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키가미 10 - 환상의 나라, 완결
마세 모토로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9.8








 작중 어떤 나라에서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주사를 맞는다. 그 주사 속엔 1/1,000의 확률로 사망할 수 있는 시한폭탄이 들어있다. 그 시한폭탄은 18세에서 24세 사이에 작동한다. 말했다시피 시한폭탄은 1/1,000의 확률로 들어있다. 자신이 1,000명 중 한 명임을 알게 되는 건, 한마디로 자신이 러시안 룰렛의 희생양임을 알게 되는 순간은 죽기 바로 24시간 전이다. 그때부터 당사자는 고작 24시간의 시한부 인생을 강요당하게 된다.

 '이키가미'는 24시간의 시한부 인생을 살 당사자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는 사망통지서를 가리킨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이키가미를 배달하는 업에 종사하는 공무원인 후지모토다. 그는 각 에피소드에서 여러 사람에게 느닷없이 찾아가 지금부터 시한부 인생임을 선고한다. 1,000명에 한 명 꼴이니 모두들 기막힌 반응을 보이고 저마다 사연은 다르지만 지금 죽어선 안 되는 절박하고 안타까운 이유를 갖고 있다. 후지모토는 처음엔 공무원 특유의 자기 일 아니라는 듯한 태도로 이들의 최후를 관망한다. 가끔 돌발 상황이 벌어져도 그는 상부를 상대한테 시말서를 쓰느라 씨름할 뿐이고 근본적으로 그들의 삶에 개입하려고 하진 않는다. 아니, 하지 못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그들의 삶을 동정하거나 '이키가미'의 존재 의의에 의문을 품는 모습을 보였다간 그 즉시 '퇴폐사상자'로 찍힐 테니까.


 내가 이 작품의 소재를 들었을 때 가장 두려우면서도 궁금했던 부분은 국민을 무작위로 골라 죽이는 시스템보단 그 시스템이 어떻게 통과되고 정착했느냐 하는 점이었다. 이 일련의 시스템은 국가번영유지법, 줄여서 '국번'으로 불린다. 여기서 번영이란 단어가 생뚱맞다고 느낄 텐데, 무작위로 죽는 사람을 통해 생명의 소중함을 느낀 주변 사람들이 더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할 것이고 그를 통해 실제로 지금과 같은 번영을 이룩했다는 취지에서 이 법은 존속되고 있다. 이 나라의 분위기는 국번을 숭배할수록 신변의 안전이 보장되며 이 법에 의문을 품거나 혹은 의문을 품는 듯한 사람이 보이면 퇴폐사상자로 간주해 정부가 교육을 실시한다. 시한폭탄이라는 다소 과장된 설정이 있긴 하지만 작품 속엔 여럿 끔찍하고도 있음직한 상상을 통해 파시즘 국가만이 선사할 수 있는 막장스런 분위기를 훌륭히 연출해낸다. 작품을 읽기 전에 내가 품었던 두려움은 읽으면서 더욱 심화됐고 최후반부에선 상상 이상으로 소름이 돋았다.

 국민을 무작위로 죽이는 것도 문제지만 그 전에 세뇌를 시키는 것도 실로 소름 돋는 일인데 한편으론 그렇게까지 국번이란 것을 존속할 이유가 무엇인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예를 들어 국번사하는 사람들은 - 국번에 의해 죽는 사람들, 이키가미를 받는 사람들 - 전부 18세에서 24세 사이니까 그 사이엔 고등 교육까지 다 받은 젊은 인재도 포함됐을 테고 그런 사람들까지 죽인다는 건 장기적인 측면에선 번영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리고 그들에게 죽음을 알리는 이키가미도 고작 사망 하루 전에 알리는 것도 문제다. 하루 전에 알려봤자 정서적으로 전혀 위로가 되지 못하며 무슨 돌발 상황이 생길지 가늠도 안 된다. 실제로 첫 번째 에피소드부터가 이 돌발 상황을 다루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억제하기 위한 제약도 존재하지만 그것만으론 역부족이란 느낌인데 이래서야 국민들이 국번을 철저히 숭배하려야 숭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을 것이다. 세뇌만으론 통제할 수 없는 것도 있으니까.


 무엇보다 이 나라의 국번이 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로 작중에선 타인의 국번사를 반면교사로 삼는 인물이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들 수 있다. 후지모토처럼 공무원이 아닌 이상 국번을 자기 일상의 일부로 여기는 사람은 없고 대부분 재앙으로 여길 뿐이다. 갑자기 24시간의 시한부 인생이 시작된 덕분에 만감이 교차할 사건이 벌어지고 때론 국번의 순기능이라 볼 수도 있을 사례도 나옴에 따라 얼핏 국번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건가 하는 착각을 주기도 한다. 어디까지나 작중 인물들 중 극히 일부에 한해서만. 아무튼 유지하느라 품도 많이 들고 반박 요소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국번이 과연 이 나라 입장에서 수지가 맞는 법률인가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의문은 나름대로 그럴싸하고 충격적인 진실이 밝혀지며 전부 해소된다. 이 진실은 차라리 국가 번영 같은 허상이 차라리 낫다는 생각마저 들게 만들었다.

 국번을 유지하는 진짜 이유는 근본적인 부분에서 어긋나긴 했지만 논리적이었다. 그야말로 논리적인 역겨움이었달까. 이 진실이 작품 초반부터 설정된 것인지 궁금한데, 일단은 구멍 투성이인 국번의 존재 의의를 제대로 설명하고 있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이런 식의 인구 조절 설정의 작품을 좋아하는데 그중 가장 압도적인 설정과 세계관이었다. 옴니버스식 구성을 통해 다양한 서스펜스를 그리는 것도 흥미로웠고 각 에피소드의 퀄리티가 일정한 것이나 여러 일을 겪으면서 단순한 방관자에 불과했던 후지모토가 주체적인 인물로 변모하는 일대기도 인상적이었다. 처음엔 주인공치고 너무 관망만 해서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참 오래도 걸렸지만 결국 국가 체제에 반기를 드는 건 역시 쾌감이 넘쳤다. 아, 오히려 이만한 파시즘 국가에선 주인공 같은 소시민이 용기를 내기가 이만큼 오래 걸리는 게 더 현실적이려나. 그 변화 과정에 사적인 감정이 많이 개입한 건 약간 아쉽지만 쿠보와의 관계를 통해 누가 내 편인지 구분이 안 가는 딜레마가 그려졌던 것도 이 작품의 빼놓을 수 없는 재미겠다. 어떻게 보면 이 부분이야말로 작품의 진정한 백미라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시한부 인생이란 반복적인 서사 구조와 일정한 분량 때문인지 간혹 반복되거나 소모적이거나 연출이 과하거나 개연성이 얼렁뚱땅인 경우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작품에 있어 다 소중한 에피소드였다. 세계관에 리얼리티를 부여하고 긴 시간에 걸쳐 독자들로 하여금 국번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과정이 조금 더 밀도 있고 짤막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드는데, 특히 후반부의 전개가 너무 몰아치는 듯한 느낌도 없잖아서 - 특히 후지모토의 각성이... - 그 점은 좀 아쉽다. 작품의 연재 기간을 보니 분량에 비해 완결에 이르는 시간이 긴 편이던데 한 편의 분량을 보면 주간 연재는 아니었을 거고 월간 연재였을 듯해 스토리의 세세한 아쉬움이 더욱 걸린다. 이래저래 대중적인 작품이 아니니 완결하기까지 현실적인 제약이 많이 따랐을 것 같은데 이런 제약이 작가의 창작 환경을 괴롭힌 게 아닐까 하고 추측된다.

 최근 우리나라와 다른 환경을 그린 작품을 많이 접했다. 사회주의 소련 시대를 묘사한 <모스크바의 신사>, <에이전트6>와 극보수 이슬람 정권의 <페르세폴리스>, 70세가 되면 안락사시킬 거라는 가상의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70세 사망법안, 가결>과 이 작품 <이키가미>까지. 전부 한 걸음 옆에서 보면 그렇게 엉망진창일 수 없는 세계관이지만 당사자들로서는 세뇌당할 수밖에 없거나 쉽게 저항하기 힘든 사정이 있음을 토로하는 작품들이다. 실재했든 가공이든 지금 우리나라와 다른 방식으로 흘러가는 세계를 접하니 내 삶과 내가 살고 있는 환경을 돌아보게 되는데, 세상이 생각보다 허술한 것 같아도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고 결코 무르지 않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위에 언급한 작품들의 세계가 하도 막장이다 보니 반면교사로 삼기에 수월할 뿐더러 전에 없이 우리나라가 천국이란 생각도 들었는데 너무 자아도취에 빠지진 말되 어떤 식으로든 부당함에 저항한 인물들의 모습에서 본받을 점이 무엇인지 곱씹어봐야겠다.


 설령 비겁한 도망자에 불과할지라도 목숨을 걸었던 후지모토처럼 우리 역시 우리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을까? 후지모토가 말하듯 모든 것이 물거품이 돼 남은 생을 시체나 다름없이 살게 된다 하더라도... 최후반부에 나오는 이 후지모토의 독백은 그 자체만으로 이 작품을 읽는 보람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것만으로 작품의 논리적인 역겨움은 충분히 씻겨졌으므로.

 이 작품을 그린 마세 모토로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변신>을 원작으로 한 <헤드>를 그린 만화가인데 시간이 걸렸지만 이렇게 오리지널 작품을 읽게 돼 감개무량했다. 창작 활동이 잘 풀리지 않는 만화가나 원작이 있는 만화를 그리는 줄로 알았는데 이 작가를 보니 꼭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키가미>를 완독하는데 오래 걸린 이유는 작품이 절판됐고 중고서점을 통해 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작품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게 아쉽기 그지없는데 나의 짧고 사사로운 포스팅을 통해 소소하게라도 알려지기를 희망한다.

아니면, 책임을 면할 수만 있다면, 목숨도 아깝지 않다 그건가...?

그렇다면 뭣 때문에 살고 있는가! 자기 존재에 책임지지 않는 인생이... 어떻게 살아갈 가치가 있단 말인가...!!

그러면 마치, 태어난 순간부터...

죽은 것과 같지 않은가... - Episode 20 환상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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