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묘한 러브레터
야도노 카호루 지음, 김소연 옮김 / 다산북스 / 201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9.7
'굉장한 반전'까지는 아니지만 몰입감이 엄청나고 잠시 동안 꿈쩍하기 힘든 결말이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서간문체의 형식이 십분 발휘된 등골 서늘한 연출도 인상적이었다. SNS 상에서 이뤄지는 대화, 이 글을 쓰고 있을 때 상대방이 짓고 있을 표정이 보이지 않는 데에서 오는 불안함, 무엇이 거짓이고 진실인지 파악하기 힘들어지는 엎치락뒤치락하는 후반부... 특히 새로운 진실이 드러날 때마다 두 주인공의 답도 없는 자기긍정을 읽고 있노라면 제3자 입장에서 실소를 넘어서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자기긍정도 이 정도면 거의 병이다, 병.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범죄자들 중에 꼭 '세상을 살다가 이런 상처를 입어서 이런 죄를 저지른 거야' 하고 합리화하는 부류가 많은데, 그런 얘길 들을 때마다 내가 직접 그네들을 찾아가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네들이 불만이 쌓인 건 알겠는데 그 불만을 당사자한테 가서 풀 것이지, 왜 같은 성별이나 계급, 인종의 사람에게 대신 풀려고 하느냐, 결국 아무것도 해소되지 않는 걸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으냐 하고 말이다. 작중에서 어떤 인물이 '누구나 죄인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다만 죄인이 될 기회가 올 뿐'이라며 타인을 용서하는 대목이 있었는데, 그 말은 곧 자기 자신을 향한 말이기도 하단 것이 최후반부에 밝혀졌을 때 소름이 돋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에게 한없이 나약하고 관대해지는 법이다. 그런데 대놓고 그렇게 살자니 자기가 생각해도 좀 찔리므로 타인을 챙겨주는 척하면서 스스로에게도 멍석을 까는 심리가 누구에게나 조금이라도 있진 않은지 생각해봤다. <기묘한 러브레터>는 전자책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는데 나는 그 비결로 바로 못났지만 현실적인 인물들의 심리를 들여다보며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낸 것을 꼽겠다. 그에 비하면 가독성이나 반전은 덤에 가깝다. 오히려 반전은 복선이 부족해 약간 급작스런 감도 있어 놀랍다기보다 얼떨떨했다. 접혀진 채 봉인된 페이지, 절대 먼저 읽지 말라고 출판사에서 엄금한 페이지엔 그리 대단한 내용이 있지 않았지만, 제목이 주는 인상과는 완벽히 결이 다른 한 문장이 적혀 있어 나는 읽고서 웃음이 실실 나왔다.
그 대사를 한 당사자도 그놈의 당혹스런 자기 긍정 때문에 마냥 과거가 떳떳한 인물이라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충분히 해봄직한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결혼까지 생각했을 정도의 두 남녀가 삼십 몇 년 만에 대화를 나누며 애틋함을 느끼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정색하며 눈을 희번덕거리는 것이 눈앞에 선명이 그려져 통쾌한 동시에 오싹한 장면이기도 했다. 나도 비슷하다면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인터넷이나 SNS 상에서 생판 얼굴도 모르는 남과 친밀한 척 대화를 하다가 간혹 비슷한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어 후반부에서의 두 인물의 설전 아닌 설전이 괜히 내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이 작품의 내용이 작가 지인의 이야길 각색한 것이라는데, 이런 일이 요새 은근히 비일비재한 모양이다. 얼굴이 보이지 않은 채로 거의 실시간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SNS는 때론 우리에게 큰 공포로 다가오곤 한다. 그 감각을 구현한 작가의 솜씨가 대단했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고 싶어졌다. 작가 소개란에 '복면작가'라고만 적혀 있어 더 궁금하다.
이 작품의 원제는 '기묘한 러브레터'가 아닌 두 인물이 대학 시절에 공연한 연극의 제목이라고 한다. 엄밀히 말해 뜬금없기로는 원제가 더한 편이지만, 그렇다고 기묘한 '러브레터'라고 바꾼 우리나라 버전의 제목이 더 좋다고 보기도 애매하다. 아~아주 넓은 의미에서 두 인물의 글이 러브레터의 범주에 들어간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일단 사랑이 완전히 진 뒤에 시작되는 이야기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결말까지 읽으면 러브레터와는 정반대의 글이기도 해 다소 무성의한 제목이란 생각도 들 수 있다.
하지만 초반부의 애틋한 분위기나 흥미를 끌어내는 측면을 생각한다면 러브레터라는 단어와 그 단어를 수식하는 '기묘한' 이라는 형용사는 비록 최선은 아닐지언정 차선으로는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여겨진다. 다시 말하지만 이 작품에서 두 인물이 SNS로 나누는 대화는 러브레터와는 근본적으로 결이 다르다. 서로에게 향했었던 감정을 고백한다는 점에서 러브레터라고도 볼 수 있겠으나 그 고백의 진의가 일반적인 러브레터하고 아주 달라서... 이 다음부터는 스포일러라 말하지 않겠다.
이 작품에 대해 얘기할 때 스포일러 신경 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얘기하다 보니 본작의 내용을 최대한 숨길 대로 숨긴 채로 감상을 밝히고 추천도 그런대로 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만큼 아무런 선입견 없이 접하길 추천하는 작품이며, 출판사의 광고에 낚여 너무 기대하지 말고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길 바라는 작품이다. 한 호흡 안에 독파할 수 있는 몰입도를 자랑하는 작품이니 여행 갈 때 비행기나 기차 안에서 읽기 이보다 적합한 작품은 없을 듯하다. 물론 어디서나 읽어도 괜찮을 작품이지만 얇은 책이고 페이지도 빨리 넘어가니 나처럼 여행 갈 때 기차 안에서 읽어보는 걸 강력히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