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도르래 - 살인곰 서점의 사건파일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문승준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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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시리즈 중 가장 귀여운 표지가 무색하게 <녹슨 도르래>는 어둡고 상당히 무게감 있는 정통 하드보일드 작품이다.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는 와카타케 나나미가 작정하고 쓴 하드보일드 시리즈긴 하나 기본적으로 본인의 장기인 일상 추리물의 정체성 또한 놓치지 않았는데 <녹슨 도르래>는 그런 요소마저 거의 없는, 정말 꿈도 희망도 없는 설정과 전개를 선보인다. 이렇게 잔재주라곤 부리지 않은 플롯의 하드보일드를 언제 마지막으로 읽었을까 하고 생각해볼 정도였다. 

 나도 은근히 일본 소설을 많이 읽었기에 일본식 인명에 꽤 익숙한 편이라 자부했는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 그 자부심이 적잖이 흔들렸다. 저자나 역자라도 이 작품의 인물 관계도를 그리면 어땠을까 싶다. 그렇지 않아도 플롯도 복잡하고 전개도 상당히 빠르니 쫓아가기 버거웠고 '일본 이름은 그 이름이 그 이름 같아서' 란 말을 하며 백기를 흔들고 싶었던 건 일본 소설 중엔 이 책이 거의 처음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진입 장벽이 사악한 작품은 아니었는데, 시선을 잡아끄는 자극적인 소재나 독특한 세계관을 중시하며 읽던 요즘에 정면으로 일상 속 범죄의 그림자를 쫓는 이 작품의 컨셉이 - 심지어 탐정인 하무라 아키라는 여타 하드보일드 탐정들과는 다르게 허세조차 없으니... - 참 오랜만이라 도리어 어색했던 것 같다. 


 아마 시리즈의 팬이 아니라면 우연히 이 작가의 책을 <녹슨 도르래>로 처음 접할 독자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싶다. 전편에서 이어지는 내용 같은 건 없으니 이 작품부터 접해도 상관은 없겠지만, 표지 때문에 괴리감이 들 수도 있는 작품의 설정이나 작품의 진지함 때문에 당혹감을 느낄 독자도 적잖을 듯하다. 반면 와카타케 나나미의 작품을 한두 편 읽은 게 아닌 내게 있어 작가의 냉소적인 문체와 작심한 듯 주인공을 고생시키는 어딘지 고약한 면모, 그리고 단편에서 특히 잘 발휘됐던 구성미가 400페이지 넘는 장편에서도 생각보다 덜 지루하고 어색하지 않게 발휘된 게 아주 인상적인 작품이다. <녹슨 도르래>는 시리즈 최고의 작품은 아닐지언정 근래 보기 드문 깊이감이 작가의 노련한 솜씨와 더불어 눈부시게 빛나는 작품이라 보기에 손색이 없었다. 

 특히 하무라 아키라가 탐정으로서 의무와 책임을 자각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사건을 파헤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하무라 아키라는 예전엔 시종 시니컬하고 트러블에게 사랑을 받는 트러블 메이커라는 정체성이 더 부각됐지 탐정은 어디까지나 그녀를 거쳐간 수많은 직업 중 가장 적성에 맞을 뿐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기에 시리즈 2기의 서막을 알린 <이별의 수법>보다 더한 시련을 이 작품에서 겪으며 탐정으로서의 일종의 사명감을 전혀 어색하다거나 낯간지럽지 않게 자각하는 결말부가 그렇게 인상적일 수 없었다. 솔직히 이 작품에서 겪은 사건을 객관적으로 놓고 보면 하무라는 전과 마찬가지로 운 나쁘게 휘말린 것에 지나지 않아 결말에서와 같은 심상의 변화가 와 닿지 않을 법도 했는데 실제론 그런 어색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귀찮은 것도 싫고 탐정이랍시고 착취당하는 건 더 싫고 경찰한테 모욕을 당하는 것도 마뜩찮고 범인이건 나발이건 간에 무례한 것들은 질색인 하무라 아키라는 이 작품에서 어딘지 심적으로 기댈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며 내가 기억하는 한 가장 훈훈한 장면이 연출됐지만 작가가 더 이상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예측 불허하고 비극적인 일들을 연달아 하무라 아키라와 그 주변 인물들에게 선사한다. 계속 표지를 언급하는 게 좀 그렇지만 책의 저 귀여운 표지만으론 도저히 감도 안 잡히는 어둡고 민감한 소재가 많이 나와 가급적 언급을 하지 않고 직접 읽어보길 권하는 게 내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작품의 모든 인과를 조리 있게 설명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인상을 나열하는 식으로 감상을 남기는 것이지만... 

 이 작품의 후속작 <불온한 잠>은 단편집이라고 한다. <녹슨 도르래> 못지않게 귀여운 표지와 의미심장한 제목이 눈길을 끄는 책으로 수록작들에서 하무라 아키라가 또 어떤 심각한 일들에 휘말리고 상처 입을지 기대되면서도 걱정이 된다. 사람에 따라 아직 한창이라 여기는 경우도 있지만 마흔을 넘긴 하무라를 보면 정말이지 첫 등장에 비해 노쇠해져 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데 어째 갈수록 겪는 사건들의 수위는 점점 높아져만 가는 것 같다. 누가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를 언급하기도 하던데 나도 동의한다. 도대체 나중에 어떤 행복을 안겨주려고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건지... 아니, 과연 행복을 안겨주고픈 마음이 있기나 한 건지 의심된다. 물론 캐릭터의 운명은 누가 뭐라 하든 최종적으로 작가의 마음에 달린 것이지만, 이 정도로 오래 독자들과 만난 캐릭터들인 만큼 해리 홀레나 하무라 아키라의 행보가 독자로선 이젠 좀 광명해졌으면 하고 바라는 걸 작가들도 알아줬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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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 gone 2 - 완결
수신지 지음, 윤정원 외 감수 / 귤프레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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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낙태를 소재로 한 만화 <곤>은 <며느라기>로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수상한 수신지 작가의 작품이다. <며느라기>에서 호평을 받았던 요소들, 이를 테면 귀여운 그림체와 대비되는 서늘한 비판은 이 작품에서도 건재했는데 차이가 있다면 소재가 소재라 그런지 보다 명확히 비판적인 주제의식을 갖고서 연재에 임한 것이었다. 1권에 수록된 작가 노트를 보면 상당한 연구 끝에 연재에 들어간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아쉽게도 기획했던 모든 요소가 완벽히 녹아들진 않았으나 낙태를 죄로 몰아가는 개념이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불합리하단 걸 역설해냈다는 점에서 완전히 대성공을 거둔 작품이었다. 

 흡사 유명 고전 SF 소설 <시녀 이야기>의 프리퀄로 쳐도 무방할 정도의 작품으로 출산을 신성시한 나머지 막장으로 치닫는 국가의 모습을 작가는 유감없이 그려낸다. 막장인 점이 어디 한둘은 아니지만 가장 압권이었던 것은 과거에 낙태를 한 여성도 색출해 죄를 묻는다는 것이었다. 이는 만약 여성 징병제를 하게 되면 실질적으로 어느 연령대의 여성까지 징집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 하는 질문과 유사해 법의 형평성을 달성시킨다는 게 정말 미치도록 어려운 일이란 걸, 그렇기에 작중 세계관이 얼마나 막장인지 남성 독자인 나에게도 전혀 어렵지 않게 와 닿았다. 페미니스트들이 제기하는 문제가 적절한 예시가 동반되지 못하면 때론 지독히도 와 닿지 않은 걸 생각하면 작중 세계관의 막장스러움을 드러내는 장치치고도 너무 무리수였던 '과거의 낙태 여성 색출'이란 전개가 극단적일지언정 여러모로 필수불가결한 전개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국민 수준에 맞는 정부와 정책이 나오기 마련이라니까 마냥 허무맹랑한 전개도 아니었고 말이다. 


 일본 작가 가키야 미우의 소설 <70세 사망법안, 가결>과 유사점이 많은 작품이었는데 정부가 이 정도로 막장 정책을 펼치게 된 계기나 물러나는 원인엔 설명과 설정이 부족하거나 썰렁했던 것, 그리고 소재의 스케일에 비해 그 제도로 인해 피해를 입는 한 가족을 비추는 등 디테일한 묘사에 집중했다는 것이 특히 비슷했다. 전자의 요소는 나름대로 독자로 하여금 더욱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로써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후자는 독자마다 호불호가 갈리지 않을까 싶은데 나는 개인적으로 아주 좋았다. 일찍이 이 작가가 미묘한 가족 갈등의 점화나 폭발을 <며느라기>에서 성공적으로 선보인 바가 있는데 이 작품은 등장인물들이 훨씬 많은 탓에 인물 묘사가 그 작품보다 상대적으로 단편적이긴 해도 기본 성격 자체가 답답하지가 않아 좋게 말해 아주 사이다였지만, 반대로 매사에 공격적으로 진행돼 가독성이 좋은 것에 비해 읽기 불편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대부분의 여성들을 하루 아침에 범죄자로 몰아가는 작중 세계관 때문에 갈등이 폭발하거나 공격적인 언사가 오가는 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는데 주요 인물들 사이의 갈등 몇 개가 석연찮게 봉합돼서 나름 해피엔딩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의 결말이 찝찝하기 그지없었다. 일단 작중 주인공 중 삼남매 중 첫째인 노민형은 자식 때문에 남편과 이혼하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지극히 현실적인 선택이었지만 남편이란 작자가 입만 번지르르하지 실상은 아주 꽉 막힌 인물인 터라 언제 언제 갈등이 터지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고 낙태죄 폐지가 되지 않았더라면 이혼은 기정사실이었기에 그 이혼이 불발된 게 내심 불만이었다. 정작 민형은 물론이고 민형의 남편은 자신이 아내에게 상처를 줬으리라고 자각도 못했을 가능성이 커 이 부부에게 드리운 그림자는 어둡기 그지없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부부가 자식 때문에 마지못해 이혼하지 않는다면 아직 자녀가 없는 둘째 노민아는 결단을 내린다. 노민아는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호감이 간 인물인데 자식을 키울 자신이 없어 낙태를 고려하는 모습이 아주 바람직해 그녀가 무슨 선택을 하든 응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 가정폭력을 다룬 만화 <단지>을 읽어서 그런가 준비가 안 된 부모가 아이가 생겼다는 이유로 낳아 키우는 건 그야말로 무책임함의 극치임을 제대로 깨달아 특히 공감했던 것 같다. 그밖에도 결혼 생활엔 꼭 자녀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니고 자식의 성을 꼭 아버지의 성으로 해야 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등 내가 평소에 의문을 갖던 부분에 대해 아주 시원스런 태도와 철학을 갖고 있어 그녀가 어쩌다 그런 한심한 남자와 결혼까지 했는지 의심이 들기까지 했다. 

 내가 결혼을 하지 않아서 그런 걸까,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의 성씨를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어 하는 남자들의 마음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와 닿지 않았다. 물론 나와 같은 성을 가진 사람을 보면 약간이라도 더 반가운 마음이 들기야 하지만 그래봤자 성이란 건 글씨에 불과하고 아이도 혼자 만들어서 키우는 게 아니니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처럼 부모의 성 둘 다 넣어야 하는 게 - 정말 여담이지만 스페인/포르투갈 위인 중 우리도 알 만한 인물 몇 명은 모계 성씨를 쓰고 있다. 벨라스케스, 피카소, 페소아... - 도의적으로나 합리적으로나 더 옳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작중 세계관에 따르면 낙태를 하면 여자가 죄인이고 남자는 아닌데, 여자가 힘들게 출산해도 (남자 입장에서) 성씨를 주는 영광을 남자만 갖고 있다는 것도 확실히 이상하고 불합리하긴 하다. 학교에 가면 자식이 손가락질을 당하면 안 된다는 이유로 아빠 성을 주는 가정이 적지 않다는데, 차라리 그런 이유라면 딱하게도 납득은 가지만 작중 남성들이 말한 것처럼 '남자는 자기 자식이 당연히 자기 성을 물려받을 것이라 생각하며 살아왔으니 이 부분은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는 여자들이 양보해라' 라는 논리는 남자인 내가 들어도 헛웃음이 다 나왔다. 부디 모든 남자가 다 저렇게 생각한다고 여성분들은 생각하지 말아주시길. 같이 남자로 엮이기도 싫은 논리니까. 

 이 작품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들에 질문을 던진다는 점이었다. 그에 대한 작가의 대안이나 주장엔 논란의 여지가 있을지언정 이와 같은 질문은 퍽 중요했다. 그리고 낙태죄 찬성론자가 낙태에 죄를 부여하는 근거로 도덕성을 들먹이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그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로 하나는 국가의 출산율과 도덕성인데, 내 생각에 출산율은 어느 정도 일리는 있지만 태아 살해니 도덕성이니 하는 건 말 그대로 전근대적이라 때때로 들어주기 민망할 정도였다. 출산율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국민의 수가 많은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건강한 국민이 많은 게 중요할 텐데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이 덜컥 임신했을 때 보호해주긴커녕 양자택일의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은 전형적으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태도다. 그렇게 낳은 아이가 퍽이나 잘 자라겠다. 차라리 지구온난화나 환경 보호 운동과 같은 맥락으로 출산율 장려와 그에 관한 혜택을 강조하는 쪽으로 진행시키면 또 모를까, 덮어놓고 낙태한 여자들을 감옥으로 보내는 작품의 설정은 황당하면서도 생각할 거리를 낳았다. 과연 우리네 현실은 이 만화 속 세계와 다르면 얼마나 다르단 말인가. 


 하지만 셋째 노민태와 여자친구 나샛별의 에피소드는 다소 미묘했다. 이 두 커플의 에피소드는 현재진행형으로, 낙태죄가 합법화됐을 때 하필 덜컥 임신한 샛별이가 우여곡절 끝에 낙태를 결심하고 그 과정에서 남자친구 민태에 실망하고 헤어지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상황이 하도 절망적인 나머지 샛별이는 누구도 돌을 던지기 힘든 피해자로 이 작품에 내내 등장하는데, 난 이런 연출엔 다소 동의하기 힘들었다. 얘길 들어보니까 억지로 성관계한 끝에 생긴 아이도 아니고 또 민태가 남자가 보기에도 멋대가리가 없는 남자긴 하지만 둘이 똑같이 수술비를 냈음에도 막상 수술에 들어가자 태아는 사망한 지 오래라 낙태죄가 적용도 안 되고 수술비도 적게 든다는 걸 안 샛별이가 민태가 낸 수술비를 돌려주지 않은 것은 엄연한 사기가 아닌가 싶었다. 

 뿐만 아니라 과정이 얼마나 실망스러웠든 캐나다 유학을 포기하고서 낸 민태 몫의 400만 원을 샛별이가 고스란히 자신의 캐나다 유학에 써버리는 것엔 정말 기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본인은 이 모든 일에 있어서 그저 피해자라 여겼고 남자친구 돈은 자길 임신시켰다는 괘씸죄 때문에 꿀꺽한 건가? 임신의 원인이 된 성관계가 어떤 경위에서 벌어졌고 샛별이의 의지가 얼마나 개입됐는지는 작중에서 그려지지 않아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낙태가 여성의 권리이자 자유라면 임신은 곧 책임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어쩌다 보니 저렇게 사기를 친 꼴이 된 샛별이의 선택이나 태도는 이 작품에 있어 엄청난 옥의 티가 아닐 수 없었다. 내가 남자라 그런 건지 어쩌면 샛별이에겐 영원히 감정을 이입하지 못할 것 같다. 


 끝으로 샛별이가 아나운서가 된 모습이 에필로그에 나올 때 단발인 것도 너무 전형적인 클리셰라 코웃음이 나왔던 것도 얘기해야겠다. 탈코르셋과 단발, 화장하지 않는 것의 의의와 무관하게 그냥 너무나도 보여주기식인 것 같아서 말이다. 그렇게라도 이 작품이 페미니즘 작품임을 공고히 하는 게 그렇게도 중요한가? 몇몇 의문점과 석연찮은 옥의 티에도 불구하고 <곤>은 좋은 작품이지만, 작가 후기나 노골적인 페미니즘 색채는 오히려 사족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 페미니즘 색채야 작가의 표현의 자유니까 문제 삼을 순 없지만 작가 후기는 이 작품이 더 좋은 작품이 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변명 같은 느낌이라 좀 더 간결하게 썼어야 했다고 본다. 가령, '돌봄의 담당하는 여성이 떠난 세계'라는 의미로 지은 작품의 제목 곤GONE은 시놉시스로 접했을 땐 아주 매력적이지만 작품에는 반영도 되기 전에 결말이 나버렸기에 차라리 안 읽었으면 독자 나름대로 이리 뜯고 저리 뜯으며 음미하는 재미가 있었을 텐데, 그 점이 반감되는 등 여러모로 득보단 실이 많았다. 

 하긴, 이렇게 사회적인 메시지가 강한 작품일수록 독자 마음대로 이야길 음미하는 꼴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법이지만, 작가도 이미 알고 있겠으나 메시지가 강한 사람은 그 메시지가 강한 만큼 환대 못지않게 반발도 세다. 그리고 작가는 자신의 메시지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꽤 성공적으로 녹여내 이 작품으로 인해 받을 비판 또한 묵묵히 감내해야 할 것이다. <며느라기>는 이런 아쉬움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작품이었는데... 아무튼 <곤>은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드는 한편, 왠지 이 작품보다 더 못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들게 하는 복잡한 작품인데, 부디 내 걱정따윈 기우에 불과한 멋진 작품을 그려주길 바란다. <곤>의 후속작도 나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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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 8세부터 88세까지 읽는 동화
루이스 세뿔베다 지음, 유왕무 옮김, 이억배 그림 지음, 이억배 그림, 유왕무 옮김 / 바다출판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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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여느 동화답게 글씨도 크고 그림도 많아서 각을 잡고 읽으면 한 시간 이내로 끝낼 수 있는 얇은 분량의 작품이지만 그 이야기의 깊이마저 얇진 않다. 출판사에서 '8세부터 88세까지 읽는 동화' 시리즈에 이 작품을 첫 번째로 선정했던데, 모르긴 몰라도 부모들이 읽으면 훨씬 더 좋을 작품이라 생각했다. 특히 자녀를 자신의 소유물이거나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대신 이뤄줄 자신의 복제품으로 여기는 부모에게 이 동화가 좀 더 각별하게 읽힐 듯하다. 

 물론 소설을 읽고서 사람의 가치관이 바뀌리라고 여길 만큼 세상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일례로 내 부모님 세대는 <죽은 시인의 사회>를 청년 시절에 본 세대지만 그 자식 세대인 내 또래들이 대학 입시로부터 자유로웠던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허나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미래에 부모가 될 예정이지만 좋은 부모가 어떤 존재인지 잘 모르겠거나 경험해본 적이 없는 젊은 독자들에게 좋은 부모의 모습을 배울 수 있는 작품이라고. 아, 그렇게 생각하니 '8세부터 88세까지 읽는 동화'라는 출판사의 홍보 문구가 마냥 과장된 말로 여겨지지 않는다. 


 폐유로 뒤덮인 바닷물에 온몸이 오염된 갈매기는 항구까지 필사적으로 날아가 항구의 고양이 소르바스 앞에서 숨진다. 갈매기는 소르바스에게 세 가지 부탁을 하는데 자신이 낳을 알을 잘 간직해주고 알에서 새끼가 부화했을 때 먹지 말고 그 새끼에게 하늘을 나는 법을 가르쳐달라는 것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별로 어렵지 않지만 세 번째 가히 미션 임파서블에 가까운 지라 소르바스는 다른 항구 고양이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렇게 각각 개성 하난 끝내주는 항구 고양이들이 머릴 맞대 새끼 갈매기 아포르뚜나다를 쥐나 다른 굶주린 고양이로부터 지켜주고 하늘을 나는 법을 가르쳐주기에 이른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특히 아포르뚜나다가 고양이에게 길러진 탓인지 비행에 대한 의지가 결여돼 그 의지를 심어주는 것부터 은근히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소르바스가 아포르뚜나다에게 한 말이 있는데, 바로 내가 인상 깊은 구절로 인용한 바로 그 문장이다. 이 문장은 여러 독자들이 이 작품의 명언으로 많이 꼽는 문장으로 부모와 다른 운명을 가진 자식의 길을 전폭적으로 밀어주고, 설령 자식이 불안과 불신으로 가득찬 상황에서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따뜻한 말이 일품이다. 내 개인적으론 서로 다른 존재들끼리 애정을 가진다는 것은 어렵지만 그것이 가능해질 때 얼마나 아름다워지는지 설파한 구절은 몇 번을 읽어도 감동적이다. 앞뒤 맥락 없이 읽어도 작품의 분위기가 전달될 만큼 좋은 문장인데,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겪는 갈등이 남과 다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임을 생각하면 타인을 비난하기 전에 이 문장을 곱씹는 것도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꽤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꼭 소르바스처럼 상대에 대한 애정을 갖지 않더라도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고 어느 정도 지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 이 세상이 보다 따뜻해지리란 상상이 마구 솟아오른다. 


 아쉽게도 이 작품의 저자 루이스 세풀베다가 2020년에 코로나로 인해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별세했다고 한다. 살아생전 많은 작품을 냈고 다행히 국내에도 몇 작품 출간돼서 그 작품들을 찾아볼 생각인데, 평생에 걸쳐 소설 집필을 비롯해 인권과 관련된 운동을 많이 했던 작가가 코로나에 의해 명을 달리 했다니까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도쿄에 있던 내 친구가 초창기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할 때 감염돼 미각을 잃었다는 얘길 들었을 때도 느낀 거지만 - 다행히 지금은 70% 회복됐다고 한다. - 코로나라는 게 진짜 얕봐선 안 되는 거구나 하는 경각심이 생겼다. 게다가 코로나가 자연적인 질병이 아닌 어떤 인위적인 요소가 개입됐다는 의혹도 강하게 받는데 인간이 환경을 비롯한 지구를 파괴하는 것에 대해 경계한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가 바로 그 코로나에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 참 야속한 일이라 느껴졌다. 더 살아있었다면 코로나로 황폐화된 세상에 대한 생각을 집필 활동에 옮겼을지도 모르는데... 애석하다는 말 외엔 할 말이 없다. 



 p.s 여담이지만 이억배라는 동화 작가의 그림도 만만찮게 좋았던 그림이다. 작품 분위기랑 어울리고 전반적으로 따뜻하고 개성적인 화풍이라 작품의 내용을 더 몰입도 높게 감상이 가능했다. 이분의 다른 작품도 읽고 싶어졌다. 

그러나 너는 우리와는 달라. 하지만 네가 우리와 다르다는 사실이 우리를 기쁘게도 하지. (중략)

우린 우리와는 다른 존재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아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지. 우리와 같은 존재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한다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야. 하지만 다른 존재를 사랑하고 인정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 그런데 너는 그것을 깨닫게 했어. 너는 갈매기야. 그러니 갈매기들의 운명을 따라야지. 너는 하늘을 날아야 해. 아포르뚜나다, 네가 날 수 있을 때, 너는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네가 우리에게 가지는 감정과 우리가 네게 가지는 애정이 더욱 깊고 아름다워질 거란다. 그것이 서로 다른 존재들끼리의 진정한 애정이지. - 117~11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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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2
단지 글.그림 / 레진코믹스(레진엔터테인먼트)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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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9.8 






 이 작품의 제목이자 작가의 필명이기도 한 '단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뜻의 부사가 아닌 단지斷指, 잘려나간 손가락이란 뜻이란다. 단행본에서는 이 필명의 유래가 나오지 않았는데, '부모에게 아프지 않은 손가락은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나는 단지, 잘려나간 손가락'이란 뜻에서 지었다고 한다. 작품의 제목과 필명이 같다는 데서 이 작품이 작가의 일상을 담은 작품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정도로 현재진행형으로 - 지금이야 작가 입장에선 다 끝난 일이지만 연재 시점에선 현재진행형이었음이 느껴졌다. - 자신의 일상을 담아낸 작품이 또 있을까 싶다. 그야말로 연재물이기에 그릴 수 있던 몰입감이 십분 발휘된 작품이었다. 

 살면서 부모와 다투지 않았거나 반목하지 않은 사람이 어딨겠냐만 '남들도 그러니까' 자신이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를 외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혹은 누군가 자신이 이렇게 아프다고 말하면 '난 너보다 더 아픈데 잘 극복했다. 그런데 넌 왜 그러냐? 한심하다.'고 대놓고 말하지 않아도 속으로 멸시하는 사람도 많다. 이 작품 <단지>는 간단히 소개하자면 작가가 자신의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를 참다 못해 토로한 일기장이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받을 비판과 악플을 충분히 예상했으면서도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터져 나온 결과물인 것이다. 결과는 작가처럼 어디 한 곳 기댈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단지>는 최고의 공감의 장이 됐다. 그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오늘의 우리만화상까지 받았다는 건 다른 건 몰라도 작가의 상처가 작가가 이상해서 얻은 상처가 아니라는 뜻이다. 


 꼭 위태롭거나 절박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 번쯤 부모와 갈등이 있을 것이기에 이 작품은 거의 남녀노소에게 어필될 만한 작품이리라 생각된다. 시기를 보니 이 작품을 시작으로 이후 네이버 웹툰에서도 작가가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는 비슷한 작품이 많이 연재됐지만 <단지>가 가장 으뜸이었다. 일단 자기연민에 그치지 않고 자신을 정서적으로 학대를 가한 부모를 절대악으로 여기지 않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봤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대에겐 화해고 자시고 대화란 걸 할 의지가 없어서 자식 쪽에서 의절을 하겠다는, 어찌 보면 희대의 불효일 수 있는 행위가 매우 큰 정당성과 공감을 형성했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내가 네이버에서 본 <단지>와 비슷한 컨셉의 연재 만화들은 짙은 페미니즘 성향과 끝없는 자기연민과 공감 호소에 그치고 있을 뿐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과 무척 대조적이었다. 

 작품의 연재 시기를 보니 한창 페미니즘이 크게 대두될 즈음이라 이 작품을 페미니즘 작품으로 인식할 수도 있겠던데 그렇 인식하기엔 엄연히 결이 다르다. 작중에서 작가가 당하는 가정폭력의 요인으로 남아선호사상이 크게 다뤄지긴 하지만 그게 전부라는 느낌은 아니고, 작가가 독자의 사연을 받아서 그리는 2부에선 남자 독자의 이야기도 나와 가정폭력이란 특정 성별을 대상으로만 벌어지는 비극이 아님을 강조한다. 말이 나온 김에, 페미니즘이 비난을 받고 외면을 받는 이유 중 하나로 페미니스트들이 페미니즘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편가르기를 매우 자연스럽게 저지르는 우를 범하는 것을 들 수 있을 텐데 <단지>에선 그런 식의 극단성이나 감정적으로 격해지는 대목이 생각보다 굉장히 적어 작품의 내용이 한없이 우울한 것과 별개로 읽히기는 수월하게 읽혔다. 


 읽는 내내 내가 살아오면서 받은 고통은 다 약과였구나, 혹은 작가가 너무 호구라서 가족들이 더 호구로 대하는 게 아닌가 하는 감정이 엎치락뒤치락했다. 전자의 경우, 저자도 자신보다 더 심한 학대를 당한 사람의 이야길 접하면서 자괴감을 느끼다가도 결국 상처의 본질이 같음을 깨닫고, 또 학대가 흔하다는 이유로 학대의 아픔도 옅어지지 않음을 역설하는 장면이 있다. 그 대목에서 독자인 나는 자신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남과 비교해 그 깊이를 축소하지 말자며 묘한 힐링을 받았다. 

 한편 후자의 경우엔 내가 작가만큼 악랄하게 시달린 적이 없어서 그랬는지 경제적으로 분명 독립했음에도 오빠와 엄마한테 호구로 취급당할 짓을 계속하는 모습에 연민보다 답답함이 앞섰다. 관계가 나아지리란 희망도 딱히 없으면서 그래도 좋은 관계는 유지하고픈 작가의 어정쩡한 태도가 상대에게 가 닿을 리 없잖은가. 그래서 그렇게 이대로 계속 휘둘리며 살 것 같았지만 작가는 자신의 필명대로 관계를 먼저 끊어낸다. 사실, 이 전개는 매우 신선하고 파격적이었다. 자기연민으로 끝나나 싶었는데 연을 끊다니, 그것도 연재 당시 기준으론 그 과정을 실시간으로 그리다니...... 


 개인적으로 부모자식 사이가 아니더라도 모름지기 관계라는 것은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한 쪽이 마냥 일방적으로 잘하고 잘못하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때문에 내심 이 작가는 지금까지 호구로 지내온 것은 부모가 호구로 대한 것과 천성이 호구인 것이 결합된 현상이라 얕잡아봤었는데, 아무래도 얕잡게 여겨져야 할 것은 작가가 아닌 바로 내가 아닌가 싶다. 작가는 호구가 아니라 단지 진정성 있게 가족과 소통하려고 했던 사람이었는데, 단지 호구 같고 답답하다는 이유로 작가의 대단함을 마지막 순간까지 미처 못 알아본 게 민망하고 작가에게 죄송할 따름이었다. 

 <단지>는 총 2부로 나뉘어졌는데 1부는 단행본 2권 중반까지, 2부는 2권 후반을 장식한다. 2부는 작가와 비슷한 상처를 가진 독자들의 사연을 바탕으로 한 일종의 외전으로 외전이다 보니 처음엔 흥미가 반감됐지만 읽다 보니 두 가지 때문에 다시 빠져들며 읽게 됐다. 하나는 가정폭력의 양상이 이토록 다양하다는 데서 오는 참담함 - 어쩔 수 없게도 내가 이 사람보다 낫다는 안도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 과 다른 하나는 그 사연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작가의 스토리텔러로서의 솜씨였다. 자기 얘기를 하는 데에만 능한 작가가 아니란 걸 느낄 수 있었고 때문에 작가의 다른 작품도 기대됐다. <방탕일기>라는 작품이 카카오웹툰에서 연재됐다던데 그 작품도 봐야겠다. 원래 네이버 이외의 플랫폼에서 웹툰을 보려고 하지 않는데 -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봐야 될 작품이 겉잡을 수 없이 많아지니까. - 이 작가라면 예외다. 


 끝으로 1부의 마무리에서 이 작품의 단행본을 작가가 자신의 의절한 친모한테 택배를 보내는 장면이 있는데, 그 이후엔 어떻게 됐을지 궁금하다. 그 아줌마 성격상 우리가 기대하는 극적이고 바람직한 변화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지만, 만화라는 장르의 특성상, 게다가 단행본으로 나오기까지 했으니 충격도가 어마어마할 텐데 그냥 의절한 채로 넘어갔을지 어땠을지 궁금하다. 작가 입장에선 그래도 자기 시선에서 유리하게 그려졌음을 인지한 것 같지만 당사자는 너무 불합리하게 여길 수도 있는 노릇이고... 이 작가는 너무 잘 풀렸지만 사람들이 대체로 자신이 겪은 실화를 작품화하는 걸 기피하는 것은 다 저런 논란과 분란을 피하기 위해서인데, 단지 작가는 부디 이대로 아무 탈 없이 승승장구하시길 한 사람의 독자로서 정말 바라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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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내리는 산장의 살인
구라치 준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9.3 







 실로 전형적인 추리소설인 것 같으면서도 깜찍한 트릭을 선사하는 구라치 준의 장편소설을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작품의 트릭도 트릭이지만 역자의 후기도 기억에 남았는데, '냉장고가 빌 때까지 일을 하지 않는 작가'라니까 역자가 '냉장고가 어서 비길 바라며' 라고 후기를 남긴 게 일품이었다. 10년 전에 이 소설을 다 읽고서 포스팅을 남길 당시 나도 그에 지지 않고자 '작가의 냉장고를 내가 털어서라도 글을 쓰게 하고 싶다'고 농을 던진 게 기억이 나는데, 이후 국내에 출간된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역시 <별 내리는 산장의 살인>이 흔치 않은 수작임을 느낄 수 있었고 10년 만에 다시 읽은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이번엔 냉장고를 털어야겠다는 생각까진 안 들었지만. 

 아무래도 반전의 놀라움이나 트릭의 참신함 - 적어도 내 기준에선 지금 읽어도 참신하고 기발했다. - 등의 추리소설적인 요소를 제외하면 교훈이나 이야기 연출 방식이 두 번째 읽을 때도 재밌기엔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기에 지난 번보다 점수를 박하게 줄 수밖에 없었다. 몇몇 캐릭터들이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골때린다는 걸 제외하면 이야기에 몰입할 만한 매력적인 요소도 조금 부족하고 각 장마다 앞에 첨부되는 작가의 '거짓말은 하지 않는' 멘트만이 그나마 궁금증을 자아내 작가가 바랐던 대로 완독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물론 단지 아이디어만으로 승부를 보는 작품은 결코 아니거니와 독자의 관심도가 떨어질 만한 논리적인 추리도 게을리 하지 않는 등 추리소설의 소임을 다하는 만큼 요번에도 머리 굴리며 읽는 재미는 여전했다. 책 첫장에는 이 작품에 대한 검은숲 출판사의 자체적인 평가가 실렸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논리정연함'이 5점 만점에 6점을 부여했는데 그 점수가 과대평가로 여겨지지 않는다. 적어도 90년대에 집필된 소설이란 점을 감안하면 특정 과학 기술에 대한 묘사도 나쁘지 않았다고 본다. 


 구라치 준의 작품은 이후에도 <지나가는 녹색 바람>,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이 국내에 출간됐는데 모두 <별 내리는 산장의 살인>에 미치지 못했다. 엄연히 이 작가가 제1회 본격미스터리대상을 수상한 작가인 만큼 수상작인 <항아리 속의 천국>이란 작품이 출간되길 기다렸지만 10년 동안 애먼 작품만 출간됐다. 본격미스터리대상 수상작들이 우리나라에서 꽤나 반응이 좋았던 걸 생각하면 - 대표적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X의 헌신>, 우타노 쇼고의 <벚꽂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와 <밀실살인게인2.0>을 꼽을 수 있겠다. - 아직까지 출간이 안 된 게 이상한데... 뭔가 사정이 있겠지만 아무튼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긴 해도 기대할 수밖에 없다. 이후 몇 번 실망하긴 했어도 <별 내리는 산장의 살인>은 구라치 준이라는 이름을 기대하게 만들어주는 작품이었으니까 말이다. 

 트릭이나 캐릭터, 클로즈드 써클을 제외한다면 작품을 풍성하게 만드는 작가의 잡지식과 작가가 자극을 준 쓰즈키 미치오의 <일흔다섯 마리의 까마귀>, 그리고 사회생활할 때 욱하면 진짜 큰코 다칠 수 있다는 교훈 아닌 교훈도 꽤나 기억에 남는다. 이 작품에서 쓸데없이 방대했던 UFO에 대한 어떤 캐릭터의 연설은 그 부분만 따로 떼서 읽으면 되게 흥미로웠고, 이 작품에 어느 정도 아이디어를 제공했다는 <일흔다섯 마리의 까마귀>는 왠지 출간 가능성이 극히 적어보여 더 궁금하고, 주인공 스기시타가 감정 조절을 못해서 좌천당하면서 무슨 꼴을 당하느냐가 작중에서 꽤 깊이 있게 다뤄진 만큼 한 번 더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아까 이 작품이 교훈을 주는 이야기로선 한계가 있다는 식으로 얘기했지만 적어도 '욱하지 말자, ㅈ되기 싫으면.' 이란 누구나 알지만 실천하기 힘든 교훈을 이 작품이 꽤나 잘 다뤘다는 건 부정하기 힘들다. 스기시타가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지,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그대로 지옥에 꼼짝없이 빠지고도 남았을 테니... 정말이지 교훈이라면 이만한 교훈도 없을 듯하다. 


 두서 없이 여러 좋았던 요소를 나열했지만, 끝으로 이 소설이 그래도 결국 기본이 탄탄했기에 뒷맛이 아주 좋았음을 강조하도록 하겠다. 아무리 기발한 트릭과 소재가 있어도 기본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의 경우 트릭은 기발해도 소재는 극히 평범했지만 막연하게 기대를 주는 방식과 더불어 교과서적이면서 확실하게 재미를 보장하는 동시에 허점이 없는 만듦새를 선보여 후반부의 몇몇 뜬금없는 전개나 설정이 대단히 극적으로 비춰져 전반적으로 만족하며 책장을 덮게 됐다. 

 워낙에 깔끔하게 마무리를 지어 허전한 감도 있지만, 나는 왠지 모르겠으나 한 편으로 확실하게 끝을 맺는 추리소설이 오히려 더 만족스러운 경우가 많았고 이 작품이 그에 정확히 부합해 왜 내가 이 작품을 두 번 읽기로 10년 전에 생각했었는지 이해가 됐다. 간혹 다시 읽으면 왜 다시 읽기로 했었는지 납득이 안 가는 경우도 있는데 이 작품은 그렇지 않아 아주 반가웠다. 



 p.s 인상 깊은 구절은 다시 읽어도 가슴에 찔리는 명언이다. '실현되지 못한 타인의 꿈은 처음부터 없던 것이나 마찬가지'라니,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다. 

게다가 실현되지 못한 타인의 꿈은 처음부터 없던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 46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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