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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건 아니겠지? 2 - 어느 만화가의 시코쿠 헨로 순례기
시마 타케히토 지음, 김부장 옮김 / 애니북스 / 2014년 9월
평점 :
품절
10
세상에는 어째서... "꿈을 가져라!" 라거나 "꿈을 포기하지 말아라!" 라고 말하는 사람은 넘쳐나는데 '꿈을 잘 포기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사람이나 책은 없는 걸까요...? - 1권 91p
이 책은 아이러니하게도 꿈을 포기하러 떠난 막연한 순례길에서 만화의 소재를 찾게 된 자칭 실패한 만화가의 성찰이 담긴 논픽션 만화다. 6년 전에 이 작품을 처음 접했을 당시엔 내심 동정하며 읽었으나 지금 다시 펼치니 정말 나를 겨냥하는 얘기 같아 뜨끔하고 씁쓸해 한시도 가볍게 읽히지 않았다. 저자가 이 작품 이후로 어떤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는지 모르겠지만 이만한 결과물을 냈다면 다른 작품도 얼마든지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 작품을 통해 만족하고 펜을 꺾었다면 그 결정도 존중받아 마땅하며 언뜻 이해도 된다. 이만한 작품 이후엔 뭘 그려도 성에 차지 않아 일생 마지막 작품으로 남긴다 하더라도 여한이 없을 듯하다.
스페인에 산티아고 순례길이 있다면 일본엔 시코쿠 섬을 일주하는 오헨로 순례길이 있다. 시코쿠 전역의 88개의 절을 걸어서 순례하는 유서 깊은 순례길이며 몸과 마음이 벼랑 끝까지 몰린 사람들이 안식처로 오랜 세월 기대온 길이라는데, 종교적으로든 자기계발적인 측면으로든 뜻깊은 길이란 건 부정할 수 없겠다. 나 역시도 더 나이 들기 전에 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고, 설령 무엇 하나 얻지 못하고 허송세월에 그친다 하더라도 해보고 싶어졌다. 만약 내가 지금 포르투갈어를 배우지 않았더라면 새로운 인생의 활력을 얻고자 진지하게 알아봤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일단 포르투갈어 공부에 전념하고 싶어 더 나중 일로 미루련다. 포르투갈어를 배우기로 결심하기 직전까지 상당히 어지러운 나날을 보냈기에 지금 마음의 안정을 찾은 내 상황에 일단은 만족하고 있다... 나중엔 어찌 될는지 모르지만.
꿈... 한때는 소설가로 등단하는 것에 적잖이 목매달았지만 지금은 흐지부지된 지 오래다. 올해 소설 한 편을 끄적이지 않은 것에서 거의 확실해졌다. 물론 소설에 대한 구상이나 열망은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았지만 말로는 무슨 말인들 못하겠는가, 행동에 옮기지 않고 꿈이 있다고 말하는 건 꿈이란 단어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꿈에 대한 미련 때문에 포기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쓰든가, 취업이든 뭐든 다른 일에 전력투구하든가 해야 한다. 그걸 알면서도 몸이 움직이지 않은 것은 나란 사람이 그렇게 생겨먹은 것일까, 아니면 사람이라면 으레 그런 법인 걸까.
어쩌면 잠깐의 성찰로 그칠 지도 모를 순례길에 오르는 작중 모든 순례자들의 모습과 다종다양한 사연을 접하며 내가 그렇게까지 뒤틀린 사람이 아닐 수 있겠다는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정말이지 순례자들에게 적잖은 동질감을 느꼈고 저자가 오헨로 순례를 완주했을 때는 내 일처럼 먹먹하기까지 했다. 당연히 픽션이 어느 정도 섞였겠지만 정말 다사다난했고 사기꾼 같은 범죄자들도 대가를 치르고 귀신은 성불하는 등 산뜻한 결말과 연출까지 더해져 이 정도면 이 작가를 만신으로 칭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주인공이자 저자는 자기처럼 꿈을 잘 포기하는 방법에 대한 만화는 오다 에이이치로나 이노우에 타케히코도 그리지 못할 것이라며 창작에 대한 강한 자신감과 희망을 표출했는데 이러한 자신감은 실로 훌륭한 결실을 맺었다. 물론 저자는 세 걸음 떼기도 전에 같은 소재와 주제라면 그 두 작가가 더 잘 그릴 것이란 자괴감에 빠지지만, 이노우에 타케히코가 <리얼>을 완벽히 완결 내지 않는 한 이 작가에 대한 나의 인상이 쉽게 변할 것 같지 않다. 이 작가를 향한 동질감이나 동정표가 아닌 구성적으로나 서사적으로나 연출적으로나 완벽할 뿐더러 혼을 갈아넣었다고 봐도 좋을 만큼 깊이감이 남달라 꼭 비슷한 처지가 아니더라도 모든 사람들한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심지어 소재도 특이하니 더할 나위 없다. 순례자의 신분을 악용하는 사기꾼을 비롯한 각종 범죄를 다루는 측면에서 작가의 통찰력이나 현실주의적인 시각 역시 일품이라 말랑말랑한 말만 해대는 그저 그런 에세이로 여긴다면 큰코 다칠 수 있다. 자기계발의 성격을 띈 창작물 중엔 가끔 너무 오그라들고 뜬구름 잡는 얘기만 해 부담스럽거나 시간 아까운 경우도 있는데 이 작품엔 절대 해당사항 없는 얘기다. 제목만 제외하면 이 작품엔 오그라들거나 감성에 호소하는 요소가 일절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여담이지만 원제는 '걷는 헨로 수관(?)' 이라고 지극히 평범한데... 국내에 소개될 땐 더 임팩트 있게 바꾸는 데엔 동의하나 저렇게 길면서 대놓고 노린 듯한 제목이 과연 최선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마땅히 대안도 없는 주제에 더 지적을 이어나갈 염치는 없으니 여기까지 하겠는데 아무튼 겨우 찾은 단점이란 것이 요거 하나다.
다음엔 이 작품을 언제 읽게 되려나? 5~6년 뒤에 다시 읽으면 다르게 읽힐 수도 있겠다. 기왕이면 내가 오헨로 순례길을 본격적으로 준비할 때 읽으면 참 좋겠는데... 그날이 기대된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쉽지 않은 길이겠지만 그래도 그런 결심을 하게 되는 순간이 오길 기대해본다. 앞으로의 인생에 너무 위협적인 벼랑과 마주하지 않길 바라면서.
그렇게 말하기 전에 일단 해보라니깐! 당신처럼 제 입맛에 딱 맞아떨어지는 ‘자아‘만 찾게 되진 않으니까! - 1권 73p
자네는 어떤 인생을 산다 해도 반드시 후회하게 되어 있어! - 1권 92p
한 달 정도 걸어서는... 지금까지의 생활방식이나 성격은 변하지 않겠...지... 별로 변하지 않아도 상관없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분이 들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 2권 68p
나쁜 짓을 하려는 자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아. 가리는 것은 ‘상대‘뿐이지... - 2권 123p
붙잡는 고통이냐... 놓는 희망이냐... 어느 쪽이든 고통받을 거라면... - 2권 134p
여기까지 걸어올 수 있었던 건 모두 다른 사람 덕분이다. 지난 한 달은 그 사실을 절감하기 위한 과정이었을까...? - 2권 14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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