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1 - 마네와 모네
강모림 지음 / 돌풍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9.8



 걱정 말게, 화가는 자기 자신이기만 하면 언제든 인정받을 수 있으니. 그저 자신의 것을 찾기만 하면 되잖은가. 굉장히 간단한 문제지. - 33p


 하지만 대부분의 화가들은 그저 자신의 것을 추구하다가 지지리 궁상 맞은 삶을 살아가다 눈을 감는다. 마네처럼 명망 있는 가문 출생이 아니면 생전에 부를 거머쥔 화가는 극히 드물고 대부분이 모네처럼 생활고에 시달리며 처자식을 굶기지만 불타오르는 예술혼을 주체하지 못하는 짠내 가득한 모습으로 말년까지 살아갔다. 사후에 인정 받은 화가도 극소수다. 오늘날 이름난 그들의 위상을 생각하면 생전에 뭘 그려도 조롱거릴 면치 못하는 모습은 아무래도 어색하기만 하다.

 <화가1>를 그린 만화가 강모림 씨가 프롤로그에서 밝힌 포부가 인상적이었다. 이 책을 통해 화가들이 위대한 예술가 이전에 그저 결점이 많은 한 사람의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자신의 예술혼을 불태울 수 있었는지 궤적을 쫓기로 했단다. 포부가 무색하게 1권의 매출이 그저 그랬는지 2편은 17년이 지난 지금도 깜깜무소식이다. 흐름상 '르누아르와 세잔', '고갱과 고흐'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완성도와 집념이 느껴졌는데... 진실은 작가와 출판사만이 알겠지. 이유가 무엇이든지간에 작가가 그의 예술혼을 다 못 펼친 것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화가인 마네의 아이러니한 일대기는 다시 봐도 웃프다. 인정받으려고 그렸지만 보수적인 아카데미에선 괘씸한 그림으로 취급당하고 오히려 젊은 예술가들에겐 추앙받는다니... 그는 현실을 보이는 그대로 그렸다고 했지만 그러한 보이는 것을 미화하지 않는 작풍이 아카데미의 반감을 샀다는 것이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렸을 뿐인데 불쾌감을 샀다면, 보이는 현실 그 자체가 불쾌하단 것을 인정하는 것은 아닌지?

 마네가 위대한 화가로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로 이런 사회의 더러우면서 모순적인 태도를 알게 모르게 꿰뚫은 것을 들 수 있다. 정작 화가 자신은 그런 의도가 없었다는 게 여전히 웃음 포인트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세상엔 야망과 재능이 불일치하는 사람이 많구나 싶어 어딘지 찝찝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의도치 않은 명성이라 하더라도 당사자에겐 행복일까? 어찌 보면 마네에겐 누명 내지는 저주였는지도 모른다.


 때문에 그는 처음 모네라는 이름을 봤을 때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사칭하며 조롱하는 줄로 여겼다. 마네와 모네. 마네가 선배지만 어쨌든 둘은 동시대에 활동했고 처음엔 이름이 닮아서 평론가들 사이에서 자주 비교당했다고 한다. 마네는 아무리 그래도 자기가 선배인데 단지 이름이 닮았다는 이유로 동렬에 놓인다는 것 자체가 처음엔 불쾌했다고. 그 둘이 정식으로 만나고 모네가 어떤 인물인지 알고 나서는 친해졌다지만 말이다.

 마네뿐 아니라 모네의 일대기도 만만치 않게 여운이 컸다. 모네가 젊었을 적엔 집세와 빵값을 위해 그림 스무 점을 거저에 가까운 값으로 내놔 풀칠이나 겨우 했다는 것도 기가 찰 노릇이고, 마네도 그랬지만 모네도 아카데미에 미운털이 박혀 뭘 그려도 조롱만 받는 것도 혀를 차게 되는 부분이었다.

 아, 여담이지만 이 책에선 아직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에 얽힌 논란이 '옛날 버전'으로 다뤄지고 있어 아쉬웠다. 그 그림에서 마네가 거울에 비친 술집 여인의 뒷모습의 각도를 이상하게 그려서, 명색이 화가란 작자가 그림의 기본도 모른다며 웃음거리가 됐고 강모림 씨도 책에서 마네가 말년에 새로운 예술의 경지를 보인 것이란 해석을 했는데, 실상은 다르다. 충분히 현실적으로 가능한 각도라고 오늘날 한 사진가가 재현했는데... 당시엔 마네고 모네고 인상파 전체가 선입견이 제대로 박혀 있어서 이런 조금만 생각해도 해결될 논란도 해결되지 못하고 불씨만 커질 뿐이라는 게 딱하게 여겨졌다.


 아내인 까미유가 죽었을 때도 아내가 막 숨을 거둔 얼굴을 그림으로 그린 모네처럼 역사에 이름을 남긴 화가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광기 어린 모습들이 포착되곤 한다. 이 책에선 마네와 모네의 흑역사...까진 아니더라도 사사롭더라도 가급적 많은 에피소드를 담아내 그들의 명과 암까지 모두 다뤄냈다. 그렇기에 다 읽고나면 이름난 화가들이 예술가로는 몰라도 인간으로선 딱히 본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시대적 한계나 경직성을 자신들의 전생애에 걸쳐 예술로써 초월한 자들이기에 일정 부분 미화되더라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가기도 한다. 뭐, 그들이 '미화'라는 단어까지 써야 할 만큼 됨됨이 글러먹은 짓을 일삼은 것은 아니지만, 책의 내용 중엔 평소 그들의 작품을 볼 때 느꼈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한마디로 실망스런 구간들이 몇 있기에 읽으면서 내내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실망스럽다는 것은 그들이 인간적이라는 말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결국 위대한 예술가도, 기술적으로 통달한 화가도 삶을 들여다보면 우리와 비슷한 인간일 뿐이다. 그래도 차이가 있다면 재능이 있었거나, 시대를 타고났거나, 운이 좋았거나 등 여러 이유가 있을 텐데 이 모든 요인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노력과 집념이 없었다면 무수한 기회도 그들의 주변을 잠시 스쳐 지나가버렸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네와 모네를 비롯한 이름난 화가들은 예술가로서나 인간으로서나 위대한 작자들임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의 불행은 내일의 농담거리
김병선 지음 / 웨일북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4



 일단 하고 이왕이면 최선을. - 201p


 꽤 예전부터 꼬독자였다. 스페인어를 맛깔나게 구사하면서 스탠드업 무대까지 섭렵하는 그의 패기에 쾌감을 느껴서 매영상마다 좋아요를 눌렀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사실 나는 코미꼬의 농담보다 김병선이란 사람이 삶을 대하는 태도에 감명을 받아서 늘 좋아요를 눌러왔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엔 코미꼬가 백만 유튜버가 된 이후의 요즘 영상에선 느낄 수 없는 진지하고 찌질하며 속 깊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가 어떤 학창시절을 보냈고 서울대에 갔다가 무슨 연유로 KBS 공채 개그맨이 됐으며 스페인에 가서 망하고 흥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파란만장한 여정이 희망적이고 자학적이면서 다시 낙관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의 여정은 현재진행형인데, 이 책이 30만 유튜버 시절이 아닌 지금 시점에 이어서 쓰기 시작하면 또 다른 톤으로 전개될 듯하다. 지금은 무려 골드버튼의 소유자고 멕시코에서 나름대로 자릴 잡은 유명 코미디언이니 말이다.


 결국 그렇게 살다 경험은 많지만 전문성은 없는, 질투는 많지만 자신은 없는 서른이 되어버렸다. - 213p


 아무래도 현재 내 처지와 겹쳐 보이는 구간이 많았던 터라 빠르게 읽히면서도 내내 속은 편치 않았다. 내가 경험한 것과 비슷하거나 더한 난관 속에서도 활로를 찾는 모습에서 역시 서울대생은 뭐가 달라도 다른가 싶다가 종국엔 내가 롤모델로 삼기엔 거리가 먼 사람이란 결론이 나왔다. 지난주 토요일에 코미꼬가 서울에 '내한'했을 때 무대에서 선보인 연륜을 느끼면서 이 사람과 나를 동일시해선 좌절밖에 남지 않음을 다시금 느꼈다.

 인생에 승자도 패자도 없다지만 험난한 길을 개척해나가는 코미꼬는 승자 중에 승자라고 본다. 앞으로의 일은 모르는 거지만 그라면 능수능란하게 대처하리라 믿는다. 나는 나대로 나만의 전법을 갖춰 내 삶을 개척해나가면 그만이고, 나는 그의 통찰과 센스가 녹아든 농담을 편하게 만끽하면 된다. 저 사람은 지금 내 나이 때 이랬었는데 어쩌구저쩌구 전전긍긍할 필요는 전혀 없지. 전전긍긍해서도 안 되고. 코미꼬조차 그걸 바라지 않을 것이다. 애당초 자랑하려고 쓴 글이 아니니까.


 최근 포르투갈 학생비자를 준비하면서 그 나라의 초월적으로 답답한 일처리에 속이 타고 있는 와중에 한 병의 소화제 같은 글을 읽어 시름이 좀 덜어졌다. 설령 '또' 일이 틀어지더라도 어떻게든 길은 열릴 테므로, 오히려 일이 틀어진 것이 기가 막힌 나비효과를 불러일으켜 새로운 기회를 안겨줄는지 모르니까 한껏 낙관적으로 앞을 바라보게 됐다. 나도 이제 오늘의 불행은 내일의 농담거리를 위한 재료라 생각하며 살아보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의의 쐐기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박진세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7.2



 군대에선 무지하게 재밌게 읽었는데, 오랜만에 다시 읽으니 그저 그랬다. 어딘지 전형적이고 작위적인 인질극이란 느낌을 지우기가 힘들었다. 아마 내가 니트로글리세린이란 폭약의 위력을 글로만 접해서 그럴 수도 있다. 강도인 남편을 여의었다고 38구경 총과 니트로글리세린으로 경찰서에서 인질극을 벌이는 아내에게 동정의 여지도 생기지 않아서 그저 그랬던 것일 수도 있고. 복수하려는 꼬라지 봐라, 누가 그 나물에 그 밥 아니랄까봐.

 강도 아내의 복수 대상인 스티브 카렐라 형사는 바깥에서 자신만의 치열한 수사를 벌이는데, 이러한 두 사건의 병렬적인 배치가 은근히 주의를 산만하게 했다. 정확히 말하면 인질극에 비해 카렐라의 수사가 지루한 게 문제였다. 사건의 전말이 궁금하기도 했고 나름대로 반전도 있었지만 인질극에 견줄 바는 아니었다. 그가 매력적인 캐릭터란 사실만 제외하면 크게 몰입할 구석이 부족했달까.


 87분서 시리즈가 추리소설보단 경찰소설의 정체성을 갖춘 것으로 유명한 만큼 작중엔 굉장히 다양하고 사연 많은 형사들이 등장한다. 이 작품에선 카렐라가 주인공을 맡았다면 다른 작품에선 브라운이, 또 다른 작품에선 다른 형사가 주인공을 돌아가며 맡을 만큼 각각의 형사들이 매력적이기에 후속작에선 누가 주인공을 맡을지 기대가 된다.

 그렇게 몇 편을 읽었고 개중 <살의의 쐐기>가 가장 재밌었는데... 서두에서 밝혔듯 오랜만에 다시 읽으니 그냥저냥이었다. 처음에만 좋고 두 번째엔 별로인 소설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변한 것일까. 대답을 찾기 애매한 궁금증을 안고서 책장을 덮어야 해 어딘지 씁쓸했다. 그나마 이 작품에서 푸에르토리코 출신인 안젤리카가 어눌한 영어로 외친 절규만이 기억에 남았는데, 나도 내년에 포르투갈에서 이방인으로서 씁쓸한 나날을 보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 걱정이 약간 많아졌다. 뭐, 괜찮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1st Anniversary down 아이실드 21 BRAIN×BRAVE
무라타 유스케 지음, 이나가키 리이치로 원작 / 대원씨아이(만화)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8.1



 작품 첫 연재 21주년을 기념하며 나온 이 책은 크게 세 가지 파트로 구성됐다. 동료 만화가들의 축전(+그림), <블루 록> 만화가들과의 대담, 그리고 대망의 스페셜 만화다. 오다 에이이치로나 이사야마 하지메 등 너무나 유명한 만화가들의 축전엔 전율이 느껴졌으며 스페셜 만화도 볼 만했는데 만화가들끼리의 대담은 별로였다. 아무래도 내가 <블루 록>을 읽지 않았기 때문도 있겠지만 편집 자체가 가독성이 좋지 않았다. 일단 글씨가 너무 작았는걸.

 무엇보다 <아이실드21>의 비하인드 스토리만 온전히 접하고 싶었던 내 기대와 어긋나는 내용의 대담이어서 실망스러웠다. 사실상 대담 부분은 아예 건너뛰어도 상관없을 정도다. 아무튼 스페셜 만화를 이야기하자면, 최근에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를 본 직후여서 그랬는지 이 작품에서의 AI를 비롯한 발전하는 과학 기술에 대한 고찰이 특히 흥미로웠다. <아이실드21>이 넘을 수 없는 재능에 도전하는 범인들의 사투를 스포츠 만화였던 만큼 과학 기술에 의해 선수들의 능력이 수치화돼 잠재력까지 사전에 파악당하는 작중 설정은 상당히 착잡하게 다가왔다. 아니, 설정이 아니지. 엄연히 실재하는 기술이고 스페셜 만화에선 시대의 흐름에 맞게 작품 속에 반영시켰을 뿐이다.


 냉정히 말해 가격 대비 컨텐츠는 많이 부실한 책이었다. 허나 21주년을 기념한답시고 세나의 런과 히루마의 기발한 트릭 플레이를 펼치는 식의 추억팔이에만 집중한 것이 아닌, 기존 주제의식을 잇는 새로운 질문을 던진 것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정상 내지는 한계에 도전하는 인간의 발버둥에 대한 찬가로 들려 약간 뭉클하기까지 했다. 작가는 이번 스페셜 만화를 통해 시기적절한 질문을 던지지 않았나 싶다. 과학 기술에 길들여진 인간의 미래는 이미 정해졌다며 여겨지는 요즘에, 그래도 인간의 도전은 그 자체만으로 정말 뜨겁고 아름답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없는 걸 갖고 한탄할 여유따윈 없다, 갖고 있는 것만으로 최강의 전법을 찾아 발버둥쳐야 하니까. 작중에서 히루마가 한 대사인데, 그는 평균을 조금 웃도는 수준의 신체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높은 지력으로 과학으로 측정 불가능한 잠재력을 시합마다 선보인 바 있어 무게감 있게 들리는 대사다.


 미식 축구라는 스포츠가 매력적인 이유로, 축구나 농구와 달리 각 포진션별로 요구되는 능력이 다르다는 부분을 들 수 있겠다. 말인즉슨 반드시 만능 선수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갈고 닦았다면 충분히 시합에서 활약할 수 있음을 작중에선 주기적으로 강조해왔다. 물론 만화적 허용으로 캐릭터들의 능력치가 너무 극단적이긴 했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고 실제로 작중에서 꾸준하게 어필해 노력과 열정을 추구하는 소년 만화의 본분을 다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다소 생소한 스포츠인 미식 축구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을 대폭 줄여준 공로가 있어 완독한 지 10년이 넘은 지금도 떠오르곤 하는 작품이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 같았던 책이라 팬으로서 읽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중학교 때 이 작품을 처음 접했던 때가 생각이 나서 반가웠다. 그렇기에 컨텐츠는 부실하지만 읽으면서 애정이 갈 수밖에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난반사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3
누쿠이 도쿠로 지음, 김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9.9



 몇 년 전 이 작품을 처음 접할 땐 개똥을 치우지 않는 노인에 이입했다면, 이번엔 주차가 미숙한 여자에 이입하며 읽었다. 최근에 운전 연수를 받고 도로로 자주 차를 몰고 나가 버릇하다보니 당연한 일이다. 도로 운전은 어찌저찌 해도 주차에서 막막해지는 경우가 있고 뒤에서 빵빵거리면 보일 것도 안 보이게 되는 조바심을 종종 겪었다 보니 남의 일처럼 읽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책임하게 차를 버리고 도망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지만.

 뭐든 끝마무리가 가장 힘들고, 그래서 중요하다. 운전과 마찬가지로 소설도 끝마무리가 무척 중요하다. 작가는 주제의식에 접근할 때 깜빡이를 켜듯 조심히 접근하고 엑셀을 밟을 때는 밟다가도 커브를 돌 때는 브레이크에 발을 걸고서 가야 하기도 하며, 신호에 따라선 멈출 줄도 알아야 하고 그때 급브레이크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 전후좌우도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최종적으로 주차한 뒤에도 한 번 더 확인해야 한다.


 만에 하나, 아니 억에 한 번이라도 잘못 되면 인생 하직해야 하므로 과감할 땐 과감하되 조심해야 할 땐 필요 이상으로 조심해야 하는 것이 운전이지 않은가 하고 요새 핸들을 잡을 때마다 생각하곤 한다. 그에 비해 소설 집필은 운전만큼 필사적일 수 없으나 이 작품이 사회 구성원 전반에 걸쳐 있는 크고 작은 도덕적 해이를 살살 건드리고, 그로 인한 도미노 현상을 그리고 있는 만큼 작가가 나름 운전에 준하는 책임감 내지는 사명감을 갖고서 집필에 임하지 않았을까 싶다.

 쓰러진 나무에 머릴 다쳐 죽은 아이의 아버지인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작가도 글을 이어나가면서 어디까지가 지켜야 할 선인지 고심했다는 게 독자 입장에서도 여실히 느껴졌다. 어떤 지점은 과한 책임 추궁 같고, 또 어떤 지점은 소소한 규칙 위반을 일삼던 인물들의 심정이 이해도 되고 어떤 경우에는 동정심도 일어서 주인공의 추적이 자칫 생사람 잡아버리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들었다.


 그러나 이는 모든 사정을 아는 독자니까 해볼 수 있는 생각일 것이다. 모두가 자기 생각만 하면 난장판이 되는 도로 상황처럼 일생 생활의 에티켓도 싫든 좋든 지킬 땐 지켜야 한다. 옆에서 두는 훈수가 고까워도 이치에 맞다면 수긍해야 마땅한데 자존심 싸움의 문제로 넘어가면 답이 없어진다.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땐 결말이 다분히 감상적이라 여겨졌는데 이번엔 매우 이성적으로 읽혔다. 양보할 건 양보하고 선을 지키며 주차도 안정적으로 해냈다. 작가의 뒤를 이어서 운전하려는 독자 입장에선 이 작품은 관리가 잘 된 차라 봐도 무방하다. 결국 책임 추궁이 아닌 단지 사과만을 바랐던 주인공의 심정은 참으로 합리적이면서 애처로워 자식이 없음에도 마음이 미어졌다. 도의적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자신들의 사소한 행동으로 인해 아이가 죽을 줄 알았더라면 안 그랬을 거라고, 인정해주고 사과하길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손가락질이 아니었나 싶다.


 꽤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고 거의 대부분이 짜증나기 그지없었지만 장면 전환도 빠르고 스케일이 작은 만큼 이입도 쉬운 이야기였던 터라 탄력적으로 읽을 수 있던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누쿠이 도쿠로의, 아니 사회파 추리소설계의 역작이라고 생각하며 다양한 심리와 갈등을 입체적으로 묘사하는 만큼 생각거리가 많아진 덕에 이틀 만에 읽어나간 것치고 여운은 아주 짙게 남아있다.

 올해 <종이올빼미>부터 작가의 작품을 여럿 접했는데 역시 이 작품이 가장 좋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추천하기에도 가장 괜찮을 듯하다. 국내에 소개되는 작가의 작품이 예전만 못한데, 조만간 <난반사>에 준하는 걸작을 집필해주길 간절히 바라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