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
최승범 지음 / 생각의힘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8







 페미니즘 도서를 자주는 아니지만 종종 찾아 읽는데 이렇게 남자가 쓴 책은 처음 읽어봤다. 사실 페미니즘이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남성에게도 대단히 이로운 터라 이런 책이 나올 때도 됐는데 왜 나오지 않는 걸까 싶었던 터라 존재 자체가 반가웠던 책이다. 작가는 현직 남고의 국어 교사이자 학생들이나 주변 교사에게도 조심스럽고 은근하게 페미니즘을 전파하는 페미니스트로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만큼은 페미니즘을 올바르게 입문하게끔 교편을 잡았던 포부를 책의 형태로 넓히게 됐다고 한다. 여자가 썼느니 남자가 썼느니 하면서 성별의 구분이 큰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단언컨대 지금까지 읽은 페미니즘 도서 중 가장 뜻깊고 술술 읽힌 책이었다.

 작가가 페미니즘이나 젠더 감성에 깨기 시작한 계기가 평소 내가 생각한 부분과 크게 비슷해 동질감을 느꼈다.

 착한 아빠가 되기는 쉽고 나쁜 엄마 되기도 쉽다. 집안일 까딱 않고 가끔 유모차 끌고 동네 한 바퀴 돌아도, 명절에 한 번 설거지를 해도 사람들은 착한 아빠라고 부르지만 회사에 가사에 육아에 많은 일을 도맡다가 어쩌다 깜빡 잠이 들어 애가 감기에 들거나 회사에서 퇴근이라도 늦게 하면 나쁜 엄마 꼬리표가 바로 붙는다. 작가는 30대 중반의 남성으로 작가 본인의 이야기로 하여금 내용을 전개시키는데 어째 사례들이 하나같이 낯설지가 않았다. 한 가정 안에서 남녀의 불평등이 가정 안에서 끝날까? 그럴 리가, 우리는 가정에서의 남녀 차별은 극히 작은 일면에 지나지 않고 시대, 장소를 막론하고 퍼져있기 마련인 걸 간과해선 안 된다.


 이 책이 반갑고 유익했던 이유는 남자에게 왜 페미니즘이 필요한가에 대해 효과적이고 타당하게 역설하기 때문이다. 비단 남자는 진짜 페미니스트일 수 없다고 말하는 여성분들이 있는 걸로 아는데 그들의 논리는 이렇다. 남자의 태생적인 측면 때문에 진정으로 여성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 하지만 모든 남자가 반드시 한 사람의 어머니이자 여자의 자식인 이상 절대적으로 여성과 무관한 삶을 살 수는 없다. 결국 남자도 남자 나름이기에 상술한 가정의 남녀 차별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는 반면 작가처럼 불합리함을 느껴 자체적으로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시작은 어떨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페미니즘은 남자에게도 매우 이롭다는 게 이 책의 주된 논지다. 가부장적인 가치관은 남자 입장에서도 결코 달갑기만 한 것이 아니다. 책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페미니즘은 남성이 힘과 용기, 의지와 절제로 대표되는 견고하고 좁은 틀에서 벗어나 우는 남자, 말 많은 남자, 힘없는 남자도 괜찮다고 말한다. 군대 가라 떠밀고 데이트 비용과 집 장만의 부담을 주고 아담한 키나 작은 성기가 남성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주눅 들게 만드는 가부장제와 사뭇 다르다. 그런 연유로라도 모든 남성은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페미니즘은 성별을 떠나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시선을 늘 갖추고자 하기 때문이다.


 남자가 페미니즘을 공부한다고 하면 다소 낯설게 바라보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나만 하더라도 '남자가 어떻게 여자의 편을 드느냐'고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페미니즘이 여성의 전유물이라는 그들의 단정이야 그렇다 쳐도 확실히 남자 페미니스트가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임은 분명한 것 같다. 어떻게 보면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페미니즘에 있어 알게 모르게 오류를 범할 여지가 있다고 볼 수 있고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려는 위선이나 여성에게 얄팍하게나마 환영 받으려는 술수로도 비춰지는 것도 같다.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는 이런 맥락에서도 꽤 조곤조곤하고 겸손하게, 그러나 소신껏 입장을 밝히고 있다. 책의 제목에 페미니스트보다 남자가 먼저 들어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자니까, 모르니까 배워야 한다면서 가르침을 청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남자들은 아무래도 같은 남자의 말을 더 경청하는 경향이 있어서 자기 같은 남성 페미니스트의 역할도 중요하며 - 실제로 나 또한 이 책을 읽는 내내 일말의 거부감도 들지 않았다. - 아무리 당사자가 옳다고 여긴다 하더라도 불특정 다수인 상대방에겐 그저 공허하고 드세게 들릴 수 있는 페미니즘도 서서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얘기해야 효과적이라면서 실제로 교육자로서 실천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교육자라서 그런가, 그만큼 내공이 있어서 그런 건지 책이 짧기도 했지만 정말 막힘 없이 술술 읽혔다. 작가의 말대로 같은 남자가 쓴 글이라서 감정 이입이 더 잘 이뤄진 덕분일까.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가기엔 작가의 글이 남자한테만 잘 읽히는 글은 또 아닐 것 같다. 물론 이 책이 남자 독자를 대상으로 썼겠지만...

 불과 4월에 출간된 책이 6월에 5쇄를 찍은 것을 보면 이 책이 꽤 잘 팔리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혹자가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 라고 말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확실히 그냥 나온 말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단순히 요즘의 경향이 페미니즘이기 때문에 이 책이 잘 팔린 것이라고 치부하고 싶진 않다. 마찬가지로 남자로서 페미니즘을 얘기하는 게 퍽 부담스러웠을 작가가 부던히 노력한 결과가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책은, 페미니즘은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라 우리들의 미래라고 말하는 나에게 있어 언제나, 어디에서나 읽혀야 할 책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3
우타노 쇼고 지음, 현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9.4







 막 찾아 읽진 않지만 한번 읽으면 빠져나오기 힘든 게 본격 추리소설인 것 같다. 본격 추리소설 자체가 공식이나 클리셰 투성이인 장르라 식상할 것 같지만 그래도 막상 접하면 작품마다 다 다르다. 본격이라는 틀 안에서의 변주란 정말이지 읽기 유쾌한 구석이 있다.

 이 책은 우타노 쇼고가 본격 추리소설의 테마 중 하나인 클로즈드 서클을 본인만의 스타일로 다룬 작품집이다. 8년 만에 두 번째로 읽으니까 이 작가의 개성이 그야말로 '냉소'와 '로망', 두 단어로 규정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표작인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이나 '밀실살인게임' 시리즈에서도 그런 느낌이 나지만 이렇게 3개의 단편- 정확히는 거의 중편에 달하는 분량 - 을 읽을 때도 느껴지니 생각 이상으로 본인만의 세계가 확고한 작가인 것 같다.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


 표제작이 가장 재밌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작품. 뒤에 수록된 두 작품보다 나중에 써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급하게 써서 그랬는지 추리보다 풍자의 요소가 짙었다. 때문에 추리소설과는 거리가 있지만 풍자하는 대상이 본격 추리소설과 거기에 등장하는 탐정들이라 제법 요긴하게 읽혔다. 한마디로 냉소적이기론 둘째 가라면 서러울 작품이었다. 돈만 밝히며 정의 구현에 관심조차 없는 탐정, 하지만 명탐정의 화신에 걸맞는 두뇌를 갖고 있는 탐정은 그 두뇌를 해선 안 되는 짓에 활용하고 만다. 앞에서 말했지만 추리소설적인 묘미는 떨어지나 추리소설을 코난이나 김전일 같은 작품부터 접한 사람이라면 굉장히 킥킥거리며 읽게 될 것이다. 제목도 참, 쓸데없이 멋있게 지었고...



 '생존자, 1명'


 사이비 종교의 신도 4명이 폭탄 테러를 저지르고 무인도로 피신한다. 하지만 그 섬에서 사람들이 하나 둘 시체로 발견되면서 펼쳐지는 불가사의한 연쇄살인극이 발생하는데... 범죄자란 신분 때문에 섬에서 구조 요청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자꾸 사람들이 살해당한다는 게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아 읽는 내내 불길했고 마지막 범인의 정체나 결말은 범인만의 논리적인 광기 - 광기는 논리적일수록 무서운 법이다. - 가 제대로 드러나서 무서움이 배가됐던 작품이다. 범인의 계획의 마지막 부분이 도박이나 다름없다는 점은 좀 깼고 트릭의 난이도도 낮은 편이었지만 클로즈드 서클만의 분위기가 잘 살아났고 무엇보다 연출이 뛰어나서 상당히 흡입력 있었다. 8년 전에 처음 읽었을 땐 수록된 3작품 중 이 작품이 가장 재밌었다. 여담이지만 이 작품이 가장 본격적이라서 본 작품집에선 제일 이질적이기도 했다.



 '관이라는 이름의 낙원에서'


 8년 전엔 '생존자, 1명'이 제일 좋았다면 요번엔 이 작품이 제일 좋았다. 저택이나 섬 등 그런 환경이 고립되는 경우는 보통 자연재해인 경우가 많아 긴박감이 최고조를 찍는 연출이 많은데 이 '관이라는 이름의 낙원에서'는 그러한 연출과는 정반대다. 본격 추리소설하면 깜빡 죽는 부부가 자신들의 로망을 현실적이고 디테일하게, 그리고 스케일에 있어서도 타협이 없는 방식으로 실현해낸다. 이른바 서양식 저택에서 펼쳐진 살인극을 베이스로 연극을 해보자는 내용인데 대학 시절 추리소설 동아리에 소속된 친구들끼리 펼쳐지는 이 연극은 뜻밖의 감동을,  <벚꽃~>과는 결이 다르지만 이 작품도 로망과 아름다움을 선사해준다.

 표제작이 '냉소'를, 이 작품은 '로망'을 담아냈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차이점은 전자는 추리소설적인 재미가 평범한 것에 비해 후자는 추리소설적으로도 걸출하단 것이다. 결코 그냥 나오지 않은 서술들 - 화자가 대놓고 강조하긴 하지만 - 에선 조형미가 느껴졌고 관의 특성에 맞는 물리적인 트릭 역시 기발했다. 이 맛에 본격추리를 읽는 것이라고 혼자 고개를 주억거릴 정도였다. 가히 중증에 가까운 추리소설 애호가의 모습은 처음엔 헛웃음이 다 나왔지만 이내 순수하게 존경하게 되니... 어떻게 보면 극단적이지만 이것도 참 좋은 인생이구나 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닭답게 살 권리 소송 사건 - 빼앗긴 권리를 되찾으려는 동물들의 고발장
예영 글, 수봉이 그림, 김홍석 감수 / 뜨인돌어린이 / 201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3






 동물이라면 살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다른 동물에게 피해를 입힐 수밖에 없다. 인간의 경우엔 먹이 사슬의 최정점에 있고 하니 여러 생태계의 동물들에게 피해를 끼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개중에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기도 하다. 당장 소, 돼지, 닭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린 그들의 맛에 너무 길들여져 당장 포기하라고 해도 쉽지가 않은 실정이다. 정신적인 부분에서도 물론이고 이미 사회에 대규모로 자리잡은 사업이라서 혹여 전면적으로 금지당할 시 피해를 입을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동물이 동물답게 살 권리를 갈취한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그래도 늘 우리는 어쩔 수 없다면서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안이 있다면, 조금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혹시 관성에 젖어서 그 대안을 외면하는 것뿐이라면 지금 당장 행동에 옮겨야 한다. 우리들에게 인권이 있듯 동물에겐 동물권이 있으니까.


 이 책은 어린이용 도서로 사람의 이익 때문에 동물권이 갈취당하는 것을 동물의 의인화로 표현한 소설집이다. 처음엔 의인화 특유의 생뚱 맞은 화법에 적응이 안 됐지만 엄청난 주제의식 덕분에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상당히 진지하게 몰입하고 있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이 의인화가 대단히 잔인한 연출이 아닌가 싶다. 인간이 동물을 착취하는 이유가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고 이는 곧 동물은 인간보다 하등하고 지능이 떨어지는 생물이라 여기는 커다란 요소일 터다. 그런데 이 책에서처럼 동물들이 말을 하고 감정을 느끼리라 상상해보면 당장 입고 있는 옷에 모피랑 털이 얼마나 들어갔고 아까 먹은 고기가 어떤 식으로 내 식탁 위로 올라왔는지도 자동적으로 연상돼 실로 기분이 찝찝해지고 만다.



 '강아지 탐정이 전하는 킁킁이의 안부'


 유기견을 추적하는 탐정견의 수사 일지. 가족끼리 미국으로 이민을 가 강아지 킁킁이를 놓고 올 수밖에 없던 상황에서 혼자 킁킁이를 그리워하는 의뢰인과 매일을 주고 받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제대로 책임질 자신이나 각오도 없는 사람들을 만나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킁킁이의 삶이 그려져 자못 가슴이 아팠다. 또 '애완동물'보다 '반려동물'이라 부르게 된 이유가 새삼 피부로 느껴지기도 했다. 외모만 보고 충동적으로 구매한 동물이더라도 엄연히 가족이고 <어린 왕자>에 나오는 말처럼 길들인 것엔 책임이 있으므로 함부로 버려선 안 될 것이다. 결말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말이었지만 연출 때문에 끝까지 조마조마하고, 그래서 더욱 안타까웠다.



 '북극곰 기적이의 출생의 비밀'


 동물원에 언제 갔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모르긴 몰라도 아마 평생 갈 일이 없을 것이다. 동물원이야말로 인간의 이기심이 미화된 장소라 생각하는데, 단적으로 말해 그곳에 갇혀 있는 동물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동물을 구경하고 싶다는 인간들 때문에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살지 못하다니, 지나치게 동물을 괴롭히는 비인간적인 처사라고 생각한다.

 북극곰은 특히 기온이 완전 다른 환경인 만큼 더욱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극단적인 우울 증세, 자기 새끼에게도 반응하지 못하는 모습은 인간이고 동물이고를 떠나서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있는 상태라고 보기 안쓰러울 정도다. 인간의 이기심 때문에 망가지는 동물의 본능을 보노라니 내가 다 미안했다.



 '토끼 1369번의 마지막 하루'


 인간의 발전을 위해서는 작은 희생이 뒤따라야 한다는 미친 과학자들을 창작물에서 자주 접하곤 하는데 그때마다 실험 동물로 쥐나 토끼가 많다. 때론 인간을 실험 대상으로 삼기도 하는 극단적인 설정도 보지만 그럴 때면 상대적으로 쥐나 토끼의 존재감이 옅어지는 것 같다. 생명을 똑같이 하대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건만.

 24시간 동안 인간에게 실험을 당하느라 서서히 죽어가는 토끼의 심리를 소름 끼치게 묘사한 이 작품은 정말 암울하기 그지없다. 오늘이 끝나면 편해지리란 희망을 갖지만 마지막에 결국 영원히 편해지는 것을 바라다니... 픽션이고 의인화 설정이라고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이야기였다. 듣자하니 동물 실험이 곧 인체에 나타나는 효과를 완벽히 예측할 수 없다고 하고 대안도 있다는데 이제 이런 잔인한 짓거리는 하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닭답게 살 권리 소송 사건'


 표제작. 인간의 편의를 위해 무지막지하게 좁아터진 사육장에서 알을 낳는 것 외엔 허락되지 않은 닭들이 '닭답게 살 권리'를 호소하며 벌어지는 재판의 풍경을 그린 작품이다. 결국 판결은 보류됐지만 작중에 나온 말마따나 이 재판이 크게 주목을 받은 것만으로도 의의가 있으리라 본다. 효율을 위해 털을 벗기고 부리를 자르고 좁은 우리에 세 마리씩 집어넣고... 이 문제에 대해서 남들과 똑같이 닭을 즐겨먹는 내게 지적할 자격이 없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런 식이라면 이 문제는 영원히 제자리 걸음일 것이다. 내가 닭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려면 어떠냐고 생각한다면 언젠가 내가 누군가에게 같은 취급을 당해도 할 말이 없을 테니까.

 초반에 언급한 것처럼 인간의 경제적인 문제가 깊숙이 관여된 사안이라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이제 대안을 강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잘못된 줄 알면서 그냥 넘어가는 건 할 짓이 못 되니까.



 '경주마 전력질주의 첫째 주 일요일'


 어렴풋이 경주마들도 힘들겠지 싶었지만 그게 말의 본성과 거리가 있어 매년 죽어나가는 말이 많을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말이 빨리 뛸 수 있단 점에 주목해 인간은 말을 전력질주하게끔 길들였지만 본래 말들도 뛰고 싶을 때 뛰고 싶은 하나의 자유로운 생명이다. 작중에서 경주마 전력질주가 경기를 치를 때마다 먼저 결승선에 도달하는 쾌감은 분명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쾌감이라 자기도 덩달아 느껴지는 것일 뿐이고 오히려 말들은 고된 훈련과 경기 전 폭발할 듯한 긴장감 때문에 결코 행복해하지 않는다. 경마장도 동물원처럼 인간의 재미를 위해 동물을 전시하는 곳이라 할 수 있는데 정말... 잔인하지 않은가, 우리.



 '밍크 농장에서 온 편지'


 소재나 전개는 유기견과 토끼 이야기와 흡사했지만 가장 잔인하고 슬펐던 이야기다. 인간의 사치품을 위해 털을 바치고 잔인하게 살해당하고 남은 고기는 동족에게 먹이로 던져지는 등 구역질이 나는 내용이 담겨있다. 처음엔 희망을 가졌던 주인공 밍크가 자기 엄마에게 보내는 가상 편지에 점점 희망을 버리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한편으로 빨리 죽는 게 낫다고 적는데...... 이런 내용을 쓰는 작가의 내면이 무너지진 않았을지 걱정될 만큼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을까? 인간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돌아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봇도 사랑을 할까 - 트랜스휴머니즘, 다가올 미래에 우리가 고민해야 할 12가지 질문들
로랑 알렉상드르 & 장 미셸 베스니에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1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8.2






 극단적인 기술 옹호론자와 기술 이전에 논의돼야 할 문제를 언급하는 철학가 둘의 대담집. 프랑스인들의 대화라 그런지 가식 없이 직설적이고 양보 없는 설전이 인상적이었다. 책 제목만 보면 로봇 얘기만 나올 것 같지만 인간의 몸을 기계로 교체하는 것부터, 인공지능에 대한 준비, 신기술에 따른 정치적 변화나 SF 속 디스토피아가 현실이 되지 않으려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등 다방면에 대한 얘기가 담겨있었다.

 개인적으로 트랜스 휴머니즘은 우생론인가 여부를 따지는 건 너무 고차원적이고 민감한 나머지 어떨 때는 '이 둘... 지금 하나 마나 한 얘기를 하고 있는 거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일단은 내 이해력이 미치지 못한 걸로 여기고 넘어가려 한다. '로봇도 사랑을 나눌 수 있을까'란 질문에 대해서도 저자 둘이 사랑을 플라토닉적인 사랑이 아닌 육체적인 사랑을 먼저 언급할 땐 '역시 프랑스인이구나' 싶으면서 이 역시 하나 마나 한 이야기가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내 이해력이 저자 둘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 걸로 이해하기로 했다.


 인공지능을 비롯한 여러 기술은 우리를 상상하지도 못한 미래로 안내해줄 것이다. 기술이란 게 늘 그래왔지만 인공지능은 인간의 생존에 큰 영향을, 자칫하면 인간을 쓸모없는 존재로 격하시킬 우려가 있을 만큼 초월적인 기술이라 이렇게 미리 논해보는 건 퍽 바람직하다. 난 아무래도 다급하고 독선적인 기술 옹호론자보단 철학자의 말이 더 와 닿았는데 이런 감상도 시간이 지나면 또 바뀔지 모르겠다. 아직 인공지능의 진정한 성능이 그렇게 보급화되지 않은 시점에서 비전공자가 상상으로만 넘겨짚기엔 좀 버거운 주제인 듯하다.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짧게나마 대담 형식으로 풀어나간 것도 좋았고 은근히 합의점이 있을 듯하다가 평행선을 달리는 저자 둘의 의견 차이를 지켜보는 것도 재밌었지만 묘하게 내용이 기억에 남진 않아 읽어놓고도 찜찜한 기분이다. 내가 그만큼 이공학적 지식이나 미래에 대한 사회학적 상상력이 부족한 걸로 넘어가야...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봇 중독 아름다운 청소년 17
김소연.임어진.정명섭 지음 / 별숲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6







 인공지능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인간이 걱정해야 할 일은 어떻게 인공지능을 이기느냐가 아닌 어떻게 적응하느냐라고 한다. 결국 언젠가는 인공지능이 없어서 못 사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데 아무리 얘기를 들어도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럴 때 SF 소설이 갖는 의의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겠는데 이번에 읽은 SF 엔솔로지는 청소년 대상 소설들치고도 어지간한 성인 독자층도 아우를 수 있을 내용들이라서 뜻밖의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엔솔로지가 여러 작가가 참여하는 이상 수록작들 퀄리티가 고를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데 어느 작품 하나 빠지는 구석 없이 개성적이고 완성도 있어서 여러모로 만족스러웠다.



 '특이점을 지나서'


 인공지능 로봇이 특이점을 지나면 인간과 구분할 수 없게 된다는 개념 하에 진행되는 소설. 우리 시대엔 작중에서의 이니 같은 학생 로봇이 피부로 와 닿지 않지만 그 대신 입시 문제, 진로 상담, 심지어 데이트 폭력 등 우리네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사회 문제들과 적절히 녹여내 상당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국가 차원에서 일괄적으로 적성을 분석해 학생마다 진로를 정해준 탓에 무비판적이고 무기력하게 학교를 다니는 주인공이 의지하는 건 남자친구 한 명밖에 없는데 그 남자친구란 놈은 자기 입시 스트레스를 주인공에게 폭력적으로 풀어버린다. 그 와중에 주인공네 반에 전학을 온 학생 로봇은 당장 공공의 라이벌로 취급돼 이야기에 긴장감을 조성한다.

 어렸을 때 시키는 대로 생각없이 움직이면 '넌 애가 왜 이렇게 로봇 같니?'라고 부모님한테 한 소리 들었는데 그때 들었던 말이 많이 떠오른 작품이었다. 인공지능을 다룬 SF 소설이 결국 인간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기준에 매우 알맞는 내용으로 남이 지시한 대로, 남자친구한테 모진 취급을 받던 주인공이 자기 꿈을 찾아가는 과정을 매우 흡입력 있게 그려냈다. 더군다가 주인공의 꿈이 로봇이 정복할 수 없는 분야인 음식이라니 더욱 통쾌했다. 인공지능의 특이점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사람들의 특이점에 대한 이야기라서 감동이 남달랐던 작품이다.



 '로봇 중독'


 세계관을 보면 바로 직전에 나온 소설보다 확실히 디스토피아적이다. 그래도 소설은 자못 유쾌하게 진행되는데 여기서도 인간에게 깨달음을 주는 로봇이 등장하며 주인공과 로봇의 관계가 훨씬 유기적으로 그려지기까지 해 주제의식이 매우 선명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3D 프린팅 기술로 작은 로봇을 마구 만드는 주인공이 로봇의 생명이라는 것을 깨달아가는 내용인데 제목에 있는 중독이라는 단어도 부족할 만큼 아예 무감각하게 로봇을 착취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판이라 옆에 있는 로봇 지니와 주인공과의 유대가 더욱 돋보였다. 로봇에 생명을 주고 생각할 능력까지 준 인간이 가벼운 기분이나 책임감으로 로봇을 대해서는 안 된다는 걸 굉장히 진지하고 효과적으로 역설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감동적이기론 책에 수록된 세 작품 중 가장 월등한 작품이다.



 '거짓말 로봇'


 <명탐정의 탄생>을 쓴 정명섭 작가의 작품으로 사실 그 책을 읽고 추가적으로 알게 된 게 바로 <로봇 중독>이다. 아무튼 그 유명한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을 위반한 로봇, 거짓말을 하는 로봇이 등장하는 소설로 작중 배경이 화성이라 여러모로 고전적인 SF의 풍미가 가득한 소설이었다. 최근에 읽은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에서도 그렇고 20세기 중후반부의 SF 작가들은 다른 행성으로의 이주를 배경 설정으로 많이 그린 것 같아서. 이 얘기도 지금 듣기에 황당무계하지만 언젠가 우리가 마주해야 할 현실일 것이고 그 정도는 가능한 과학 기술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퍽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때가 되면 로봇은 선택이 아닌 필수적인 존재로 거듭나게 될 것이고. 솔직히 작품 자체의 설정은 그렇게 신선하지 않았지만 풀어나가는 방식이나 결말이 진지해서 이번에도 뜻밖의 묵직함을 얻게 됐다. 이런 식의 결말은 SF의 전매특허라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개인적으로 작가의 추리소설보다 이 SF 소설이 더 인상 깊게 읽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