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 일기
최민석 지음 / 해냄 / 202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4


“…이렇게 가고 싶은 곳을 남겨둬야 사랑하는 도시로 다시 올 수 있다. 그 마음을 잃고 싶지 않다. 온 지구가 더는 ‘알아볼 게 없는’ 시시한 대상이 되는 게, 못 가본 아쉬움을 간직하는 것보다 더 슬프기 때문이다.” - 468p


 이전에 읽은 저자의 다른 에세이에 비해 이번 최신작이 유독 잘 읽혔다. 아무래도 내가 가본 마드리드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최신작인 만큼 저자의 필력이나 통찰력이 원숙해져서일까. 아마 둘 다이리라.
 처음과 끝을 완벽히 디자인하고 집필에 들어가야만 하는 소설과 달리 일기는 그날그날에 익힌 정보와 느낀 감정을 토대로 진행된다는 차이점이 있다. 때문에, 어제 알던 정보가 반전되기도 하며 조금은 미흡하거나 감상적이었던 사유가 뒷장에서 갈무리되는 경우가 빈번했다. 이런 예상할 수 없는 전개 덕분에 적잖은 분량임에도 읽는 맛이 상당했다.

저자의 유머 감각, 성실함이 빛을 발한 대목으로, 나 역시 글을 쓰고 싶단 생각을, 약간 질투에 가까운 감정을 실로 오랜만에 느끼게 됐다. 꼭 소설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최민석 작가가 스페인어를 배웠듯, 나는 포르투갈어를 현재 7개월째 배우고 있다. 10월 리스보아 대학교로 어학연수 갈 생각인데, 이게 다 포어가 흥미롭지만 낯선, 그렇지만 더 잘하고 싶은 오기를 유발하는 언어인 탓이다. 많은 영감을 주는 언어이기에 더 배울 수 있는 이 기회를 가급적 놓치지 않을 생각이다.

<마드리드 일기>를 읽다 보니 나도 리스보아에서 날마다 조금씩 일기를 남겨야겠다고 다짐하게 됐다. 블로그 여행기처럼 숙성된 글도 좋지만 책에서 저자가 한 말마따나 ‘일상의 무게에 납작하게 눌려 떠오르지 않는’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부지런히 쓸 생각이다. 아니, 지금부터 조금씩 쓰는 습관을 기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디오 체조 닥터 이라부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7



 정말 오랜만에 읽은 '이라부' 시리즈는 이전과는 다른 인상으로 다가왔다. 십여 년 전 고등학생 시절의 내게 이라부의 기행은 그저 천박하고 비호감일 뿐이었는데, 시간이 흐르고 그도 나이를 먹었는지 어딘지 상식적이고 촌철살인의 언행을 보여 내가 알던 그가 맞는지 살짝 의심스러웠다. 여전히 속물적이고 환자의 아픔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지만, 내가 변했는지 작가가 변했는지 아니면 작중 시대의 변화에 맞춰 그가 변한 것인지 확실히 뭔가 달랐다. 그런데 그게 기분 나쁜 다름은 아니었다.

 시리즈의 이전 작품들을 십여 년 전에 읽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확실히 달라진 점이 있다면 환자들의 태도다. 이전 작품들에서 환자들은 타의에 의해 이라부 앞에 앉혀지다시피 했고 자신의 병세를 부정하는 이가 대부분이었다. 허나 이번 <라디오 체조>에선 환자들이 먼저 자신의 병세의 심각함을 깨닫고 자진해서 이라부를 찾아가곤 했는데, 흘러온 세월 동안 정신과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구나 싶었다. 그 덕에 시리즈의 인상도 이전과는 달리 다가온 것일 수도 있겠군.


 이 책에서 딱 하나 의문인 점은 책 표지에 '오쿠다 히데오 장편소설'이라 적혀 있는 점뿐이다. 누가 봐도 단편소설집인데... 여하튼, 코로나로 인한 사람들의 일상과 심상의 변화에 대한 통찰이 담긴 두 편의 수록작을 비롯 분노 조절 장애, 광장 공포 등 좀 더 일반 대중들도 몰입이 가능한 병세와 환자들의 사연, 그리고 이라부의 무심한 듯 천부적인 카운슬링이 주를 이루고 있어 읽으면서 저절로 힐링이 되는 책이었다.

 수록작 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피아노 레슨'이었다. 아마 이 작품은 올해의 단편으로 두고두고 기억될 듯하다. 작중 환자에게 적절한 거리감을 주는 이라부의 태도는 과몰입과 무관심의 중간 지대에 걸쳐져 있어 상당히 본받을 만했다. 병원에 남아도는 헬기를 직접 몰아가면서 광장 공포를 충격 요법으로 해결해주려고 하면서도, 과도한 책임감에 짓눌린 환자에게 '그냥 나 몰라라 배째!', '일단 지각부터 해봐봐~' 등 남이기에 막 던질 수 있는 무책임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이처럼 속시원한 전개와 더불어 주인공의 성찰과 피아니스트라는 특수 직업이 갖는 고충과 극복 과정이 담겨 있어 읽는 내내 적잖이 흥미로웠다. 거기다, 강렬한 캐릭터성에 비해 비중이 애매했던 마유미의 활약 및 그녀와 같은 밴드 멤버들의 등장, 끝말잇기 고수인 피아니스트의 매니저 등 저마다 개성과 역할이 확실한 캐릭터들도 많이 등장하는 등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다채로워서 오래 기억에 남을 듯하다.

 피아니스트 매니저의 고향인 아마미오시마에서 맞이한 결말 역시 마찬가지다. 시차의 다름으로 인해 사람들의 시간 감각과 생활 리듬이 다를 수밖에 없고 그걸 받아들이며 한껏 여유를 찾는 주인공의 모습이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그녀 말고 책에 수록된 다른 작품 속 환자들도 저마다 멍에에 짓눌려 있는데 각자의 멍에를 집어던질 활로를 찾거나 때론 이라부조차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극복하는데 그들이 맞이한 결말이 마치 내 일처럼 통쾌했다. 


 연초에 각오를 다잡는 와중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이었다. 덕분에 나도 작중에 환자들처럼 어떤 멍에에 짓눌려 있는지 돌아볼 수 있게 됐고 그 멍에를 집어던질 단서를 얻은 것 같아 한결 가벼운 기분으로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 <공중그네>도 다시 읽으면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으려나. 그땐 그 작품이 나오키상을 수상한 것이며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이 약간 이해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어쩐지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꼭 올해 안에 다시 읽어봐야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자책] 트리플 세븐 킬러 시리즈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은모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8.7



 매화나무는 매화꽃을 피우면 돼. 사과나무는 사과를 맺으면 그만이고. 장미꽃과 비교한들 아무 의미도 없어. - 218p


 타인에 비해 운이 지지리도 없는 등장인물에게 던지는 위의 말은 안타깝게도 이 작품엔 해당되지 않았다. 너무나 뛰어난 전작들, 특히 <마리아비틀>의 생존자 나나오가 등장하는 이상 더더욱 두 작품을 비교할 수밖에 없다. 사유의 농도와 전개의 양상과 반전, 각기 다른 매력의 킬러들의 분투도 적어도 <마리아비틀>과 비교하면 한 수 아래로 보였다. 심지어 분량마저도.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 동안 작정하고 써내려간 대작인 전작에 비해 <트리플 세븐>은 전작의 인기에 기댄, 정확히는 전작이 영화화된 것에 삘을 받은 작가가 노래 가사 흥얼거리듯 써내려간 느낌이었다. 가령 이누이의 정체에 관한 반전은 이누이란 캐릭터가 존재감이 미묘해 그렇게 강렬하게 다가오지 않았고 6인조는 각자 개성이나 비중이 6등분으로 쪼개져 퇴장당할 때나 퇴장당할 때의 연출도 어딘지 시시했고 담요와 베개, 그리고 소다의 활약도 기대했던 것보다 저조했으며 무엇보다 상황에 딱히 변수를 주지 못해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가벼운 작품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신기하게도 읽을 당시엔 몰입도가 좋았고 결말엔 여운도 있었다. <마리아비틀>에 비해 순조롭게 해결된 편인 지라 해피엔딩이 작위적으로 느껴지긴 했지만 어쨌든 산뜻한 결말이라 마음에 들었다. 나나오와 적대하는 킬러들도 매력이 후달려서 그렇지 격투 장면은 박진감 넘쳤고 지루해지려고 하면 펼쳐져 페이지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물론 작가 특유의 통찰과 철학 역시 건재했는데, 운에 기대지 않는 철저한 계산과 불운한 스스로를 자책하지 않는 한 인물의 집념은 상당히 인상적으로 읽혔다. 스포일러 발언일 수 있는데 <도둑들>이 연상되기도 했다. 아무튼 연출이 미묘해서 그렇지 적어도 주제의식과 그걸 풀어낸 작가의 필력은 여전히 무시 못할 수준이었다.

 보아하니 시리즈의 후속작이 계속 나올 듯한데 시간이 얼마나 걸려도 상관없으니 다음엔 조금 더 공을 들여서 작정하고 집필해주길 바란다. 여러모로 정이 가는 캐릭터들이 재등장해줘서 반가웠던 만큼 시리즈가 이대로 끝나길 원치 않는다. 그렇다고 괜히 잘못 건드려서 안 쓰느니만도 못한 결과는 제발 만들진 말고. 인생과 마찬가지로 소설엔 잭팟이 없잖은가. 운에 기대고 던지는 것이 아니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것이 소설이라 생각한다. 이 작품의 주제의식을 되새기며 부디 더 멋진 작품으로 돌아와주시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 - 제1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임영태 지음 / 뿔(웅진)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8.0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다 자기 삶의 건조함과 만나는 건 언제라도 가능하다. 그러나 생의 의미를 찾아 멀리 떠날 것까진 없다. 의미는 사무실 소파 아래에 뒹구는 막걸리 통에도 얼마든지 있다. 의미를 몰라 인생이 건조해지는 건 아니다. - 12p


 12년 전에 읽었을 때 무려 10점 만점을 줬지만 다시 읽으니 그렇게까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는 작품으로 올해 여름에 본 영화 <퍼펙트 데이즈>와 결이 비슷하다. 대필 작가인 주인공에겐 여러 사건이 벌어질 듯하다가도 불발로 그치고, 때론 사별한 아내나 반려견과의 추억 그리고 회한과 속절없이 마주하거나, 대필 작가로서의 직업적 고충과 사명감 등 이모저모를 서술하며 독자에게 적잖은 흥미를 안겨주면서 주인공의 사무실 주변 동네의 풍경이 묘사돼 전에 없이 편안하게 읽히는, 한 마디로 매력을 특정하기 어려운 오묘한 맛으로 넘쳐나는 작품이다. 아, 멋부리지 않았지만 촌철살인인 작가의 문장력만은 모두가 인정하는 이 작품의 매력일 듯하다.

 아마 요즘처럼 일상의 소중함이 위협받는 시국이 아니라면 내가 이렇게 포스팅을 쓰는 일도 없었을지 모를 작품이란 생각도 든다. 일상의 사사로운 고민과 먹고 사는 문제, 장래에 대한 걱정만으로도 착잡한 와중에 시국마저 저 모양이니 일생의 즐거움조차 향유하기 눈치 보이는 요상스런 세상이 되고 만 느낌이다. 깨어있지 않으면 한심한 눈초리를 받는 분위기는 예전보다 덜해졌지만 상황이 전례가 없는 만큼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이거 참 어찌 될는지. 세상은 일상의 아름다움을 음미하기엔 다소 부적절한 곳이라는, 작품과는 그다지 상관없는 감상이 자꾸 머릿속에 맴돈다. 이게 작품의 문제는 아니고 나의 자격지심 내지는 세상의, 혹은 세상을 요지경으로 만든 장본인, 그리고 그 장본인을 믿고 뽑은 사람들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봐야겠지. 닭과 달걀의 문제, 뫼비우스의 띠가 연상되는구만. 자업자득이란 말은 너무 지독한 자학 같으니 쓰고 싶지 않다.

그러나, 가져갈 수만 있다면 사치는 가져가는 게 좋다. 정신의 사치는 우울증을 막아준다. - 18p

사람은 자기가 걸어 다니는 동네의 일만으로도 벅차다. 비열한 것은 세계가 아니라 개인들이다. - 19p

소설 되는 사람 있고, 소설 안 되는 사람 있고, 그러면 소설이 잘못된 거지 그 인생이 잘못된 거겠냐고. - 35p

절망까지 들여다보는 노련한 수사관이 있을까?
있다면 그건 노련함이 아니라 믿음일 것이다. 진실은 믿는 것이지 밝혀서 아는 게 아니다. - 98p

운명은 ‘모르는 것‘의 다른 이름이다. 아는 건, 안다는 그것으로 인해 운명이 아니다. - 207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설마,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건 아니겠지? 2 - 어느 만화가의 시코쿠 헨로 순례기
시마 타케히토 지음, 김부장 옮김 / 애니북스 / 2014년 9월
평점 :
품절


10



 세상에는 어째서... "꿈을 가져라!" 라거나 "꿈을 포기하지 말아라!" 라고 말하는 사람은 넘쳐나는데 '꿈을 잘 포기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사람이나 책은 없는 걸까요...? - 1권 91p


 이 책은 아이러니하게도 꿈을 포기하러 떠난 막연한 순례길에서 만화의 소재를 찾게 된 자칭 실패한 만화가의 성찰이 담긴 논픽션 만화다. 6년 전에 이 작품을 처음 접했을 당시엔 내심 동정하며 읽었으나 지금 다시 펼치니 정말 나를 겨냥하는 얘기 같아 뜨끔하고 씁쓸해 한시도 가볍게 읽히지 않았다. 저자가 이 작품 이후로 어떤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는지 모르겠지만 이만한 결과물을 냈다면 다른 작품도 얼마든지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 작품을 통해 만족하고 펜을 꺾었다면 그 결정도 존중받아 마땅하며 언뜻 이해도 된다. 이만한 작품 이후엔 뭘 그려도 성에 차지 않아 일생 마지막 작품으로 남긴다 하더라도 여한이 없을 듯하다.

 스페인에 산티아고 순례길이 있다면 일본엔 시코쿠 섬을 일주하는 오헨로 순례길이 있다. 시코쿠 전역의 88개의 절을 걸어서 순례하는 유서 깊은 순례길이며 몸과 마음이 벼랑 끝까지 몰린 사람들이 안식처로 오랜 세월 기대온 길이라는데, 종교적으로든 자기계발적인 측면으로든 뜻깊은 길이란 건 부정할 수 없겠다. 나 역시도 더 나이 들기 전에 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고, 설령 무엇 하나 얻지 못하고 허송세월에 그친다 하더라도 해보고 싶어졌다. 만약 내가 지금 포르투갈어를 배우지 않았더라면 새로운 인생의 활력을 얻고자 진지하게 알아봤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일단 포르투갈어 공부에 전념하고 싶어 더 나중 일로 미루련다. 포르투갈어를 배우기로 결심하기 직전까지 상당히 어지러운 나날을 보냈기에 지금 마음의 안정을 찾은 내 상황에 일단은 만족하고 있다... 나중엔 어찌 될는지 모르지만.


 꿈... 한때는 소설가로 등단하는 것에 적잖이 목매달았지만 지금은 흐지부지된 지 오래다. 올해 소설 한 편을 끄적이지 않은 것에서 거의 확실해졌다. 물론 소설에 대한 구상이나 열망은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았지만 말로는 무슨 말인들 못하겠는가, 행동에 옮기지 않고 꿈이 있다고 말하는 건 꿈이란 단어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꿈에 대한 미련 때문에 포기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쓰든가, 취업이든 뭐든 다른 일에 전력투구하든가 해야 한다. 그걸 알면서도 몸이 움직이지 않은 것은 나란 사람이 그렇게 생겨먹은 것일까, 아니면 사람이라면 으레 그런 법인 걸까.

 어쩌면 잠깐의 성찰로 그칠 지도 모를 순례길에 오르는 작중 모든 순례자들의 모습과 다종다양한 사연을 접하며 내가 그렇게까지 뒤틀린 사람이 아닐 수 있겠다는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정말이지 순례자들에게 적잖은 동질감을 느꼈고 저자가 오헨로 순례를 완주했을 때는 내 일처럼 먹먹하기까지 했다. 당연히 픽션이 어느 정도 섞였겠지만 정말 다사다난했고 사기꾼 같은 범죄자들도 대가를 치르고 귀신은 성불하는 등 산뜻한 결말과 연출까지 더해져 이 정도면 이 작가를 만신으로 칭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주인공이자 저자는 자기처럼 꿈을 잘 포기하는 방법에 대한 만화는 오다 에이이치로나 이노우에 타케히코도 그리지 못할 것이라며 창작에 대한 강한 자신감과 희망을 표출했는데 이러한 자신감은 실로 훌륭한 결실을 맺었다. 물론 저자는 세 걸음 떼기도 전에 같은 소재와 주제라면 그 두 작가가 더 잘 그릴 것이란 자괴감에 빠지지만, 이노우에 타케히코가 <리얼>을 완벽히 완결 내지 않는 한 이 작가에 대한 나의 인상이 쉽게 변할 것 같지 않다. 이 작가를 향한 동질감이나 동정표가 아닌 구성적으로나 서사적으로나 연출적으로나 완벽할 뿐더러 혼을 갈아넣었다고 봐도 좋을 만큼 깊이감이 남달라 꼭 비슷한 처지가 아니더라도 모든 사람들한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심지어 소재도 특이하니 더할 나위 없다. 순례자의 신분을 악용하는 사기꾼을 비롯한 각종 범죄를 다루는 측면에서 작가의 통찰력이나 현실주의적인 시각 역시 일품이라 말랑말랑한 말만 해대는 그저 그런 에세이로 여긴다면 큰코 다칠 수 있다. 자기계발의 성격을 띈 창작물 중엔 가끔 너무 오그라들고 뜬구름 잡는 얘기만 해 부담스럽거나 시간 아까운 경우도 있는데 이 작품엔 절대 해당사항 없는 얘기다. 제목만 제외하면 이 작품엔 오그라들거나 감성에 호소하는 요소가 일절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여담이지만 원제는 '걷는 헨로 수관(?)' 이라고 지극히 평범한데... 국내에 소개될 땐 더 임팩트 있게 바꾸는 데엔 동의하나 저렇게 길면서 대놓고 노린 듯한 제목이 과연 최선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마땅히 대안도 없는 주제에 더 지적을 이어나갈 염치는 없으니 여기까지 하겠는데 아무튼 겨우 찾은 단점이란 것이 요거 하나다.


 다음엔 이 작품을 언제 읽게 되려나? 5~6년 뒤에 다시 읽으면 다르게 읽힐 수도 있겠다. 기왕이면 내가 오헨로 순례길을 본격적으로 준비할 때 읽으면 참 좋겠는데... 그날이 기대된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쉽지 않은 길이겠지만 그래도 그런 결심을 하게 되는 순간이 오길 기대해본다. 앞으로의 인생에 너무 위협적인 벼랑과 마주하지 않길 바라면서.

그렇게 말하기 전에 일단 해보라니깐! 당신처럼 제 입맛에 딱 맞아떨어지는 ‘자아‘만 찾게 되진 않으니까! - 1권 73p

자네는 어떤 인생을 산다 해도 반드시 후회하게 되어 있어! - 1권 92p

한 달 정도 걸어서는... 지금까지의 생활방식이나 성격은 변하지 않겠...지...
별로 변하지 않아도 상관없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분이 들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 2권 68p

나쁜 짓을 하려는 자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아. 가리는 것은 ‘상대‘뿐이지... - 2권 123p

붙잡는 고통이냐... 놓는 희망이냐... 어느 쪽이든 고통받을 거라면... - 2권 134p

여기까지 걸어올 수 있었던 건 모두 다른 사람 덕분이다. 지난 한 달은 그 사실을 절감하기 위한 과정이었을까...? - 2권 142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