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변호사 - 붉은 집 살인사건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 1
도진기 지음 / 들녘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9.2








 '어둠의 변호사'라는 시리즈 이름, <붉은 집 살인사건>이란 제목은 읽기 전엔 다소 낯간지러운 감이 있었지만 추리소설로써 부족함이 없는 완성도를 보고 나니 오히려 작가의 자신감으로 느껴졌다. 10년 만에 다시 읽은 이 작품은 왜 도진기 작가가 한국 추리소설계의 절대강자라 불리는지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줬다. 작가는 그 뒤에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는 물론 '진구' 시리즈를 비롯 많은 추리소설을 집필했는데 이렇게 내가 처음에 접한 작가의 작품을 읽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물론 시간이 흘러서 그런지 감동이 예전만 같진 않았다. 당장 고진과 유현 콤비의 매력이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잘 와 닿지 않았던 것도 그렇고 이야기의 도입부도 묘하게 2% 부족할 뿐더러 고진이 남씨와 서씨 일가의 과거를 물고 늘어지는 이유도 순전히 의뢰인의 조카가 너무 미인이라 그런 것도 없잖은 터라 독자에 따라선 되게 실없어 보일 요소가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진이란 캐릭터가 명색이 추리소설에서 탐정을 맡은 것치고 너무 헛다리만 짚는 것 같고, 그렇다고 변호사치곤 그쪽 분야로 두드러진 전문성을 드러내는 장면도 없어서 왜 굳이 변호사를 주인공으로 삼았을까 하는 의문도 들게 했다. 물론 후반부에선 이 모든 의문과 불만을 모조리 만회해버리는데 이런 부분이야말로 본격 미스터리의 아주 전형적인 특징이라 할 만해서 처음 읽었을 때 '와, 우리나라에도 이 정도로 본격적인 추리소설을 쓰는 사람이 있구나' 하며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위에서 말한 불만이란 것들은 작품 전체적인 측면에선 사소하기 그지없는 것들이다. 작가의 글솜씨가 추리소설에 딱 맞게 속도감 있고 군더더기가 없는 등 무지하게 빨리 읽혀서 너무 밋밋한 거 아닌가 싶던 초반부를 금방 돌파할 수 있었다. 이윽고 도입부에서부터 품었던 고진의 긴장과 우려가 폭발하자 안 그래도 술술 읽히던 내용에 더욱 속도가 붙었는데 얼핏 보면 무난히 범인을 지목하고 해결이 될 듯했던 사건이 생각보다 쉽지가 않아서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후 고진은 미묘하게 알리바이를 갖추고 있던 용의자들, 짐작이 갈 듯 말 듯한 범인의 동기, 알리바이 조작은 물론이거니와 범인의 살해 방법조차 아리송했던 일련의 수수께끼들을 자신만의 함정 플레이로 다 빈틈없이 밝혀낸다.

 처음에 헛다리도 짚고 중반부에는 '아직 말할 단계는 아니'라며 지극히 탐정답게 거드름을 피우던 고진은 실로 '어둠의 변호사'란 이명에 걸맞는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해서 그게 참 반전 매력으로 다가왔다. 아니, 사건을 해결할 뿐만 아니라 편법을 동원해 본인이 아예 사형 집행인으로 나섰으니... 이 작품이 우리나라 법의 허점을 토로하는 비판적인 성격을 내세우고 있진 않지만 현직 법조인이 썼다 보니 아주 자연스럽게 법망을 넘나드는 탐정이 탄생해버렸는데 특히 이 작품에서의 사건을 다른 탐정 캐릭터가 맡았으면 어떨까 하고 막연하게 상상해보면 고진이 택한 방식은 확실히 이질적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옛날 어디선가 읽은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괜히 알량한 정의감에 악당을 구했다가 되려 뒤통수를 맞는' 전개가 영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구절이 있었는데 그 가치관이 제대로 녹아든 캐릭터이자 결말이었다고 본다.


 그 인터뷰에선 이런 말도 있었다. 한국 추리소설은 단지 한국 추리소설이란 이유로 외면당하는 것 같은데 한 번 편견을 버리고 책장을 펼쳤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참 좋은 말이지만 작품을 못 썼다면 이 발언은 그저 발악에 불과했을 텐데 다행히도 작품 만듦새가 기대 이상이라 상당히 무게감이 느껴지는 발언이 됐다. 다른 건 몰라도 범인의 원격 살인 트릭은 정말 심플하면서도 기발해 두 번 접해도 놀라웠다. 사건의 이면을 너무 상상에 의존하며 추리했던 것이나 범인의 알리바이 트릭은 어째 구구절절한 감이 있었지만 겉보기엔 특별할 것 없던 사건이 이렇게나 본격 추리소설다운 사건으로 탈바꿈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줘 이래저래 편견이 많이 깨졌다. 편견을 버리라는 작가의 말은 멋지게 작용한 셈이다. 이 말이 10년이 지난 지금도 통할 정도로 아직도 빛을 읽지 않은 만듦새란 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 작품을 읽고 10년이 지난 지금도 내가 꾸준히 챙겨 보는 한국 추리소설가는 도진기 한 사람뿐인데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추리소설의 위상이 비주류란 걸 생각하면 이 작가 한 명이라도 양질의 작품을 계속 집필한다는 건 참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내가 시야가 좁고 편견이 아직도 강해서 다른 좋은 한국 추리소설가를 발견 못한 걸 수도 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편견을 버리라는 작가의 말은 작가 본인의 작품을 위한 말인 동시에 다른 동료 추리소설가들을 위한 말이었을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든다. 이제는 시간이 흘러 이 작품이 출간된 당시만 하더라도 현직 판사였던 작가가 어느덧 고진처럼 변호사가 되는 등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나는 외면은 물론이고 내면은 얼마나 달라졌나 싶어 뜻밖에 반성을 좀 하게 됐다. 지금 보니까 고진이 알게 모르게 은근히 낡은 가치관의 소유자라는 게 딱 느껴질 정도면 정말 시간이 많이도 흐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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