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곤 gone 2 - 완결
수신지 지음, 윤정원 외 감수 / 귤프레스 / 2020년 12월
평점 :
9.4
낙태를 소재로 한 만화 <곤>은 <며느라기>로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수상한 수신지 작가의 작품이다. <며느라기>에서 호평을 받았던 요소들, 이를 테면 귀여운 그림체와 대비되는 서늘한 비판은 이 작품에서도 건재했는데 차이가 있다면 소재가 소재라 그런지 보다 명확히 비판적인 주제의식을 갖고서 연재에 임한 것이었다. 1권에 수록된 작가 노트를 보면 상당한 연구 끝에 연재에 들어간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아쉽게도 기획했던 모든 요소가 완벽히 녹아들진 않았으나 낙태를 죄로 몰아가는 개념이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불합리하단 걸 역설해냈다는 점에서 완전히 대성공을 거둔 작품이었다.
흡사 유명 고전 SF 소설 <시녀 이야기>의 프리퀄로 쳐도 무방할 정도의 작품으로 출산을 신성시한 나머지 막장으로 치닫는 국가의 모습을 작가는 유감없이 그려낸다. 막장인 점이 어디 한둘은 아니지만 가장 압권이었던 것은 과거에 낙태를 한 여성도 색출해 죄를 묻는다는 것이었다. 이는 만약 여성 징병제를 하게 되면 실질적으로 어느 연령대의 여성까지 징집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 하는 질문과 유사해 법의 형평성을 달성시킨다는 게 정말 미치도록 어려운 일이란 걸, 그렇기에 작중 세계관이 얼마나 막장인지 남성 독자인 나에게도 전혀 어렵지 않게 와 닿았다. 페미니스트들이 제기하는 문제가 적절한 예시가 동반되지 못하면 때론 지독히도 와 닿지 않은 걸 생각하면 작중 세계관의 막장스러움을 드러내는 장치치고도 너무 무리수였던 '과거의 낙태 여성 색출'이란 전개가 극단적일지언정 여러모로 필수불가결한 전개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국민 수준에 맞는 정부와 정책이 나오기 마련이라니까 마냥 허무맹랑한 전개도 아니었고 말이다.
일본 작가 가키야 미우의 소설 <70세 사망법안, 가결>과 유사점이 많은 작품이었는데 정부가 이 정도로 막장 정책을 펼치게 된 계기나 물러나는 원인엔 설명과 설정이 부족하거나 썰렁했던 것, 그리고 소재의 스케일에 비해 그 제도로 인해 피해를 입는 한 가족을 비추는 등 디테일한 묘사에 집중했다는 것이 특히 비슷했다. 전자의 요소는 나름대로 독자로 하여금 더욱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로써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후자는 독자마다 호불호가 갈리지 않을까 싶은데 나는 개인적으로 아주 좋았다. 일찍이 이 작가가 미묘한 가족 갈등의 점화나 폭발을 <며느라기>에서 성공적으로 선보인 바가 있는데 이 작품은 등장인물들이 훨씬 많은 탓에 인물 묘사가 그 작품보다 상대적으로 단편적이긴 해도 기본 성격 자체가 답답하지가 않아 좋게 말해 아주 사이다였지만, 반대로 매사에 공격적으로 진행돼 가독성이 좋은 것에 비해 읽기 불편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대부분의 여성들을 하루 아침에 범죄자로 몰아가는 작중 세계관 때문에 갈등이 폭발하거나 공격적인 언사가 오가는 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는데 주요 인물들 사이의 갈등 몇 개가 석연찮게 봉합돼서 나름 해피엔딩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의 결말이 찝찝하기 그지없었다. 일단 작중 주인공 중 삼남매 중 첫째인 노민형은 자식 때문에 남편과 이혼하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지극히 현실적인 선택이었지만 남편이란 작자가 입만 번지르르하지 실상은 아주 꽉 막힌 인물인 터라 언제 언제 갈등이 터지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고 낙태죄 폐지가 되지 않았더라면 이혼은 기정사실이었기에 그 이혼이 불발된 게 내심 불만이었다. 정작 민형은 물론이고 민형의 남편은 자신이 아내에게 상처를 줬으리라고 자각도 못했을 가능성이 커 이 부부에게 드리운 그림자는 어둡기 그지없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부부가 자식 때문에 마지못해 이혼하지 않는다면 아직 자녀가 없는 둘째 노민아는 결단을 내린다. 노민아는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호감이 간 인물인데 자식을 키울 자신이 없어 낙태를 고려하는 모습이 아주 바람직해 그녀가 무슨 선택을 하든 응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 가정폭력을 다룬 만화 <단지>을 읽어서 그런가 준비가 안 된 부모가 아이가 생겼다는 이유로 낳아 키우는 건 그야말로 무책임함의 극치임을 제대로 깨달아 특히 공감했던 것 같다. 그밖에도 결혼 생활엔 꼭 자녀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니고 자식의 성을 꼭 아버지의 성으로 해야 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등 내가 평소에 의문을 갖던 부분에 대해 아주 시원스런 태도와 철학을 갖고 있어 그녀가 어쩌다 그런 한심한 남자와 결혼까지 했는지 의심이 들기까지 했다.
내가 결혼을 하지 않아서 그런 걸까,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의 성씨를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어 하는 남자들의 마음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와 닿지 않았다. 물론 나와 같은 성을 가진 사람을 보면 약간이라도 더 반가운 마음이 들기야 하지만 그래봤자 성이란 건 글씨에 불과하고 아이도 혼자 만들어서 키우는 게 아니니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처럼 부모의 성 둘 다 넣어야 하는 게 - 정말 여담이지만 스페인/포르투갈 위인 중 우리도 알 만한 인물 몇 명은 모계 성씨를 쓰고 있다. 벨라스케스, 피카소, 페소아... - 도의적으로나 합리적으로나 더 옳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작중 세계관에 따르면 낙태를 하면 여자가 죄인이고 남자는 아닌데, 여자가 힘들게 출산해도 (남자 입장에서) 성씨를 주는 영광을 남자만 갖고 있다는 것도 확실히 이상하고 불합리하긴 하다. 학교에 가면 자식이 손가락질을 당하면 안 된다는 이유로 아빠 성을 주는 가정이 적지 않다는데, 차라리 그런 이유라면 딱하게도 납득은 가지만 작중 남성들이 말한 것처럼 '남자는 자기 자식이 당연히 자기 성을 물려받을 것이라 생각하며 살아왔으니 이 부분은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는 여자들이 양보해라' 라는 논리는 남자인 내가 들어도 헛웃음이 다 나왔다. 부디 모든 남자가 다 저렇게 생각한다고 여성분들은 생각하지 말아주시길. 같이 남자로 엮이기도 싫은 논리니까.
이 작품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들에 질문을 던진다는 점이었다. 그에 대한 작가의 대안이나 주장엔 논란의 여지가 있을지언정 이와 같은 질문은 퍽 중요했다. 그리고 낙태죄 찬성론자가 낙태에 죄를 부여하는 근거로 도덕성을 들먹이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그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로 하나는 국가의 출산율과 도덕성인데, 내 생각에 출산율은 어느 정도 일리는 있지만 태아 살해니 도덕성이니 하는 건 말 그대로 전근대적이라 때때로 들어주기 민망할 정도였다. 출산율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국민의 수가 많은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건강한 국민이 많은 게 중요할 텐데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이 덜컥 임신했을 때 보호해주긴커녕 양자택일의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은 전형적으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태도다. 그렇게 낳은 아이가 퍽이나 잘 자라겠다. 차라리 지구온난화나 환경 보호 운동과 같은 맥락으로 출산율 장려와 그에 관한 혜택을 강조하는 쪽으로 진행시키면 또 모를까, 덮어놓고 낙태한 여자들을 감옥으로 보내는 작품의 설정은 황당하면서도 생각할 거리를 낳았다. 과연 우리네 현실은 이 만화 속 세계와 다르면 얼마나 다르단 말인가.
하지만 셋째 노민태와 여자친구 나샛별의 에피소드는 다소 미묘했다. 이 두 커플의 에피소드는 현재진행형으로, 낙태죄가 합법화됐을 때 하필 덜컥 임신한 샛별이가 우여곡절 끝에 낙태를 결심하고 그 과정에서 남자친구 민태에 실망하고 헤어지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상황이 하도 절망적인 나머지 샛별이는 누구도 돌을 던지기 힘든 피해자로 이 작품에 내내 등장하는데, 난 이런 연출엔 다소 동의하기 힘들었다. 얘길 들어보니까 억지로 성관계한 끝에 생긴 아이도 아니고 또 민태가 남자가 보기에도 멋대가리가 없는 남자긴 하지만 둘이 똑같이 수술비를 냈음에도 막상 수술에 들어가자 태아는 사망한 지 오래라 낙태죄가 적용도 안 되고 수술비도 적게 든다는 걸 안 샛별이가 민태가 낸 수술비를 돌려주지 않은 것은 엄연한 사기가 아닌가 싶었다.
뿐만 아니라 과정이 얼마나 실망스러웠든 캐나다 유학을 포기하고서 낸 민태 몫의 400만 원을 샛별이가 고스란히 자신의 캐나다 유학에 써버리는 것엔 정말 기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본인은 이 모든 일에 있어서 그저 피해자라 여겼고 남자친구 돈은 자길 임신시켰다는 괘씸죄 때문에 꿀꺽한 건가? 임신의 원인이 된 성관계가 어떤 경위에서 벌어졌고 샛별이의 의지가 얼마나 개입됐는지는 작중에서 그려지지 않아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낙태가 여성의 권리이자 자유라면 임신은 곧 책임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어쩌다 보니 저렇게 사기를 친 꼴이 된 샛별이의 선택이나 태도는 이 작품에 있어 엄청난 옥의 티가 아닐 수 없었다. 내가 남자라 그런 건지 어쩌면 샛별이에겐 영원히 감정을 이입하지 못할 것 같다.
끝으로 샛별이가 아나운서가 된 모습이 에필로그에 나올 때 단발인 것도 너무 전형적인 클리셰라 코웃음이 나왔던 것도 얘기해야겠다. 탈코르셋과 단발, 화장하지 않는 것의 의의와 무관하게 그냥 너무나도 보여주기식인 것 같아서 말이다. 그렇게라도 이 작품이 페미니즘 작품임을 공고히 하는 게 그렇게도 중요한가? 몇몇 의문점과 석연찮은 옥의 티에도 불구하고 <곤>은 좋은 작품이지만, 작가 후기나 노골적인 페미니즘 색채는 오히려 사족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 페미니즘 색채야 작가의 표현의 자유니까 문제 삼을 순 없지만 작가 후기는 이 작품이 더 좋은 작품이 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변명 같은 느낌이라 좀 더 간결하게 썼어야 했다고 본다. 가령, '돌봄의 담당하는 여성이 떠난 세계'라는 의미로 지은 작품의 제목 곤GONE은 시놉시스로 접했을 땐 아주 매력적이지만 작품에는 반영도 되기 전에 결말이 나버렸기에 차라리 안 읽었으면 독자 나름대로 이리 뜯고 저리 뜯으며 음미하는 재미가 있었을 텐데, 그 점이 반감되는 등 여러모로 득보단 실이 많았다.
하긴, 이렇게 사회적인 메시지가 강한 작품일수록 독자 마음대로 이야길 음미하는 꼴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법이지만, 작가도 이미 알고 있겠으나 메시지가 강한 사람은 그 메시지가 강한 만큼 환대 못지않게 반발도 세다. 그리고 작가는 자신의 메시지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꽤 성공적으로 녹여내 이 작품으로 인해 받을 비판 또한 묵묵히 감내해야 할 것이다. <며느라기>는 이런 아쉬움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작품이었는데... 아무튼 <곤>은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드는 한편, 왠지 이 작품보다 더 못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들게 하는 복잡한 작품인데, 부디 내 걱정따윈 기우에 불과한 멋진 작품을 그려주길 바란다. <곤>의 후속작도 나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