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라기 - 며느리의, 며느리에 의한, 며느리를 위한
수신지 지음 / 귤프레스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6



 아마 우리나라, 아니 전세계에서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도서 중 접근성이나 세련됨이란 측면에서 가장 빼어난 작품이지 않을까 싶다. 아기자기한 그림체와 대비되는 서늘하고 섬뜩한 묘사가 은근히 압박감이 넘쳐서, 며느리의 부당한 처지를 깨닫는 사린의 심정을 독자들도 짐작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여성 독자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남편이나 자식들, 시어머니들도 느끼는 바가 상당하리라 본다. 시아버지들은 글쎄.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만약 우리나라에서 펼쳐졌고 그때 꼭 하나의 문화는 없어져야 한다고 가정을 해본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우리나라의 제사 문화를 희생양으로 내놓을 것이다. 성함이나 나와의 관계도 모르겠는 조상을 위해, 없을 것이 확실한 사후 세계를 향해 모처럼 쉬는 명절에 음식을 해야 하는 것도 부당하거니와 그걸 여자들을 비롯한 아랫사람이 도맡아야 하는 것도 이상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엄밀히 말하면 제사나 차례를 지내는 의도 자체는 괜찮은데 그 행사를 이뤄나가는 기성 세대의 방식이 지나치게 무지성적이고 철저하게 남성 위주로 설계됐다는 것이 문제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문제인지 되짚기도 까마득할 만큼 뿌리 깊은 문제인 터라 없던 두통도 생길 지경이다.


 물론 작중에선 명절만 주요한 에피소드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사린이 해외로 장기간 출장을 간다니까 남편 두고 출장 가는 새색시가 어딨냐며 자기 아들을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취급하는 시어머니나 그런 시어머니한테 '회사 생활 한 번도 못해본 티 내지 말라' 며 꼽주는 시아버지나 결국엔 아내가 출장을 간 동안에만 잠시 친가에서 출퇴근하며 밥을 먹겠다는 철없는 남편 등;;; 캐릭터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암을 유발한다. 아기자기한 그림체가 무색할 정도로 현실적인 작풍이 실로 압권이었다.

 주인공 사린이도 시가 사람들 못지않게 답답했다. 허나 가부장적 분위기에서 며느리는 서열상 최하층에 속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사린이 마치 입에 재갈이 물린 것처럼 구는 모습이 씁쓸하지만 이해가 되기도 했다. 사린도 나중에 혼자 있을 때나 남편 구영한테 자신의 답답한 처지에 대해 한탄을 쏟는데, 나는 치졸한 변명이나 해대는 구영과 달리 사린에게 당신의 잘못이 아니란 걸 먼저 강조하며 그녀를 달랬을 것이다. 며느리를 답답하게 만드는 가부장적 분위기가 문제라고 말이다.


 어제 메가박스에 영화를 보러 갔더니 벽 한편에 '관객들한테 답을 던지는 영화는 극장을 나서는 순간 끝나지만 관객들한테 질문을 던지는 영화는 극장을 나서는 순간 시작된다' 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난 <며느라기>도 독자들한테 질문을 던지는 측면에서 무척 좋은 작품이라 생각한다. 페미니즘을 내세운 작품들이 대체로 명확하고 사이다에 치중한 결말을 내는 것에 반해 이 작품은 열린 결말로 연출해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줬다.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며느라기'는 사린의 상사에 의해 새로이 정의된다. 단순히 며느리+아기의 뜻이 아닌 착한 며느리로 지내고 싶어하는 시기를 뜻할 수도 있으며, 1년 안에 그 시기를 벗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생 그 시기에 못 벗어나는 사람도 있더라는 사린의 직장 상사가 한 말은 이 작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였다.


 위의 말은 굉장히 의미심장하면서 관점에 따라선 소름 끼쳤는데, 왜냐하면 자신이 어떤 며느리가 되고 어떻게 결혼 생활을 영위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개인에게 달렸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말인즉슨 각자도생이라 이건가. 같은 처지의 사람끼리 연대해서 대항하기엔 이 사회의 가부장적 분위기는 너무 만연하고 미묘해 쉽지 않단 것을 작가가 통찰한 듯해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감탄이 다 나온다.

 가령 자신에게 대리 효도를 부탁하는 듯한 구영의 태도는 문제투성이지만 사람 자체는 마냥 나쁘지 않은 것 같으니 덮어놓고 이혼하잔 얘기를 못 꺼내는 사린처럼 - 작품의 후속작이라 부를 수 있는 <노땡큐>에서 둘은 아직도 이혼하지 않았고 구영은 여전히 답답하다;; - 실제로 현실에선 심리적 장벽이 많고 또 두껍다. 이런 장벽 때문에 우리 사회의 며느리에 대한 부당한 인식이 구조적으로 개선될 여지는 무척 적어 보인다. 누구나 사린의 동서 혜린처럼 똑부러지면 좋겠지만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니기에 정말 생각이 많아지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최근 추석을 보내다가 생각이 난 김에 오랜만에 펼쳐든 작품인데 다시 읽어도 생각할 거리가 많았고 5년 전보다 세상이 딱히 바뀐 게 없어 보여 씁쓸하기도 했다. 우리 집도 명절 때마다 난리가 나서... 명절이면 가정이 화목해지긴커녕 화만 발생하는 것만큼 아이러니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누군가는 그 이유를 깨달아야 할 텐데, 그 '누군가'에 속한 몇몇은 어쩌면 죽을 때까지도 못 깨달을 수도, 아니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도 못할 듯해 그저 안타깝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디리 dele 1
혼다 다카요시 지음, 박정임 옮김 / 살림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7.6



 <디리>는 의뢰인의 사후에 데이터를 지워주는 '디지털 장의사'라는 직업을 다룬 작품이다. 의뢰인의 실제 사망 여부를 확인하는 것을 비롯한 현장 업무 전반은 유타로가, 유타로의 보고에 따라 상황을 판단하고 데이터를 삭제하는 업무는 사장인 케이시가 담당하고 있다. 케이시는 데이터를 지우고자 했던 의뢰인의 유지를 받들어, 설령 법의 테두리에 걸쳐진 사안이라 할 지라도 망설임 없이 데이터를 지우려 하는 반면 휠체어 신세인 케이시 대신에 현장 업무를 맡고 있는 유타로는 고인인 의뢰인이 남긴 데이터의 진의가 궁금해 데이터의 내용을 확인은 해보자는 것으로 둘은 시종 의견 차이를 보인다.

 의뢰인 입장에서야 당연히 케이시의 완고한 모습에 손을 들어주고 싶겠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디지털 장의사라는 직종 자체에 의구심과 반감을 갖고 있다. 당장 업무의 한 축을 담당하는 유타로부터가 그렇잖은가. 그는 데이터의 내용을 확인했기에 오히려 의뢰인의 유지를 더욱 받들었다고 주장한다. 의뢰인의 유족들도 어떤 경로로든 디지털 장의사의 존재를 알고 찾아와 데이터를 지우지 말라며 시비를 걸거나 무엇이 고인을 위한 행동인지 이해해달라며 애걸복걸한다. 물론 케이시는 우직하게 거절하고, 유타로와 논쟁을 벌일 때도 굳이 데이터를 확인하지 않았더라도 바뀌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 단정한다.


 유타로와 케이시의 주장은 각자 일리가 있어서 독자마다 달리 판단할 일일 테지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케이스 바이 케이스, 사안마다 다르므로 케이시의 태도는 답답하고 유치하기 그지없었다고 못을 박아두겠다. 그와 동시에 유타로가 엄청나게 오지랖이 넓어서 케이시와는 다른 느낌으로 답답했다. 뭐, 덕분에 밋밋하고 반복적일 수 있는 이야기가 윤택해졌지만 말이다.

 마지막 에피소드를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신선함과 준수한 완성도, 그리고 여운을 잘 연출한 수록작들이었다. 개인적으로 첫 번째 에피소드와 '스토커 블루스', '인형의 꿈'이 기억나고 마지막 에피소드는 이야기와 세계관을 너무 싱겁게 갈무리하는 느낌이라 안 좋은 의미로 기억에 남았다. 앞선 세 작품은 혼다 다카요시의 감성이 디지털 장의사란 설정과 맞물려 대단한 시너지를 일으켰는데, 특히 '인형의 꿈'은 억지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교함이 돋보이는 반전과 감동이 있어 사뭇 감탄스러웠다. 무엇보다 오직 디지털 장의사란 설정을 통해서만 끌어낼 수 있는 감동이었기에 더욱 기억에 남을 듯하다.


 반대로 마지막 에피소드인 '그림자 추적'은 유타로의 전임자인 나쓰메처럼 그간 언급만 됐지 제대로 설명되지 않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유타로의 과거를 풀어내는 대망의 에피소드였는데... 들인 분량에 비해 거둔 성과는 미미했다. 아니, 사실 떡밥 회수 여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고 케이시의 정체에 얽힌 반전이 도리어 케이시의 캐릭터성을 의심하게 만들었던 것, 그리고 이 에피소드에서 유타로의 분노가 다소 맥없이 해소되는 것이 불만스러웠다. 이 작품 하나만 놓고 보면 기승전결이며 완성도엔 문제가 없고 솔직히 수록작들 중 가장 몰입도가 있었지만, 금방 언급된 두 요소 때문에 뒷맛이 나빴다.

 이는 아마 마지막 에피소드의 내용이 미리 구상되지 않고 작품이 시작됐다가 후에 급조된 설정이 반영돼 벌어진 사달인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면 의뢰인의 유지 운운하는 케이시의 태도가 지나치게 내로남불인 꼴이 되는데, 유타로 못지않게 나 역시 배신감이 이만저만이 아닌 터라 작가가 반전을 위해 무리수를 둔 것이란 삐딱한 생각밖엔 들지 않는다. 작품의 한 축을 담당하는 캐릭터의 캐릭터성 붕괴는 잘만 연출하면 호불호를 떠나 작품의 좋은 요소로 안착할 수도 있지만 이 작품엔 해당 사항 없는 얘기다. 의뢰인의 유지는 개뿔, 정말이지 자기기만이 따로 없잖은가.


 간혹 몇몇 수록작에서 억지 감동을 끌어내려 한 것, 어딘지 모르게 중2병스러웠던 인물들의 말투까지 눈에 밟히는 요소가 자잘하게 있었지만 상술했던 케이시의 캐릭터성 붕괴 하나로 쌓였던 불만이 일제히 터져버렸다. 개개의 수록작은 나쁘지 않았는데 참... 어쨌든 마지막이 이렇게나 중요하단 걸 깨닫게 해준 터라 좋든 싫든 반면교사로는 확실히 각인이 됐다.

 <디리>는 일본에선 드라마화까지 되는 등 제법 인기를 얻은 작품이다. 드라마가 잘 만들어졌나? 의뢰인의 유지를 받들어 데이터를 지우려는 케이시는 자주 '신뢰'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는데, 나에게 신뢰를 잃은 이 작품이 드라마로 각색된 버전이라고 해서 신뢰를 되찾을 수 있으리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지 않을 것 같은데 드라마를 볼 일은 결코 없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드 러브 메타포 8
엘렌 위트링거 지음, 김율희 옮김 / 메타포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9.2



 부모님은 이혼했고 편모 가정에서 자란 주인공 존은 제법 냉소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아빠는 향락적인 삶을 살고 있으며 함께 살고 있는 엄마는 자신의 몸에 손을 대지 않는 등 전반적으로 부모가 치명적인 결함은 없는데 자식으로서 기댈 만한 위인들이 아니다. 그나마 엄마는 아빠라는 나쁜 남자에 데여 아들에게도 마음의 벽을 느끼고 다른 남자와 재혼하는 것에 갈팡질팡하며 호들갑을 있는 대로 떠는 것이 이해는 가지만... 어쨌든 주인공의 나이대가 사춘기, 한마디로 중2병 걸리기 딱 좋은 즈음이라 이러한 자신의 성장 배경에 냉소를 넘어 환멸을 갖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읽는 입장에서 청승 떠는 것 같은 느낌도 없잖았지만 글을 쓰는 캐릭터라 그런지 기본적으로 몰입을 유발하는 캐릭터였다.

 그런 냉소적인 성격의 존이 우연히 연상의 멋진 여자인 마리솔에게 반하게 되는데 하필 그 여자애가 레즈비언이란 것이 이 작품의 주요한 골자다. 어쩌다 보니 마리솔과 대화하게 되지만 자신의 성정체성으로 대놓고 철벽을 치니 존은 자신 또한 성정체성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식으로 상대의 의심을 무마해 친분을 유지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존은 자신의 성정체성을 시작으로 이름부터 세부적인 사항까지 거짓말을 하는 반면 마리솔은 자신이 레즈비언이며 그 사실 때문에 부모님과 사이가 틀어진 것 등 솔직하게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는다. 이런 태도의 차이가 예정대로 둘의 관계에 파장을 일으키고 존은 거짓말을 넘어 삶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되돌아보게 된다.


 자신의 글을 편집해 발간하는 1인 잡지라는 설정도 흥미로우며 1인 잡지를 계기로 만나는 두 남녀가 태생적으로 이뤄질 수 없는 관계인 것도 흥미롭기 그지없었다. 거기다 존이 들이댈수록 존 못지않게 냉소적으로 굴면서도 순순히 응해주는 마리솔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는데, 이는 성정체성이 칼로 나뉘듯 딱 정해지는 게 아님을 반영한 전개인 듯하다. 영화 <캐롤>에 나온 '여성이어서 좋아한 것이 아닌 좋아한 사람이 여성이었더라'는 대사처럼 마리솔 역시 처음엔 존에 대한 감정을 우정이라 느꼈지만 독자인 나는 우정과 사랑 그 중간 어디에 있는 감정으로 존을 대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결국 존의 사랑은 그가 원하는 형태로 결실을 맺지 않아 참으로 안타까웠다.

 하지만 꼭 결실을 맺어야지 사랑인가. 때론 좌절도 사랑이고 성장이며, 짧은 시간이나마 마리솔이란 좋은 인연을 가졌으니 무의미한 일이라곤 볼 수 없다. 오히려 사랑을 냉소적으로 바라봤던 태도만큼은 자신이 몸소 사랑에 빠짐으로써 버리게 됐잖은가. 다소 가혹한 형태의 성장이긴 하나 자신이 이를 통해 성장을 했고 벽을 넘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는 것으로도 박수를 칠 만한 일이다. 마리솔의 조언으로 부모나 친구와의 관계도 개선되고 자신이 환멸을 갖던 주변 사람의 소중함도 깨달았으니 비록 연인 관계로 발전하진 못했으나 마리솔의 등장이 존의 인생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연임은 부정할 수 없겠다.


 글을 통해 맺어진 인연이라 둘의 대화 내용도 깊이 있고 30년 가까이 전에 출간된 작품치고 성정체성에 대한 통찰도 예리해 여러모로 곱씹으며 읽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었다. 성장 소설은 다시 읽으면 내용을 떠나서 문체가 유치하고 사건의 규모나 깊이가 얕게 느껴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작품은 그렇지 않았다. 이야기의 규모 자체는 작지만 그 안에 담긴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나 좌절하는 과정은 실로 보편적이고 진지한 주제인 터라 서른이 넘어 다시 읽어도 변함없이 몰입하고 음미하며 읽을 수 있었다. 오히려 존과 마리솔의 사유나 마리솔을 향한 존의 사랑이 워낙 진지해 십 년 뒤에 다시 읽어도 더 원숙한 맛이 느껴지리란 생각마저 들었다. 아마 진짜로 십 년 뒤에 찾아 읽게 될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별을 담은 배 - 제129회 나오키상 수상작
무라야마 유카 지음, 김난주 옮김 / 예문사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10


 국내에 번역된 일본 문학 중 남자는 양억관, 여자는 김난주가 번역을 도맡는다, 부부인 두 사람이 다 해먹는다는 등 우스겟소리가 있을 만큼 번역가 김난주 씨의 작업량은 실로 엄청난 편인데, <별을 담은 배>는 그 김난주 씨가 재번역을 하게 되면서 화제를 모았던 소설이다. 말인즉슨 이전에 한 번역이 성에 차지 않아 다시 번역했다는 것인데,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싶어 이 소설을 다시 펼쳐봤다.

 <별을 담은 배>는 나도 십여 년 전에 감명 깊게 읽은 작품이며 당시 후기를 쓸 때도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언어의 한계를 마주하기도 하는 등 감상을 남기기가 생각보다 까다로웠던 기억이 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디테일한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아 완전히 새로 읽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었고, 그 탓에 김난주 씨가 이전의 번역에서 아쉬움을 느꼈고 다시 번역할 땐 어떻게 개선했는지는 하나도 파악할 수 없었다. 소기의 목적은 흐지부지됐지만 시작이 어쨌든 기억에 잊힌 멋진 작품 하나를 다시 읽게 된 것에 더없이 만족감을 느낀다. 점수를 보면 알겠지만 아마 올해 읽은 최고의 소설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 소설에 대해 얘기할 때 김난주 씨의 재번역이라든가, 아니면 나오키상 수상작이라는 것도 부차적인 얘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에 격찬을 아끼지 않는 상당수의 독자들 모두 책의 마지막 수록작 '별을 담은 배'에서 조선인 위안부 미주와 시게유키의 이야기에 전에 없는 울림을 받은 것이 한목했을 터다. 일본인 입장에서 왜곡 없이 바라본 조선인 위안부의 비극적인 처지는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주는 핵심 요소였고, 그전까진 만악의 근원으로 여겨진 독불장군 시게유키의 반전 과거가 드러남으로써 사랑엔 한 사람을 살릴 수도 망칠 수도 있는 극단성이 있음을 독자들에게 인식시킴과 동시에, 이 작품이 캐치 프레이즈대로 '세속적인 행복보다 자유로운 불행을 택한 사람들의 이야기'임을 납득시켜주는 역할까지 겸해 압도적인 여운을 안겨주기까지 한다. 이는 한국인 독자라서 후하게 하는 말이 아닌 세계 어느 나라의 독자라도 비슷하게 얘기하리라 확신한다.

 이 작품은 불륜은 기본에 이복 남내의 금단의 사랑 등 자극적인 소재가 넘쳐나지만, 작중 시게유키의 말마따나 사랑과 성에 관한 문제는 만연한 것인데 꼭꼭 숨겨 얘기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해 괜히 더 비밀스럽고 더 음습해지는 것 같다. 책의 수록작 모든 이야기에 이 말이 해당되진 않지만 대체로 사랑에 죽고 사는 이들의 방황이란 점에서 이 작품이 울리는 바는 국경을 넘어 내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개인적으론 표제작 '별을 담은 배'와 더불어 미쓰구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왜 나는 나일까'도 인상적으로 읽었는데,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열정도 존재감이 사라지는 심리와 그런 무력감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이 건전하든 불건전하든 어딘지 연민을 자아내 어딘지 가장 이입이 되는 이야기였다. 미쓰구의 딸인 사토미도 마찬가지였다. 얘는 사랑과 장래 모두 순탄치 못한 과정을 겪거니와 배신을 당하기도 배신을 하기도 하는 등 작중 인물 중 유일하게 과거가 아닌 현재 진행형으로 극적인 일을 겪기에 희로애락의 순간이 내 일처럼 가슴이 아렸다.


 작품의 등장인물 모두 미우나 고우나 응원하고픈 인물들이다. 마지막에 선을 넘을 듯 넘지 않은 아키라와 사에, 불륜 관계를 정리하고 새출발의 기미를 보이는 미키와 미쓰구, 할아버지인 시게유키를 통해 전쟁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일을 계획했던 대로 이룬 사토미, 오랫동안 품고 있던 비밀을 털어놓은 뒤에 하늘의 별이 됐을 전처와 후처가 타고 있을 배를 상상해보게 된 시게유키 모두 여섯 편의 수록작에서 살아 숨쉬어 경멸하면서도 격려하게 되는 입체적인 인물들로 다가왔다. 절대선도 절대악도 없는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라 생각하는데 이 작품이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소설에 완벽히 부합하지 않나 싶다. 그래서 책의 여운에서 못 벗어나는 것 같다.

 아... 이게 아닌데. 나름대로 분전했지만, 이번에도 책을 읽고 받은 감명을 완벽하게 풀어내지 못한 것 같다. 김난주 씨가 재번역을 했듯 나는 재재감상을 남겨야 할 듯하다. 세대를 아우르는 책의 내용의 특성상 여기서 십 년 뒤에 다시 읽어도 이번처럼 새로운 기분으로 다시 읽어내려갈 수 있을 테니 그날이 몹시 기대된다.

왜 이렇게 모든 것이 순조롭지 못한 것일까. 왜 나는 나일까. 대체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중략)‘뭐, 어때.‘
어디로 가든, 어차피 선로 위, 언젠가는 원치 않아도 어느 역에든 도착한다. - 288~289p

사과를 하고 마음이 편해져서 자신이 한 짓을 잊어버릴 정도라면, 차라리 사과하지 않고 후회를 껴안은 채 평생을 사는 것이 낫다는 얘기다. - 359p

행복이라 할 수 없는 행복도 있을 수 있지. - 453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리 포터와 저주받은 아이 1부 (무선) - 연극대본 해리 포터 시리즈
J.K. 롤링.잭 손.존 티퍼니 원작, 잭 손 각색, 박아람 옮김 / 문학수첩 / 201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9.2



 '저주받은 아이'는 시리즈의 정식 후속작이지만 팬들 사이에선 외전도 아닌 별개의 작품, 잘 쳐봐야 서비스 작품 정도로 취급받는다고 들었다. 이미 잘 완결난 시리즈의 후광을 제대로 잇지 못한 전형적인 '박수칠 때 떠나지 못한' 작품으로 평가하던데 그건 너무 박한 평가가 아닌가 싶다. 세세하게 따지면 설정 오류라든가, 아니면 과거를 경솔하게 바꾸었다는 이유로 극단적인 변화가 일어난 작중의 몇몇 전개는 코웃음을 유발하기도 했다. 세드릭 디고리가 창피를 당했다는 이유로 죽음을 먹는 자가 됐다는 건 '불의 잔'의 내용이 가물가물한 내가 봐도 너무 작위적인 것 같은데?

 그래도 볼드모트가 승리했다는 가정 하에 펼쳐진 평행세계에서도 아직 스파이로서의 임무를 수행 중인 스네이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도 좋았고, 세상을 구한 영웅이 곧 좋은 가장이리란 법은 없다는 듯 아빠 노릇을 힘겨워하는 해리의 모습도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물론 이 부분도 불만스러워하는 사람들도 많던데, '신비한 동물사전' 시리즈의 처참한 몰골을 떠올리면 해리가 실망스런 언행을 보이는 것쯤은 애교다. 시리즈의 팬층이 너무 두텁다 보니 사소한 요소에도 강한 비판이 가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결국 뚜껑을 열어봐야 알 수 있듯 작품의 전체적인 완성도, 아니 이 작품이 의도한 바는 사뭇 괜찮아서 즐겁게 읽었다. 오랜만에 원작 생각도 나서 좋았고 말이다.


 롤링이 이 희곡을 집필한 의도야 뻔하지. '해리포터' 시리즈의 추억을 되새기고 미래 세대들이 우여곡절 끝에 부모 세대가 이룩한 평화를 지켜나가는 모습을 관객들에게 어필한 것이다. 포터 부자는 반목하고 해리의 7년 간의 고생은 수포로 돌아갈 뻔했으며 아이들을 기숙사별로 나눠 갈등을 조장하는 호그와트의 병폐는 아직도 개선되지 않았지만 이 난관을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신파적이지만 의미 있는 결말을 자아냈다. 자신의 부모가 볼드모트에게 살해당하는 과거의 그 장면에서 이성을 잃은 해리가 아들 알버스를 비롯한 가족의 제지로 이성을 되찾는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시간과 역사의 흐름을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되는 인간의 무력함과 더불어 인간의 행복은 과거가 아닌 미래에 있다는 메시지도 엿볼 수 있어 이래저래 좋은 연출이었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이 작품은 소설이 아닌 각본, 즉 실제 무대에 상연할 것을 상정하고 집필된 희곡인데 이렇게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내용이 어떻게 무대에서 구현됐는지 궁금하다. 무대 연출에 관한 지문은 극히 단촐해서 이건 직접 무대를 봐야 알 수 있겠다. 생각해보니 무대용으론 고난이도의 시나리오였던 것 같다. 알면 알수록 연극의 세계는 놀랍기 그지없군. 이거야말로 마법 아닌가?


 영화 '신비한 동물사전' 시리즈는 완전히 망했고, 몇 년 뒤엔 '해리포터' 드라마가 나온다는 소식엔 기대와 비관이 동시에 터져 나오는 등 시리즈의 미래는 정작 밝지 않다. 이미 성공적으로 끝낸 시리즈를 몇 번이고 재탕하려고 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중이란 생각밖에 안 드는데... 해리의 이야기가 이젠 단지 돈이 되는 콘텐츠로 전락한 것 같아 팬으로서 불편하기 그지없다. 이게 롤링이 돈맛을 알아버린 탓인지, 주변이 시리즈의 덕을 보고 싶어 작가한테 너무 우쭈쭈해댄 탓인지 잘 모르겠군.

 배고픈 시절의 감성과 절박함을 다시 되돌리긴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롤링이 이제라도 정신 차리길, 소설가로서 분수를 지키기 바란다. 소설가는 소설을, 각본가는 각본을 담당하고 소설가는 제발 소설 속 이야기만 말했으면 좋겠다. 정치적 의견은 이제 그만. 그 의견도 소설 속에서 소설의 어법에 따라 말하란 말이다. 그전까지 잘해놓고 요즘엔 왜 그러는지 원. 에효, 여기까지 말하겠다.

어느 시점이 되면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지는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해. - 1권 207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