낳을 수 있으므로.


 위에서도 말했지만 100년 전 작품이란 점이 무색하게 주제의식과 통찰력은 지금 읽어도 혁신적이었다. 인간의 외양을 갖췄지만 영혼이 없으므로 도구에 불과하다고 대놓고 하대를 받던 로봇들이 조금씩 인간적인 요소가 주입되자 바로 인간의 가장 안 좋은 부분인 폭력성을 배워 그대로 인간을 말살시킨다는 대목은 인공지능을 마주함에 있어서 우리가 꼭 염두에 둬야 할 반면교사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존재를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는가, 혹은 우리가 뿌린 씨앗이므로 우리에게 그대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가 하는 질문들은 여전히 유효한 논쟁거리인데 원작자인 카렐 차페크의 말에 따르면 작가는 이 작품을 대단히 근원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며 집필했던 것 같다. 인간과 로봇의 관계를 단순히 지배자와 피지배자, 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가 아닌 보다 본질적인, 이를테면 나와 타자 사이에 같음과 다름이 있고 절대적인 옳고 그름은 존재하지 않는데 우리는 그를 어디까지 의식하고 상대를 대하겠는가 하는 고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작품 초반의 갈등은 로봇에게 영혼은 있다고 하는 헬레나와 그에 반박하는 공장측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다. 헬레나는 근거 없이 너무 맹목적으로 로봇을 동정하는 반면에 공장측은 로봇을 철저히 상품으로 여기며 필요에 따른 조치가 아닌 이상 로봇에게 뭘 더 어떻게 대우할 생각 자체를 않는다. 둘 다 조금의 물러섬도 없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모양새를 취하는데 가만 들어보면 사실 두 주장이 다 일리가 있다. 로봇을 완전히 인간으로 보긴 힘들지만 엄연히 인간의 외양을 띄고 있고 인공적이긴 해도 인간처럼 사고할 줄 알기에 덮어놓고 인간이 아니라고 보기에도 힘들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최초로 로봇이라 명명된 작중 로봇들은 실제로 우리가 로봇하면 떠올리는 기계가 아닌 인간의 신체를 가진 인공 생명체라서 이런 논란을 피할 수는 없을 듯하다.


 그렇다면 만약 나중에 이러한 로봇이 우리 현실에 등장한다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들이 유기체가 아닌 기계로 이뤄졌다 하더라도 인공지능을 갖고 있는데 완전히 별개의 존재로 치부할 수 있을까? 인공지능의 성능이 우리의 상상을 상회한다는 건 더 이상 따로 언급해야 할 만큼 새삼스런 일이 아니므로 언제가 될지 모르겠으나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인공지능의 도래는 기정사실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 이르기까지 단지 100% 인간과 같지 않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로봇을 배척한다면 제아무리 인공지능이라 한들 결국 인간에게 앙심을 품게 되지 않을까?

 인공지능을 다룬 대부분의 SF, 디스토피아물은 위와 같은 상상에서 출발하고 있다. 카렐 차페크의 <로봇>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의 결말은 인간과 로봇의 차이점이 아닌 공통점이 무엇이고 그렇다면 인간인들 로봇인들 다를 건 없다는 걸 시사하고 있다. 작중 로봇의 신체에 대한 설정이 워낙에 하이테크놀로지라 과학적으로, 현실적으로 그게 옳은 선택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윤리적으로, 그리고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이라고 믿고 싶다. 인간의 나쁜 점이 아닌 인간의 좋은 점을 체득한 서로 사랑하는 로봇 둘이 새로운 인류를 탄생시킨다면 과거의 인류는 잊혀지고 새로운 인류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좀 더 낙관적으로 말하자면 아마 그 새로운 인류들은 과거의 인류가 범한 잘못을 조금은 덜 되풀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열린 결말의 이 희곡은 씁쓸하긴 해도 인류의 정의를 자문함으로써 제법 여운을 남기고 있다. 꽤 멋진 연출이라 생각하는데 이 부분에 있어서는 고전을 넘어선 세련미였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지금은 작품의 유명세가 많이 잊혀지기도 했고 - 알 사람은 다 알지만 생각보다 읽은 사람은 적은 걸 보면... - 읽은 사람들끼리는 역시 옛날 작품이라 할 만한 엉성한 부분도 있지만 흔히 말하듯 고전은 괜히 고전이 아니라는 게 바로 이 작품을 두고 하는 말이란 걸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하다.

 체코 문학이라 하면 카프카의 <변신>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는데 <로봇>을 접하고 나니 작가의 다른 작품이나 체코의 문학들도 접하고 싶어졌다. 국내엔 체코의 작가라고 하면 카프카와 쿤데라가 유명한데 두 작가가 체코어가 아닌 각각 독일어, 프랑스어로 집필한 걸 생각하면 체코어로 집필 활동을 한 차페크야말로 체코인들에게 있어 가장 우러러볼 만한 작가일 듯하다. 내가 몰라서 그렇지 국내에도 작가의 작품이 제법 소개됐던데 그 작품들도 한 번 읽어봐야겠다. 제목만 봐도 재밌어 보이는 작품들이 많던데, 기대된다.

아, 도민, 인간에게 인간의 모습만큼 낯선 것은 없다네. - 163p




흔히들 이야기하듯 고상한 진실과 사악하고 이기적인 잘못 사이에 투쟁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하나의 진실이 그에 못지않게 인간적인 다른 진실과 대립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현대 문명에서 가장 극적인 요소라고 본다. - 18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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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변호사 - 붉은 집 살인사건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 1
도진기 지음 / 들녘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9.2








 '어둠의 변호사'라는 시리즈 이름, <붉은 집 살인사건>이란 제목은 읽기 전엔 다소 낯간지러운 감이 있었지만 추리소설로써 부족함이 없는 완성도를 보고 나니 오히려 작가의 자신감으로 느껴졌다. 10년 만에 다시 읽은 이 작품은 왜 도진기 작가가 한국 추리소설계의 절대강자라 불리는지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줬다. 작가는 그 뒤에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는 물론 '진구' 시리즈를 비롯 많은 추리소설을 집필했는데 이렇게 내가 처음에 접한 작가의 작품을 읽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물론 시간이 흘러서 그런지 감동이 예전만 같진 않았다. 당장 고진과 유현 콤비의 매력이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잘 와 닿지 않았던 것도 그렇고 이야기의 도입부도 묘하게 2% 부족할 뿐더러 고진이 남씨와 서씨 일가의 과거를 물고 늘어지는 이유도 순전히 의뢰인의 조카가 너무 미인이라 그런 것도 없잖은 터라 독자에 따라선 되게 실없어 보일 요소가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진이란 캐릭터가 명색이 추리소설에서 탐정을 맡은 것치고 너무 헛다리만 짚는 것 같고, 그렇다고 변호사치곤 그쪽 분야로 두드러진 전문성을 드러내는 장면도 없어서 왜 굳이 변호사를 주인공으로 삼았을까 하는 의문도 들게 했다. 물론 후반부에선 이 모든 의문과 불만을 모조리 만회해버리는데 이런 부분이야말로 본격 미스터리의 아주 전형적인 특징이라 할 만해서 처음 읽었을 때 '와, 우리나라에도 이 정도로 본격적인 추리소설을 쓰는 사람이 있구나' 하며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위에서 말한 불만이란 것들은 작품 전체적인 측면에선 사소하기 그지없는 것들이다. 작가의 글솜씨가 추리소설에 딱 맞게 속도감 있고 군더더기가 없는 등 무지하게 빨리 읽혀서 너무 밋밋한 거 아닌가 싶던 초반부를 금방 돌파할 수 있었다. 이윽고 도입부에서부터 품었던 고진의 긴장과 우려가 폭발하자 안 그래도 술술 읽히던 내용에 더욱 속도가 붙었는데 얼핏 보면 무난히 범인을 지목하고 해결이 될 듯했던 사건이 생각보다 쉽지가 않아서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후 고진은 미묘하게 알리바이를 갖추고 있던 용의자들, 짐작이 갈 듯 말 듯한 범인의 동기, 알리바이 조작은 물론이거니와 범인의 살해 방법조차 아리송했던 일련의 수수께끼들을 자신만의 함정 플레이로 다 빈틈없이 밝혀낸다.

 처음에 헛다리도 짚고 중반부에는 '아직 말할 단계는 아니'라며 지극히 탐정답게 거드름을 피우던 고진은 실로 '어둠의 변호사'란 이명에 걸맞는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해서 그게 참 반전 매력으로 다가왔다. 아니, 사건을 해결할 뿐만 아니라 편법을 동원해 본인이 아예 사형 집행인으로 나섰으니... 이 작품이 우리나라 법의 허점을 토로하는 비판적인 성격을 내세우고 있진 않지만 현직 법조인이 썼다 보니 아주 자연스럽게 법망을 넘나드는 탐정이 탄생해버렸는데 특히 이 작품에서의 사건을 다른 탐정 캐릭터가 맡았으면 어떨까 하고 막연하게 상상해보면 고진이 택한 방식은 확실히 이질적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옛날 어디선가 읽은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괜히 알량한 정의감에 악당을 구했다가 되려 뒤통수를 맞는' 전개가 영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구절이 있었는데 그 가치관이 제대로 녹아든 캐릭터이자 결말이었다고 본다.


 그 인터뷰에선 이런 말도 있었다. 한국 추리소설은 단지 한국 추리소설이란 이유로 외면당하는 것 같은데 한 번 편견을 버리고 책장을 펼쳤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참 좋은 말이지만 작품을 못 썼다면 이 발언은 그저 발악에 불과했을 텐데 다행히도 작품 만듦새가 기대 이상이라 상당히 무게감이 느껴지는 발언이 됐다. 다른 건 몰라도 범인의 원격 살인 트릭은 정말 심플하면서도 기발해 두 번 접해도 놀라웠다. 사건의 이면을 너무 상상에 의존하며 추리했던 것이나 범인의 알리바이 트릭은 어째 구구절절한 감이 있었지만 겉보기엔 특별할 것 없던 사건이 이렇게나 본격 추리소설다운 사건으로 탈바꿈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줘 이래저래 편견이 많이 깨졌다. 편견을 버리라는 작가의 말은 멋지게 작용한 셈이다. 이 말이 10년이 지난 지금도 통할 정도로 아직도 빛을 읽지 않은 만듦새란 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 작품을 읽고 10년이 지난 지금도 내가 꾸준히 챙겨 보는 한국 추리소설가는 도진기 한 사람뿐인데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추리소설의 위상이 비주류란 걸 생각하면 이 작가 한 명이라도 양질의 작품을 계속 집필한다는 건 참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내가 시야가 좁고 편견이 아직도 강해서 다른 좋은 한국 추리소설가를 발견 못한 걸 수도 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편견을 버리라는 작가의 말은 작가 본인의 작품을 위한 말인 동시에 다른 동료 추리소설가들을 위한 말이었을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든다. 이제는 시간이 흘러 이 작품이 출간된 당시만 하더라도 현직 판사였던 작가가 어느덧 고진처럼 변호사가 되는 등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나는 외면은 물론이고 내면은 얼마나 달라졌나 싶어 뜻밖에 반성을 좀 하게 됐다. 지금 보니까 고진이 알게 모르게 은근히 낡은 가치관의 소유자라는 게 딱 느껴질 정도면 정말 시간이 많이도 흐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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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 - 빈에서 만난 황금빛 키스의 화가 클래식 클라우드 3
전원경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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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나랑 여행 스타일이 대단히 잘 맞는 친구가 한 명 있는데, 언젠가 코로나가 종식돼 비행기를 탈 수 있게 된다면 오스트리아에 가볼까 하고 얘기해본 적이 있다. 그때가 언제 올 줄 알고 너무 김칫국 마시는 게 아닌가 싶지만... 아무튼, 그 친구가 비엔나 커피 컨셉의 카페 프랜차이즈 매니저로 일해서 그런지 오스트리아에 관심이 가는 모양이던데 나도 호기심이 가 검색해보니 오스트리아도 안 알려져서 그렇지 꽤 괜찮은 여행지일 것 같았다. 보통 오스트리아는 동유럽 여행으로 묶여서 체코나 헝가리로 갈 때 들르는 곳 정도로 여겨지던데 - 아니면 오스트레일리아와 헷갈리거나... - 그렇게 취급하기엔 막강한 문화적 유산이 많은 나라라는 게 내가 검색을 통해 받은 인상이었다.

 특히 클림트가 오스트리아의 국민 화가 대우를 받는 게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점이었다. 그동안 너무 뭉크한테만 관심을 가진 것 같아서 슬슬 다른 화가한테도 입문하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마침 오스트리아에 관심도 생겼겠다, 조금 뜬금없긴 하지만 어쨌든 클림트도 궁금해져 이 책을 펼치게 됐다.


 이 책은 '우리 시대 대표 거장을 만나는 특별한 여행'이란 취지의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에 속한다. 이 시리즈는 특유의 전문성 있는 내용과 빼곡히 수록된 사진 등 여러모로 고급진 컨셉을 자랑하는데 저번에 읽은 <뭉크>가 워낙에 괜찮아서 이번 책도 기대하며 읽었다. 아무래도 내가 클림트에 무지한 터라 <뭉크>를 읽을 때보단 흥미가 덜하긴 했지만, 클림트의 작품 활동을 그가 일평생을 살았던 도시인 빈의 특성과 연관을 지어 해석한 것과 시간순이 아닌 키워드에 따라 클림트의 생을 따라간 것, 그리고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에 얽힌 에피소드 등은 꽤나 흥미진진하게 읽혔다. 특히 이 초상화의 경우엔 내가 작년에 뉴욕 노이어 갤러리에 갔을 때 직접 본 작품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그 그림에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다니... 이 에피소드는 <우먼 인 골드>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는데 그 영화도 한 번 봐야겠다. 참고로 그 초상화는 사진을 찍지 못했다. 노이에 갤러리는 사진 촬영이 금지라서 어쩔 수 없었다.

사실 클림트의 일대기를 시간 순대로 따라가지 않은 건 약간 불친절한 과정이기도 했다. 일부 대표작만 알지 화가에 대한 선행 학습이 거의 전무했기에 약간 따라가기 벅찼던 측면이 없잖았다. 대놓고 비교하긴 좀 그렇지만 클림트가 뭉크에 비해 비교적 승승장구했고 순탄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일까? 미술 그 자체를 감상하기보단 작품과 화가에 관련된 다양한 드라마에 좀 더 관심이 많은 나에게 순전히 클림트의 작품의 테크닉적 부분을 살펴보는 전개는 처음엔 흥미롭다가도 어딘가 말이 반복된다 싶을 즈음엔 집중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물론 클림트의 살펴봄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분리파와 급격한 화풍 변화가 모두 흥미롭지 않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평소 미술에 관심이 적은 내 입장에서 생경했다 뿐이지 평소 미술이나 클림트에 관심이 있던 독자라면 더없이 충실한 구성의 책일 테니 내 개인적인 감상은 귀담아 듣지 않아도 좋다. 다만 이런 나한테도 빈과 클림트의 관계를 살펴본 책의 내용은 여간 흥미로운 게 아니었단 걸 강조하고 싶다. 찬란했던 옛시절의 광취에서 벗어나지 못해 프랑스나 독일이 여러모로 진보를 거듭할 때 과거의 재현에 관심을 기울인 시대착오적인 빈, 그 빈의 분위기는 클림트의 작품 세계에 고스란히 반영됐는데 초반엔 주류에 편입하고자 비교적 평이한 그림을 그리던 클림트가 얼마 안 있어 철저하게 클림트 본인이 아니면 누구도 그릴 수 없는 작품을 그려낸 건 소름 돋는 일이었다. 그의 대표작이 다 분리파에 속했을 때 그려진 것인데, 이 '분리파'가 기존 예술계와 자신들의 작품 세계를 분리시키려는 취지에서 붙여진 이름인 걸 생각하면 클림트만큼 이 이름이 어울리는 사람도 없을 듯하다.

 클림트가 영리했던 건지 아니면 의외로 보수적이기 이를 데 없는 빈이지만 그만큼 클림트가 독보적이라 그런 건지 고흐나 뭉크가 수모를 겪은 것과 달리 클림트는 논란은 있을지언정 화가로서의 명성은 바닥으로 떨어졌던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클림트를 따라다니는 수식어 중에 '황금'과 '장식'이 많아 너무 겉멋에 치중하는 것 같아 솔직히 말해 그리 정이 잘 안 갔는데 이렇게 일대기를 다 훑어보니 정이 안 간다는 이유로 폄하할 위인은 아니구나 싶었다. 그는 독보적인 예술가였고 그 자신의 예술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단 건 귀감이 될 만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화가의 삶과 드라마에만 주목한 것 같은데 이 책을 읽은 뒤부터는 그림의 기법에 대해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나는 속된 말로 'X손'의 소유자인데 그래서 그런지 유독 내게 거리감이 느껴졌던 화가들이 이제는 경이로운 동시에 어떤 화가나 크든 작든 자기만의 예술 세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동질감을 느끼졌다.


 마냥 행복하기만 한 삶은 아니었지만 화가로서의 명성에 있어서는 한이 서릴 만큼의 여한은 없어 보이는 클림트이기에 읽으면서 묘하게 힐링도 됐다. 그리고 대부분의 혁신적인 화가가 그렇듯 클림트는 그의 사후 100년이 지난 뒤에는 아예 국민 화가로 칭해질 정도로 격이 다른 대우를 받고 있다. 그만한 대우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음을 공감할 수 있던 내용의 책이었는데 마지막 장까지 덮고 나니 그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오스트리아로 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커져 '오스트리아에 관심이 생긴 김에' 읽은 게 아주 적절한 동기가 아니었나 싶다. 오스트리아는 물론이고 작년에 대충 구경하고 나온 감이 있는 노이에 갤러리도 다시 가고 싶어졌는데 지금 유럽이나 뉴욕이나 상황이 별로라서 그 날이 언제 올는지 모른다는 게 너무 답답하다. 정말 언젠가는 갈 생각인데... 몇 년은 기다릴 각오는 해야겠다. 그때까지 이 마음이 변치 않았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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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키가미 10 - 환상의 나라, 완결
마세 모토로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9.8








 작중 어떤 나라에서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주사를 맞는다. 그 주사 속엔 1/1,000의 확률로 사망할 수 있는 시한폭탄이 들어있다. 그 시한폭탄은 18세에서 24세 사이에 작동한다. 말했다시피 시한폭탄은 1/1,000의 확률로 들어있다. 자신이 1,000명 중 한 명임을 알게 되는 건, 한마디로 자신이 러시안 룰렛의 희생양임을 알게 되는 순간은 죽기 바로 24시간 전이다. 그때부터 당사자는 고작 24시간의 시한부 인생을 강요당하게 된다.

 '이키가미'는 24시간의 시한부 인생을 살 당사자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는 사망통지서를 가리킨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이키가미를 배달하는 업에 종사하는 공무원인 후지모토다. 그는 각 에피소드에서 여러 사람에게 느닷없이 찾아가 지금부터 시한부 인생임을 선고한다. 1,000명에 한 명 꼴이니 모두들 기막힌 반응을 보이고 저마다 사연은 다르지만 지금 죽어선 안 되는 절박하고 안타까운 이유를 갖고 있다. 후지모토는 처음엔 공무원 특유의 자기 일 아니라는 듯한 태도로 이들의 최후를 관망한다. 가끔 돌발 상황이 벌어져도 그는 상부를 상대한테 시말서를 쓰느라 씨름할 뿐이고 근본적으로 그들의 삶에 개입하려고 하진 않는다. 아니, 하지 못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그들의 삶을 동정하거나 '이키가미'의 존재 의의에 의문을 품는 모습을 보였다간 그 즉시 '퇴폐사상자'로 찍힐 테니까.


 내가 이 작품의 소재를 들었을 때 가장 두려우면서도 궁금했던 부분은 국민을 무작위로 골라 죽이는 시스템보단 그 시스템이 어떻게 통과되고 정착했느냐 하는 점이었다. 이 일련의 시스템은 국가번영유지법, 줄여서 '국번'으로 불린다. 여기서 번영이란 단어가 생뚱맞다고 느낄 텐데, 무작위로 죽는 사람을 통해 생명의 소중함을 느낀 주변 사람들이 더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할 것이고 그를 통해 실제로 지금과 같은 번영을 이룩했다는 취지에서 이 법은 존속되고 있다. 이 나라의 분위기는 국번을 숭배할수록 신변의 안전이 보장되며 이 법에 의문을 품거나 혹은 의문을 품는 듯한 사람이 보이면 퇴폐사상자로 간주해 정부가 교육을 실시한다. 시한폭탄이라는 다소 과장된 설정이 있긴 하지만 작품 속엔 여럿 끔찍하고도 있음직한 상상을 통해 파시즘 국가만이 선사할 수 있는 막장스런 분위기를 훌륭히 연출해낸다. 작품을 읽기 전에 내가 품었던 두려움은 읽으면서 더욱 심화됐고 최후반부에선 상상 이상으로 소름이 돋았다.

 국민을 무작위로 죽이는 것도 문제지만 그 전에 세뇌를 시키는 것도 실로 소름 돋는 일인데 한편으론 그렇게까지 국번이란 것을 존속할 이유가 무엇인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예를 들어 국번사하는 사람들은 - 국번에 의해 죽는 사람들, 이키가미를 받는 사람들 - 전부 18세에서 24세 사이니까 그 사이엔 고등 교육까지 다 받은 젊은 인재도 포함됐을 테고 그런 사람들까지 죽인다는 건 장기적인 측면에선 번영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리고 그들에게 죽음을 알리는 이키가미도 고작 사망 하루 전에 알리는 것도 문제다. 하루 전에 알려봤자 정서적으로 전혀 위로가 되지 못하며 무슨 돌발 상황이 생길지 가늠도 안 된다. 실제로 첫 번째 에피소드부터가 이 돌발 상황을 다루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억제하기 위한 제약도 존재하지만 그것만으론 역부족이란 느낌인데 이래서야 국민들이 국번을 철저히 숭배하려야 숭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을 것이다. 세뇌만으론 통제할 수 없는 것도 있으니까.


 무엇보다 이 나라의 국번이 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로 작중에선 타인의 국번사를 반면교사로 삼는 인물이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들 수 있다. 후지모토처럼 공무원이 아닌 이상 국번을 자기 일상의 일부로 여기는 사람은 없고 대부분 재앙으로 여길 뿐이다. 갑자기 24시간의 시한부 인생이 시작된 덕분에 만감이 교차할 사건이 벌어지고 때론 국번의 순기능이라 볼 수도 있을 사례도 나옴에 따라 얼핏 국번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건가 하는 착각을 주기도 한다. 어디까지나 작중 인물들 중 극히 일부에 한해서만. 아무튼 유지하느라 품도 많이 들고 반박 요소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국번이 과연 이 나라 입장에서 수지가 맞는 법률인가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의문은 나름대로 그럴싸하고 충격적인 진실이 밝혀지며 전부 해소된다. 이 진실은 차라리 국가 번영 같은 허상이 차라리 낫다는 생각마저 들게 만들었다.

 국번을 유지하는 진짜 이유는 근본적인 부분에서 어긋나긴 했지만 논리적이었다. 그야말로 논리적인 역겨움이었달까. 이 진실이 작품 초반부터 설정된 것인지 궁금한데, 일단은 구멍 투성이인 국번의 존재 의의를 제대로 설명하고 있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이런 식의 인구 조절 설정의 작품을 좋아하는데 그중 가장 압도적인 설정과 세계관이었다. 옴니버스식 구성을 통해 다양한 서스펜스를 그리는 것도 흥미로웠고 각 에피소드의 퀄리티가 일정한 것이나 여러 일을 겪으면서 단순한 방관자에 불과했던 후지모토가 주체적인 인물로 변모하는 일대기도 인상적이었다. 처음엔 주인공치고 너무 관망만 해서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참 오래도 걸렸지만 결국 국가 체제에 반기를 드는 건 역시 쾌감이 넘쳤다. 아, 오히려 이만한 파시즘 국가에선 주인공 같은 소시민이 용기를 내기가 이만큼 오래 걸리는 게 더 현실적이려나. 그 변화 과정에 사적인 감정이 많이 개입한 건 약간 아쉽지만 쿠보와의 관계를 통해 누가 내 편인지 구분이 안 가는 딜레마가 그려졌던 것도 이 작품의 빼놓을 수 없는 재미겠다. 어떻게 보면 이 부분이야말로 작품의 진정한 백미라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시한부 인생이란 반복적인 서사 구조와 일정한 분량 때문인지 간혹 반복되거나 소모적이거나 연출이 과하거나 개연성이 얼렁뚱땅인 경우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작품에 있어 다 소중한 에피소드였다. 세계관에 리얼리티를 부여하고 긴 시간에 걸쳐 독자들로 하여금 국번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과정이 조금 더 밀도 있고 짤막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드는데, 특히 후반부의 전개가 너무 몰아치는 듯한 느낌도 없잖아서 - 특히 후지모토의 각성이... - 그 점은 좀 아쉽다. 작품의 연재 기간을 보니 분량에 비해 완결에 이르는 시간이 긴 편이던데 한 편의 분량을 보면 주간 연재는 아니었을 거고 월간 연재였을 듯해 스토리의 세세한 아쉬움이 더욱 걸린다. 이래저래 대중적인 작품이 아니니 완결하기까지 현실적인 제약이 많이 따랐을 것 같은데 이런 제약이 작가의 창작 환경을 괴롭힌 게 아닐까 하고 추측된다.

 최근 우리나라와 다른 환경을 그린 작품을 많이 접했다. 사회주의 소련 시대를 묘사한 <모스크바의 신사>, <에이전트6>와 극보수 이슬람 정권의 <페르세폴리스>, 70세가 되면 안락사시킬 거라는 가상의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70세 사망법안, 가결>과 이 작품 <이키가미>까지. 전부 한 걸음 옆에서 보면 그렇게 엉망진창일 수 없는 세계관이지만 당사자들로서는 세뇌당할 수밖에 없거나 쉽게 저항하기 힘든 사정이 있음을 토로하는 작품들이다. 실재했든 가공이든 지금 우리나라와 다른 방식으로 흘러가는 세계를 접하니 내 삶과 내가 살고 있는 환경을 돌아보게 되는데, 세상이 생각보다 허술한 것 같아도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고 결코 무르지 않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위에 언급한 작품들의 세계가 하도 막장이다 보니 반면교사로 삼기에 수월할 뿐더러 전에 없이 우리나라가 천국이란 생각도 들었는데 너무 자아도취에 빠지진 말되 어떤 식으로든 부당함에 저항한 인물들의 모습에서 본받을 점이 무엇인지 곱씹어봐야겠다.


 설령 비겁한 도망자에 불과할지라도 목숨을 걸었던 후지모토처럼 우리 역시 우리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을까? 후지모토가 말하듯 모든 것이 물거품이 돼 남은 생을 시체나 다름없이 살게 된다 하더라도... 최후반부에 나오는 이 후지모토의 독백은 그 자체만으로 이 작품을 읽는 보람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것만으로 작품의 논리적인 역겨움은 충분히 씻겨졌으므로.

 이 작품을 그린 마세 모토로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변신>을 원작으로 한 <헤드>를 그린 만화가인데 시간이 걸렸지만 이렇게 오리지널 작품을 읽게 돼 감개무량했다. 창작 활동이 잘 풀리지 않는 만화가나 원작이 있는 만화를 그리는 줄로 알았는데 이 작가를 보니 꼭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키가미>를 완독하는데 오래 걸린 이유는 작품이 절판됐고 중고서점을 통해 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작품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게 아쉽기 그지없는데 나의 짧고 사사로운 포스팅을 통해 소소하게라도 알려지기를 희망한다.

아니면, 책임을 면할 수만 있다면, 목숨도 아깝지 않다 그건가...?

그렇다면 뭣 때문에 살고 있는가! 자기 존재에 책임지지 않는 인생이... 어떻게 살아갈 가치가 있단 말인가...!!

그러면 마치, 태어난 순간부터...

죽은 것과 같지 않은가... - Episode 20 환상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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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세 사망법안, 가결
가키야 미우 지음, 김난주 옮김 / 왼쪽주머니 / 201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9.5






 스포일러 : 결말에 대해 언급했음


 작년에 읽은 <노후자금이 없습니다>에서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을 처음 접했을 때의 전율을 선사해준 가키야 미우의 다른 작품을 읽어봤다. 제목과 설정 덕에 작가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지 않을까 싶은데 - 일각에선 일본판 <82년생 김지영>이라고도 하더라. 일리가 있는 얘기다. - 막상 읽어보니 기대에 비해 SF적으로 풀어나가지 않아 의외였다. 아니, 무엇을 숨기랴.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대단히 실망했다. 모든 사람이 예외없이 70세가 되면 사망해야 한다는 사상 초유의 법률을 두고 고부 갈등이니 세대 차이에 대해서만 얘기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굉장히 상상을 자극하고 할 얘기도 많은 소재인데 너무 작가 본인의 장기에만 치중하는 듯한 전개가 아닌가 싶었는데 나중에 보니 오히려 이게 더 정답이고 그래서 더 신선하게 다가왔다. 시어머니와 남편, 딸의 비중이 적지 않나 하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지만.

 70세 사망법안이 가결되기까지 2년이 남았다는 설정은 색다른 긴장감을 자아낸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처럼 국가적 규모의 공익을 위해 사람 목숨 빼앗는 일까지 손을 대는 극단적이고 반인륜적인 법률 및 사상을 다루는 작품을 꽤 좋아하는데 당장 생각나는 건 소설 <백년법>, <살인출산>과 만화 <이키가미>, 그리고 타노스가 등장했던 '어벤져스' 3, 4편이다. 이 작품들에선 70세 사망법안조차 귀엽게 보일 정도로 충격적인 '인구 조절' 계획을 묘사하는데 흔히 이런 작품은 이미 이런 계획이 사회에 깊숙이 녹아들어 모든 사람이 세뇌를 당한 상황과 반대로 그 계획이 기존 사회의 관념과 충돌해 갈등을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나뉘는 것 같다. <70세 사망법안, 가결>의 경우엔 일단은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기존 사회의 관념과 충돌을 보인다고 말하기엔 사람들의 동요가 너무 적어 묘하게 몰입이 되지 않았다. 이 부분은 지금 생각해도 작가의 SF적 상상력이 빈약하단 반증이다. 작중 다카라다 집안의 양상이 우리 현실을 마주보게 하고 그 집안 문제가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 작품을 완독하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작가가 오쿠다 히데오에 버금가는 가독성 좋은 문체나 캐릭터 설정을 갖추지 못했다면 더더욱 힘들었을 듯하다.


 보통 이런 종류의 작품은 한 가족의 이야기만 그리기 보단 여러 가족이나 집단, 다양한 계층의 사람을 주목하면서 군상극의 모습을 보이기 마련인데 작가는 우리 시대의 갈등 양상을 대표할 만한 가족에 집중함으로써 효율을 극대화시켰다. 처음엔 소재가 충격적인 것에 비해 시시한 주제의식과 전개라 생각했지만 이야기의 주역인 도요코가 시어머니 병 수발에 지치다 폭발한 다음 가출에 이르는 과정의 개연성과 몰입도가 보통이 아닌 터라 초반의 불만은 잠시 잊을 수 있었다. 특히 남편이란 작자의 행태 때문에 읽는 내가 다 살의가 솟았던 것과 도요코처럼 체념하거나 아예 포기해버리는 사람들에 대한 작가의 통찰력이 빛을 발한 게 인상적이었다. 나처럼 제3자가 보면 저렇게 불합리하고 엇나간 관계도 없는데 그런 관계를 날 때부터 이어온 당사자들에게 있어선 다들 자신이 당면한 문제에 허덕이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에서다. 명문대를 졸업해놓고 취업이 불발돼 히키코모리가 되기 직전인 아들이나 쉽사리 가출을 결심하지 못하는 도요코가 답답하면서도 한편으로 이해가 갔던 게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70세 사망법안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도대체 무슨 일을 겪으면 나라가 '70세가 되는 모든 국민을 안락사시키자, 그러면 연금을 비롯한 모든 사회 문제가 일시에 해결되니까.' 라고 말을 하겠는가? 그런데 이 모든 결정은 하루이틀 논의된 게 아니라 몇 번의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기에 설득력을 얻은 것일 텐데 그 사건의 예로 바로 다카라다 가족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그야말로 그림으로 그린 듯한 곧 불행해질 가족의 모습이었으니까. 이들의 모습에 집약적인 사회 병폐, 세대 갈등 가부장적 사고와 취업난 등은 작중에서 70세 사망법안이 가결되는 핵심적인 이유였으니까.


 이 밑엔 스포일러 있음


 알고 보니 70세 사망법안은 국민들로 하여금 노후가 없어지는 삶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 일종의 쇼였음이 밝혀진다. 개인적으로 너무 도박인 것 같아 현실성도 떨어지고 이후 정부가 취할 방침이란 것도 너무 희망적이라 어째 의심스러웠지만 어느 정도 그럴싸한 계획이고 또 실제로 다카라다 가족한테 일어난 변화가 너무 바람직해서 작품의 소재가 전에 없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작가의 성격이 원래 그런지 <노후자금이 없습니다> 때처럼 상당한 해피엔딩이 아닐 수 없었는데 그 작품과 마찬가지로 과정에 있어서 누군가 인내하고 희생해서 일어난 결과가 아니라 저마다 결점이 있던 인물들이 그 결점을 고침으로써 진정한 가족으로 거듭나리란 전망을 품게 해 진정 좋은 해피엔딩이었다고 본다.

 70세 사망법안이라는 정부 차원의 극단적인 개입 덕분이긴 하지만 어쨌든 스스로 변화하는 용기를 낸 것은 그들 다카라다 가족 구성원 스스로의 몫이었던 것, 그리고 기대완 사뭇 달랐지만 한 가족에 집중해 작가 본인의 장기를 살리면서도 SF적인 구색을 갖추고 신선한 해석을 가미한 것이 엄청난 반전 매력으로 다가왔다. 왜 항상 인구 조절을 다룬 SF는 비장하고 비참한 결말이어야 하는가,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라고 다들 말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하는 질문에 대한 작가의 답변이 정말 멋졌다. 제목이 주는 막장스런 인상과는 달리 여러 의미에서 힐링이 되는 작품이 아닐 수 없었는데, 개중 장르적 글쓰기에 대한 내 고정관념을 깨부쉈다는 측면에서 적잖은 충격적이었다. 아직 이 작가의 작품을 두 권밖엔 못 읽었는데 다른 작품들도 기대된다. 이 작품을 제외하면 다들 제목이 비슷비슷해서 별로 관심이 안 갔는데, 이거 아무래도 괜한 선입견은 버려야겠다.

우리 세대는 죽을 때까지 일하지 않으면 먹고살기도 힘들다고. 그러니까 아빠도 죽을 때까지 일해요. - 35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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