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2
단지 글.그림 / 레진코믹스(레진엔터테인먼트)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9.8 






 이 작품의 제목이자 작가의 필명이기도 한 '단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뜻의 부사가 아닌 단지斷指, 잘려나간 손가락이란 뜻이란다. 단행본에서는 이 필명의 유래가 나오지 않았는데, '부모에게 아프지 않은 손가락은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나는 단지, 잘려나간 손가락'이란 뜻에서 지었다고 한다. 작품의 제목과 필명이 같다는 데서 이 작품이 작가의 일상을 담은 작품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정도로 현재진행형으로 - 지금이야 작가 입장에선 다 끝난 일이지만 연재 시점에선 현재진행형이었음이 느껴졌다. - 자신의 일상을 담아낸 작품이 또 있을까 싶다. 그야말로 연재물이기에 그릴 수 있던 몰입감이 십분 발휘된 작품이었다. 

 살면서 부모와 다투지 않았거나 반목하지 않은 사람이 어딨겠냐만 '남들도 그러니까' 자신이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를 외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혹은 누군가 자신이 이렇게 아프다고 말하면 '난 너보다 더 아픈데 잘 극복했다. 그런데 넌 왜 그러냐? 한심하다.'고 대놓고 말하지 않아도 속으로 멸시하는 사람도 많다. 이 작품 <단지>는 간단히 소개하자면 작가가 자신의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를 참다 못해 토로한 일기장이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받을 비판과 악플을 충분히 예상했으면서도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터져 나온 결과물인 것이다. 결과는 작가처럼 어디 한 곳 기댈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단지>는 최고의 공감의 장이 됐다. 그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오늘의 우리만화상까지 받았다는 건 다른 건 몰라도 작가의 상처가 작가가 이상해서 얻은 상처가 아니라는 뜻이다. 


 꼭 위태롭거나 절박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 번쯤 부모와 갈등이 있을 것이기에 이 작품은 거의 남녀노소에게 어필될 만한 작품이리라 생각된다. 시기를 보니 이 작품을 시작으로 이후 네이버 웹툰에서도 작가가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는 비슷한 작품이 많이 연재됐지만 <단지>가 가장 으뜸이었다. 일단 자기연민에 그치지 않고 자신을 정서적으로 학대를 가한 부모를 절대악으로 여기지 않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봤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대에겐 화해고 자시고 대화란 걸 할 의지가 없어서 자식 쪽에서 의절을 하겠다는, 어찌 보면 희대의 불효일 수 있는 행위가 매우 큰 정당성과 공감을 형성했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내가 네이버에서 본 <단지>와 비슷한 컨셉의 연재 만화들은 짙은 페미니즘 성향과 끝없는 자기연민과 공감 호소에 그치고 있을 뿐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과 무척 대조적이었다. 

 작품의 연재 시기를 보니 한창 페미니즘이 크게 대두될 즈음이라 이 작품을 페미니즘 작품으로 인식할 수도 있겠던데 그렇 인식하기엔 엄연히 결이 다르다. 작중에서 작가가 당하는 가정폭력의 요인으로 남아선호사상이 크게 다뤄지긴 하지만 그게 전부라는 느낌은 아니고, 작가가 독자의 사연을 받아서 그리는 2부에선 남자 독자의 이야기도 나와 가정폭력이란 특정 성별을 대상으로만 벌어지는 비극이 아님을 강조한다. 말이 나온 김에, 페미니즘이 비난을 받고 외면을 받는 이유 중 하나로 페미니스트들이 페미니즘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편가르기를 매우 자연스럽게 저지르는 우를 범하는 것을 들 수 있을 텐데 <단지>에선 그런 식의 극단성이나 감정적으로 격해지는 대목이 생각보다 굉장히 적어 작품의 내용이 한없이 우울한 것과 별개로 읽히기는 수월하게 읽혔다. 


 읽는 내내 내가 살아오면서 받은 고통은 다 약과였구나, 혹은 작가가 너무 호구라서 가족들이 더 호구로 대하는 게 아닌가 하는 감정이 엎치락뒤치락했다. 전자의 경우, 저자도 자신보다 더 심한 학대를 당한 사람의 이야길 접하면서 자괴감을 느끼다가도 결국 상처의 본질이 같음을 깨닫고, 또 학대가 흔하다는 이유로 학대의 아픔도 옅어지지 않음을 역설하는 장면이 있다. 그 대목에서 독자인 나는 자신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남과 비교해 그 깊이를 축소하지 말자며 묘한 힐링을 받았다. 

 한편 후자의 경우엔 내가 작가만큼 악랄하게 시달린 적이 없어서 그랬는지 경제적으로 분명 독립했음에도 오빠와 엄마한테 호구로 취급당할 짓을 계속하는 모습에 연민보다 답답함이 앞섰다. 관계가 나아지리란 희망도 딱히 없으면서 그래도 좋은 관계는 유지하고픈 작가의 어정쩡한 태도가 상대에게 가 닿을 리 없잖은가. 그래서 그렇게 이대로 계속 휘둘리며 살 것 같았지만 작가는 자신의 필명대로 관계를 먼저 끊어낸다. 사실, 이 전개는 매우 신선하고 파격적이었다. 자기연민으로 끝나나 싶었는데 연을 끊다니, 그것도 연재 당시 기준으론 그 과정을 실시간으로 그리다니...... 


 개인적으로 부모자식 사이가 아니더라도 모름지기 관계라는 것은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한 쪽이 마냥 일방적으로 잘하고 잘못하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때문에 내심 이 작가는 지금까지 호구로 지내온 것은 부모가 호구로 대한 것과 천성이 호구인 것이 결합된 현상이라 얕잡아봤었는데, 아무래도 얕잡게 여겨져야 할 것은 작가가 아닌 바로 내가 아닌가 싶다. 작가는 호구가 아니라 단지 진정성 있게 가족과 소통하려고 했던 사람이었는데, 단지 호구 같고 답답하다는 이유로 작가의 대단함을 마지막 순간까지 미처 못 알아본 게 민망하고 작가에게 죄송할 따름이었다. 

 <단지>는 총 2부로 나뉘어졌는데 1부는 단행본 2권 중반까지, 2부는 2권 후반을 장식한다. 2부는 작가와 비슷한 상처를 가진 독자들의 사연을 바탕으로 한 일종의 외전으로 외전이다 보니 처음엔 흥미가 반감됐지만 읽다 보니 두 가지 때문에 다시 빠져들며 읽게 됐다. 하나는 가정폭력의 양상이 이토록 다양하다는 데서 오는 참담함 - 어쩔 수 없게도 내가 이 사람보다 낫다는 안도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 과 다른 하나는 그 사연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작가의 스토리텔러로서의 솜씨였다. 자기 얘기를 하는 데에만 능한 작가가 아니란 걸 느낄 수 있었고 때문에 작가의 다른 작품도 기대됐다. <방탕일기>라는 작품이 카카오웹툰에서 연재됐다던데 그 작품도 봐야겠다. 원래 네이버 이외의 플랫폼에서 웹툰을 보려고 하지 않는데 -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봐야 될 작품이 겉잡을 수 없이 많아지니까. - 이 작가라면 예외다. 


 끝으로 1부의 마무리에서 이 작품의 단행본을 작가가 자신의 의절한 친모한테 택배를 보내는 장면이 있는데, 그 이후엔 어떻게 됐을지 궁금하다. 그 아줌마 성격상 우리가 기대하는 극적이고 바람직한 변화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지만, 만화라는 장르의 특성상, 게다가 단행본으로 나오기까지 했으니 충격도가 어마어마할 텐데 그냥 의절한 채로 넘어갔을지 어땠을지 궁금하다. 작가 입장에선 그래도 자기 시선에서 유리하게 그려졌음을 인지한 것 같지만 당사자는 너무 불합리하게 여길 수도 있는 노릇이고... 이 작가는 너무 잘 풀렸지만 사람들이 대체로 자신이 겪은 실화를 작품화하는 걸 기피하는 것은 다 저런 논란과 분란을 피하기 위해서인데, 단지 작가는 부디 이대로 아무 탈 없이 승승장구하시길 한 사람의 독자로서 정말 바라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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