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
김이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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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10년 전에 읽었을 때 꿈도 희망도 없는 소설이라 여겼는데 다시 읽으니 꿈은 없을지언정 일말의 희망은 느낄 수 있던 소설이었다. 주인공의 억척스런 생명력을 느꼈기 때문일까, 가족보다 웬수라 부르는 게 바람직할 비루한 인물들이 주인공을 끊임없이 매춘의 낭떠러지로 밀어 넣지만, 그 상황에서도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며 이 정도면 최악까지는 아니라고 애써 힘을 내는 모습에서 적잖은 강인함을 느꼈다. 

 가난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면서 음식 장사가 아닌 성매매로 큰 재미를 본 왕사장네 백숙집에 대한 역겨운 묘사, 인물들의 찰진 비속어 대사 등 이래저래 실감 나는 묘사 덕에 한없이 우울한 내용임에도 속도감 있게 읽혔다. 주인공한테 미안한 얘기지만 내가 이 정도 수준의 가난을 경험할 일이 어지간하면 거의 없을 것 같고, 내심 거액의 빚을 지고 안 좋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사정엔 어느 정도는 자업자득의 측면도 있어서 어디까지나 '남의 일'이라 여기고서 읽었던 것 같다. 애써 그렇게라도 거리감을 두지 않으면 읽어나가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비참한 내용이기도 했고, 이야기의 생명력이 흘러 넘쳐 오히려 상상이나 여운을 가져볼 틈도 없이 완전히 남의 일로 받아들이기가 용이하지 않았나 싶다. 


 콩가루 가족 관계는 언제 파탄이 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고 주인공의 원래 목표였던 아기와의 관계도 소원한 편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위에서도 말했듯 일말의 희망은 느끼면서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 왕사장네 백숙집을 잠시 그만뒀을 때 다른 가게에서 일을 어쩜 그리 잘하냐고 칭찬을 받았을 만큼 일머리나 생활력이 강하고 또 손가락질을 당해도 어쩔 수 없지만 매춘을 했음에도 정신줄을 잃지 않은 인물이니 가족이란 굴레를 벗어던지기만 하면 지금보다 곱절은 더 상황이 나아지리란 기대를 품을 수 있었다. 물론 가족이 아무리 웬수 같다지만 단칼에 잘라내는 것은 주인공이 진정 바라는 일은 아닐 것이다. 주인공이 가족한테 화를 내고 욕을 하는 이유도 어떻게든 이 상황을 같이 개선하려는 끈을 놓지 않았기에 취한 태도였으리라. 

 나쁘게 말하면 호구인 것인데, 그도 그럴 것이 돈을 빌려달라면 주고 보증을 서겠다면 서고... 언제가 돼야 정신을 차릴는지 몰라도 나는 어째선지 조만간이라 생각됐다. 소설 말미에 왕사장네 가게에 가서 얼마나 시간이 흐른 뒤에 한계에 직면할 것인지 모르겠으나 마음속 어딘가에서 이미 답을 내렸을 것이다. 설령 인륜을 끊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딸과 함께 가족이란 굴레를 뛰쳐나와야 한다는 것을. 참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가난하면 가족의 연도 져버린다는 선택지를 고려해야 한다니. 하지만 가난하고 말고를 떠나 현상 유지는커녕 상황 악화를 초래하는 사람들을 언제까지 가족이라며 보듬어줘야 하는가 생각하면 가슴 아픈 일일 순 있어도 그렇게 비난할 만한 일은 아니고 충분히 선택지로써 고려할 만한 일이지 않을까. 


 제목의 '환영'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내 멋대로 생각해봤다. 관계라는 것은 얽매일 수밖에 없는 환영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때론 실체는 없고 환영에 불과한 관계가, 아니 그런 관계가 이 세상엔 은근히 많은 것 같다. 잡다하게 얽매였고 의무가 먼저 거론되는 관계는 가면 갈수록 환영처럼 사라지기 십상이다. 그렇기에 진리라면 진리일 수 있는 그 사실을 마음속 어딘가에서 분명히 인식하고 깨달을 대로 깨달은 주인공에게 희망이 있지 않으냐고, 읽는 내내 적잖이 느꼈던 것 같다.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다.
희망이 있다는 사실이 희망이었다. - 3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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