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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바이를 깨드립니다
오야마 세이이치로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19년 8월
평점 :
품절
8.3
흔히 본격 미스터리라고 하면 밀실 공간에서의 살인과 철벽의 알리바이가 양대산맥으로 꼽히곤 하는데 전자에 천착하는 작가는 봤어도 후자의 경우, 알리바이만 전문으로 다루는 작가는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지금 기억나는 건 마쓰모토 세이초의 <점과 선> 정도? 그 작품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장편소설이라 이번에 읽은 <알리바이를 깨드립니다> 같이 단편집으로 접하긴 처음이지 않았나 싶다.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일본 추리소설로 탐정역을 맡은 시계점 주인이 사건을 해결했을 때, '시간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같은 멘트를 치는 게 특히 일본 추리 드라마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혹시 드라마화를 염두에 두고 쓴 게 아닐까 싶었는데 사건의 전개에 어떤 군더더기도 없어 - 예를 들면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 사이에 어떤 썸도 없는 것 - 더욱 일본 드라마가 연상됐다.
책에 수록된 단편들은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고른 편이다. 이 책을 읽은지 2주가 넘었는데 아직도 기억나는 작품이 있고 읽고난 직후에도 인상이 흐릿한 작품도 있었다. 딱 한 작품만 제외하고 항상 전형적인 안락의자 탐정물로 전개돼서 물릴 법도 했지만 알리바이 트릭들의 수준 자체는 준수해서 한두 편씩 끊어서 읽으니 그런대로 물리지 않고 괜찮았다. 작가가 내놓는 트릭의 스타일이 주로 우연이 개입해서 완성된 알리바이인 경우가 많은데 그걸 간파하는 탐정 캐릭터의 솜씨가 제법이라 - 제법일 뿐더러 너무 초월적이기도... - 순수하게 감탄한 적도 많았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국내에 더 소개됐으면 좋겠다.
'시계방 탐정과 스토커의 알리바이'
첫 번째 수록작. 대망의 첫 번째 에피소드에 적합할 비범한 트릭을 다루고 있다. 이성적으로 추론해봤더니 아무리 말이 안 된다 할지라도 그게 답이라는 추리소설의 공식을 잘 보여주는 수작이다. 개인적으로 트릭의 난이도만큼이나 사건의 내막이 더 기억에 남았다. 트릭이 어떻고를 떠나 이 작가의 성향을 엿볼 수 있었다. 단순히 지적 쾌감의 추리소설을 쓰려는 작가는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다.
'시계방 탐정과 죽은 자의 알리바이'
범인은 자수를 했고 사건이 해결되는 듯했는데 알리바이가 성립하지 않아 미궁에 빠진다는 특이한 시작점의 작품. 피해자의 행동이 예측불허해서 좀 사기적으로 비춰졌지만 그걸 또 해결하는 탐정이 더 사기적이라... 여담이지만 사건의 범인이 알리바이 트릭을 전문으로 다루는 추리소설가란 설정인데 그가 창조한 가상의 캐릭터와 관련된 문장들이 뜬금없지만 재밌었다. 이렇게나 우연이 개입된 미스터리를 누군들 풀 수 있을까 하고 자조하는 마지막 문장도 일품이었다.
'시계방 탐정과 할아버지의 알리바이'
'알리바이는 대게 시계와 관계가 있는 일'이라는 이유로 알리바이도 깨준다는 알다가도 모르겠는 사업 방침을 갖고 있는 시계방 탐정의 할아버지가 손녀를 어떻게 훈련시켰는지 엿볼 수 있는 단편. 긴장감은 다른 수록작보다 약했지만 이야기나 트릭의 완성도는 좋았다. 이런 소소한 일상을 통해서도 추리소설은 성립한다는 걸 잘 보여준 작품으로 이전까진 의뢰를 받고 해결하기만 했던 시계방 탐정 도키노의 과거를 알 수 있어 의의가 남달랐던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야 비로소 캐릭터가 선명해졌달까.
'시계방 탐정과 다운로드의 알리바이'
범인이 마련한 알리바이가 은근히 치밀했음에도 그리 인상적이진 않았다. 대신 잡히고 나서 보인 범인의 반응이 인상적이었다. 긴 시간에 걸쳐 공을 들인 회심의 트릭이었음에도 결국엔 친구를 이용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오히려 트릭이 까발려진 게 후련하다니... 첫 번째 에피소드 때와 마찬가지로 작가가 추구하는 추리소설의 이미지를 엿볼 수 있어 뜻밖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도 일종의 수미상관 기법이라 할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