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줄에 걸린 소녀 밀레니엄 (문학동네) 4
다비드 라게르크란츠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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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이런 말하긴 좀 그렇지만, 이 책이 나온 것은 사실 어떻게 보면 원작을 쓴 스티그 라르손에 대한 대단한 실례라고 할 수 있다. '밀레니엄' 시리즈를 3부까지만 쓰고 심장마비로 세상을 뜬 스티그 라르손은 자신의 작품이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되는 걸 보지 못한다. 그로 인해 엄청난 돈을 벌리란 것도, 그 돈이 자신과 사실혼 관계였던 연인이 아니라 의절했던 원수 같은 아버지와 형제에게 가는 꼴도 죽은 사람으로선 알 길이 없다. 난 사후 세계를 믿지 않는 편인데 만약 사후세계가 있고 그 세계에선 이승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대로 관찰할 수 있다면 스티그 라르손은 두 번 죽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평생을 스웨덴 사회의 부조리함을 고발한 그가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또 하나의 부조리를 낳다니 이 무슨 부조리란 말인가. 난 천국도 지옥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설령 스티그 라르손이 천국에 갔다고 해도 마음만은 지옥에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싶다.

 작가의 연인과 유가족은 시리즈의 인세를 두고 엄청나게 다퉜다고 한다. 생전에 극우파 때문에 목숨을 위협하는 일이 잦았던 작가는 자신의 연인과 혼인은 하지 않고 동거만 했었다. 즉, 연인이 유일하게 스티그 라르손의 가족이라 할 만한 사람임에도 법은 실질적인 혈육인 아버지와 형제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에 분개한 작가의 연인은 미완성인 4부의 원고를 세상에 발표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고 작가의 아버지는 합의안으로 자신과 재혼하면(;;) 유산을 나눠주고 대신 더 돈이 될 4부의 원고를 출간하자고... 이렇게 지독히 폭력적인 진흙탕 싸움이 이어지다가 결국 새로운 '밀레니엄'의 작가를 섭외함으로써 싸움은 저 쓰레기 같은 스티그 라르손 혈육의 승리로 돌아갔다고 한다.


 새로운 작가 다비드 라게르크란츠가 쓴 <거미줄에 걸린 소녀>는 누가 뭐라건 간에 시리즈의 정식 후속작이다. 위에 열거한 작품 외적인 요소를 알고 보면, 또 굳이 그런 걸 모르고 보더라도 어쨌든 스티그 라르손이 쓴 전작과 비교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 후속작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기자 출신인 스티그 라르손보다 더 전문적인 소설가가 썼기 때문인지 문장이나 캐릭터 설정은 더 정갈해졌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스토리가 애매모호하다는 게 아쉬웠다. 분량에 비해 가닥이 안 잡히는 서사는 흡입력이 떨어지고 이야기의 발동도 늦게 걸려 지루한 면도 적잖았다. 캐릭터가 많은 것에 비해 각각의 활약은 미미하고 대놓고 후속작을 위한 떡밥만 남긴 것 같아 개별적인 작품으로서의 매력은 떨어지는 편이다. 특히 리스베트의 동생 카밀라의 등장은 뜬금없었는데 이 부분은 너무 전작을 의식한 탓에 범한 무리수라고도 여겨졌다.

 무엇보다 마음에 걸린 건 시리즈의 컨셉도 희미해진 것 같다는 것이다. 어쨌든 스웨덴 소설인 이 시리즈는 밖에서 봤을 땐 완벽하게만 보이는 스웨덴 사회도 그 나름의 병폐나 허점, 어두운 이면이 존재함을 수면 위로 꺼내왔는데 이번 4부에선 인공지능이니 산업 스파이 등 좀 더 국제적인 스케일의 사건을 다루면서 시리즈만의 개성이 많이 옅어진 느낌이다. 특히 스티그 라르손은 '밀레니엄'을 통해 여성에게 자행하는 폭력을 많이 조명했는데 그 부분도 미흡했다고 본다. 내가 전작 <벌집을 발로 찬 소녀>를 읽은지 무려 5년이 지난 터라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그래도 시리즈 특유의 시대를 앞서나간 여성 서사의 강렬함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이번 신작이 안정적이되 임팩트가 적은 계승을 보이지 않았나 싶다.


 이 작품은 영화로 먼저 접했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영화와 소설의 내용이 아예 다르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 영화는 완전 액션 영화였다. 뿐만 아니라 일부 캐릭터 설정, 결말까지도 완전히 다르다. 그래도 부족한 점은 있어도 나쁘지 않은 영화였는데 소설도 세부적으론 많이 다르나 결과적으로 부족한 점은 있어도 나쁘지 않은 소설이었다. 일단 뒷맛이 아주 나쁘진 않아서, 또 이미 5부도 국내에 출간됐던데 그 작품도 읽어보려고 한다. 그런데 평이 별로인 걸 보면 아무래도 4부에서 느낀 불안한 점들이 다음 작품에서 엄청 터졌나 보다. 마치 스타워즈 여덟 번째 에피소드 '라스트 제다이'를 연상시킨다... 이 시리즈도 이렇게 호불호가 갈리는 작품으로 시작해 점점 수렁에 빠지고 말 것 같아 걱정이 된다. 스티그 라르손은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할까? 자꾸 죽은 사람 떠올리면 안 된다지만 그래도 궁금하긴 하다.



 p.s https://blog.naver.com/jimesking/221419383016

 이건 영화 <거미줄에 걸린 소녀>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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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화장법
아멜리 노통브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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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9.8






스포일러 있음



 다소 난해한 제목의 이 작품은 10년 전에 처음 읽었을 때건 지금이건 여전히 강렬한 작품이었다. 분량은 짧고 두 사람의 대화로만 전개되는 단순하지만 짜임새 있는 전개에다가 골때리는 언행이 거듭되는 통에 작품 자체의 수위가 꽤 높음에도 빠르게 읽어내려갔다. 프랑스 소설 - 엄밀히 말해 벨기에 국적의 작가가 썼지만 불어로 집필됐고 프랑스 소설 특유의 정신 나간 작풍을 그대로 담고 있으니 프랑스 소설이라 해둔다. - 은 예술성이라 명명되는 돌I적 특성 때문에 진입 장벽이 높은 편인데 이 정도면 입문으로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작중 수위는 여느 프랑스 소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으니 진입 장벽 어쩌니 하는 말은 어디까지나 가독성을 두고서 하는 말이다.

 작중 충격적인 반전은 어떻게 보면 인위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제롬 앙귀스트와 텍스토르 텍셀이 실은 해리성 정체 장애를 앓는 동일한 인물이란 설정은 아주 충격적이었다. 자기 아내를 죽여놓고도 눈치도 못 채고 살다가 그 사실을 너무나 불쾌하고 느닷없이 알게 된 제롬의 정신 상태를 읽고 있자니 내 머릿속도 엉망이 되는 것만 같았다. 글쎄, 차라리 제롬이 영원히 자기 내면의 적인 텍셀을 모른 채 살아가는 게 비극일지, 아니면 텍셀이 정체를 드러낸 것이 비극일지 확신이 서질 않아서 여러모로 고통스러웠다. 다분히 픽션답다고 치부하고 싶지만, 자기한테 가장 치명적인 적은 바로 나 자신이란 말을 생각하니 우리에게 있어 내면의 적이란 어쩌면 텍셀처럼 존재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됐다.


 일일이 읊기도 쉽지 않지만, 떠올리는 것만으로 메스꺼워져 텍셀의 개같은 논리는 굳이 언급하지 않기로 하겠다. 내심 이런 개같은 소리나 나불거리는 인물을 처치하는 이야기를 바랐던 나의 기대는 보기 좋게 배신당했는데, 이 정도면 가히 최고 수준의 배신이라고 봐도 좋겠다. 프랑스 소설을 읽으면서 통쾌한 마무리를 원한 내가 순진했지. 아무튼 제롬과 텍셀이 동일한 인물이라는 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텍셀의 진정한 정체가 밝혀진 뒤부턴 몇 페이지 안 남은 소설이 지루해진 감이 있었지만 한편으론 제롬의 무너져내리는 머릿속이 잘 묘사돼 쉽게 읽히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텍셀은 초반에 공헌한 대로 승리를 거뒀고 압권은 그가 죽으면서 신나게 연호한 단어가 바로 '자유'란 것이었다. 그 자유의 결과는 제롬의 자살이란 걸 생각하면 진짜 섬뜩한 단어가 아닐 수 없다.

 이 소설은 황당하면 황당한 그대로, 역겨우면 역겨운 그대로, 섬뜩하면 섬뜩한 그 자체로 두는 게 제일 좋은 것 같은데... 작가가 소설을 쓴 바를 내 나름대로 생각하다 보면 어째 느낌이 좀 깨는 것 같기 때문이다. 누구나 의식하건 못하건 내면의 적과 동침을 하는데 그러한 존재를 외면하고 지내면 엄청난 재앙으로 돌아온다는 게 아닌가 하는 상대적으로 상투적인 결론에 도달하니 원. 제목에 들어간 '화장법'이란 단어가 제롬의 현란하고 역겨운 변명을 가리킬 텐데 이런 화장법은 결과적으로 제롬과 텍셀을 더욱 극명하게 분리시켜 제롬이 분노를 감당하지 못해 텍셀을 죽여 자살에 이르는 결과를 낳고 만다. 텍셀이 제롬 앞에 나올 수 있던 게 순전히 출장을 가는 날짜가 아내의 기일이었던 것, 비행기가 원인 불명의 이유로 연착된 것뿐이란 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하는데, 더불어 너무 가혹한 나머지 인위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는데 작가는 이를 두고 비극이란 예상치 못한 사소한 계기로 발생한다는 것을 의도한 것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참, 잔인한 작가다. 글솜씨만큼이나 발상도 잔인해.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은 한동안 접하질 않았는데 오랜만에 이 작품을 다시 읽으니까 내가 왜 그랬을까 싶다. 국내에 출간된 책도 많고 대체로 분량도 이 책만큼 짧으니 부담 갖지 말고 읽어봐야겠다. 대부분의 책이 <적의 화장법>에 뒤지지 않는다면 더 바랄 게 없겠는데.

인생이란 원래 그 자체를 정신나간 짓으로 만들어버리는 이런저런 불쾌한 일들로 가득한 법이지요. 무슨 형이상학적인 문제들보다 오히려 하찮은 난관들이 부조리를 훨씬 더 불거져 보이게 만드는 겁니다. - 1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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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향신료 17 - Extreme Novel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아야쿠라 쥬우 그림 / 학산문화사(라이트노벨)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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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거의 10년에 걸쳐 읽은 '늑대와 향신료' 시리즈는 이 17권으로 일단은 완결이 났다. 작가 후기가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연재하는 동안 정말 쓰고 싶은 내용을 다 써버려서 후기에 쓸 내용이 없다며 구태의연한 말 없이 깔끔하게 끝냈다. 후기에조차 쓸 말이 없다는 말에 이렇게 공감이 될 줄은 몰랐다. 보통은 말은 그렇게 해도 할 말이 있을 텐데... 하며 아쉬워했겠지만 이 시리즈만큼은 정말로 공감했다. 누누이 말했지만 이 시리즈는 늦어도 12권 정도에서 완결이 났어야 했다. 마지막 '태양의 금화' 에피소드를 잘 뽑아서 망정이지, 사실 이번 17권에 수록된 에필로그와 단편들도 내가 봤을 땐 사족이라서 정말로 쓸 얘기가 없다는 작가의 말이 과장하는 것으로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김새게 한 것은 최근에 시리즈의 재연재가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시리즈 연재 10주년을 기념으로 호로와 로렌스가 온천을 운영하는 후일담이 재연재됐다고 하며 심지어 그 둘의 딸과 콜을 주인공으로 세운 '늑대와 양피지' 시리즈까지 새로 발간됐다지 뭔가. 더 이상 쓸 얘기가 없다면서... 믿었는데;; 생각해보니 미카미 엔의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시리즈도 완결이 난 주제에 새롭게 재연재를 하고 있으니 이건 어떻게 보면 일본 시리즈물의 안 좋은 일면인지 모르겠다. 물론 재연재를 원하는 목소리가 있으니까 계속 시리즈가 이어지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박수 칠 때 떠나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뭐, 시리즈는 끝났어도 작가들은 계속 먹고 살아야 하니까 계속 이어나가는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참 안타까운 일이기도 하다. 여담이지만 이 분야의 최고는 바로 조앤 K. 롤링이지 않을까. '신비한 동물사전'... 생각하니까 또 욕이 나오려고 한다.


 위에서 하는 말도 결국엔 그 작품들을 읽지 않아서 할 수 있을 뿐인지 모르겠지만, 미안한 얘기겠으나 그 재연재물까지 볼 생각은 지금 시점에선 조금도 없다. 그럴 여력도 없고 시간도 없다. 지난 16권에 실린 작가의 후기에서 '행복한 이야기란 언제까지나 가능한 것인가' 하는 질문을 정말로 끝까지 따라가면서 확인할 생각이 없으니까 말이다. 내게 호로와 로렌스의 여정은 여기까지면 충분하다.

 쓰다 보니까 사실상 시리즈의 마지막 포스팅임에도 너무 안 좋은 얘기만 해댄 것 같은데, 아까도 말했듯 내가 재연재 에피소드를 읽지 않으니까 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난 그 에피소드의 완성도는 궁금하지 않지만 그래도 기왕 잘 마무리한 시리즈를 굳이 더 이어나가는 것인 만큼 안일하게 집필해서 괜히 시리즈 자체의 명성에 누를 끼치는 등 긁어부스럼이 되지 않길 바란다. 얘기 들어보니까 기우에 불과한 듯해 그건 그것대로 참 다행인 일이다. 완결인 줄 안 시리즈가 사실은 완결이 아니었다는 말에 당혹스러움을 감추기 힘들었지만 아무튼 오랜 시간에 걸쳐 역사에 남을 수 있는 명작 라이트 노벨을 읽었다는 뿌듯함은 확실히 오래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이 시리즈의 1권을 읽던 내 옛날 모습이 떠올라 실로 감개무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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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향신료 16 - Extreme Novel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아야쿠라 쥬우 그림 / 학산문화사(라이트노벨)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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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사실상 대망의 마지막 에피소드라 봐도 무방한 이야기. 그답게 두 권으로 분권됐고 간만에 재밌게 읽은 에피소드였다. 작중의 시장 경제 돌아가는 논리를 이해하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포기했지만 화폐를 둘러싼 상인들의 전쟁, 이른바 '상전'이란 것이 실감나게 묘사돼 정확하게 파악은 안 가도 확실히 읽는 맛이 있었다. 이 책은 다음 권 17권을 마지막으로 '일단은' 완결이 난다. 왜 일단이라고 하는지는 다음 포스팅 때 얘기하기로 하고, 아무튼 이 시리즈는 늦어도 12권 정도에서 완결이 났어야 했다. 단편집을 줄이고 누가 봐도 우회하는 전개의 장편도 내가 봤을 땐 덜어냈어야 했다. 그래도 끝에 가서 체면치레는 해서 망정이지 그마저도 아니었으면 추억에 X칠을 할 뻔했다.

 작가가 이 시리즈를 두고 '언제까지나 행복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해왔다는데, 시리즈의 두 주인공인 호로와 로렌스에 애착을 가진 사람이라면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불멸자와 필멸자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어느 한 쪽만 살아남고 다른 사람은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별은 최대한 늦추는 것말곤 달리 방도가 없다. 그래서 미리 헤어지든가, 그렇지 않든가 하는 방황이 지난 2~3권 동안 호로와 로렌스 사이에서 많이 오갔는데 둘은 감정을 확실히 정한 듯 이번 권에서는 거의 대놓고 깨를 쏟아낸다. 1, 2권에서부터 이어졌던 선을 넘지 않아도 꽁냥꽁냥했던 분위기가 정말 어렴풋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덕분에 클라이맥스 부분도 꽤나 극적으로 다가왔는데 이 순간이 오래도 걸린 만큼 더욱 가슴에 와 닿았던 것 같다.


 이 시리즈의 최대 매력은 바로 검과 마법이 등장하지 않는 판타지란 점이다. 초현실적인 존재가 등장하고 가끔 그들의 능력이 이야기 전개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작품은 가상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상인들의 모습에 더 집중했다. 당연히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 만큼 종교의 힘도 막강한데 이 모든 세계관의 실세와도 이질적인 존재인 과거의 신들은 이제 더 이상 현시대의 인간 세상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아니, 영향력을 발휘하긴커녕 정말로 잡아먹히지나 않으면 다행인 수준이다. 그토록 초월적이고 삽시간에 용병단을 가루로 만들 힘을 갖고 있음에도 인간의 문명이란 더 이상 무력의 크기만으로 뒤집을 수 있을 만한 게 아니므로 그들이 인간들의 방식으로 세상에 적응하려는 건 참 짠했다. 작중에서 불멸자의 불멸의 원리에 대해 명확히 다루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평생을 살 수밖에 없고 인간 세상에서 인간을 관찰한 신들이 각자 방식으로 생존을 도모하다니... 이처럼 인간의 문명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대단하고 복잡한 것이구나 싶었다.

 가상의 세계긴 하나 실제 우리네 중세 시대의 모습을 작품 속에 잘 담아냈기에 그것만으로도 작품을 읽는 가치가 쏠쏠하다. 뿐만 아니라 경제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입문용 책으로도 준수한 편이고 라이트 노벨의 정체성도 잃지 않았다. 라이트 노벨을 쓰기 위해서 라이트 노벨만 읽겠단 생각은 버리라고 말한 작가답게 실제로 작품을 쓸 때 읽은 책들이 성경, 경제, 중세와 관련된 책들이란다. 서사적으로는 어느 순간부터 비슷한 포맷을 유지하고 있어 갈수록 신선함과는 거리가 멀어졌단 느낌이고 실제로 이젠 거의 시들해졌지만 그럼에도 마지막 에피소드는 흥미로웠다.


 인간의 욕심은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단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은 그간 '늑대와 향신료' 시리즈가 벌인 문제들을 잘 수습한 느낌이 들었다. 인간에게 욕심은 떼려야 뗄 수 없고 오히려 욕심이 있었기에 잃는 만큼 발전도 가능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단념해야 할 순간이 있다면 그건 언제일까? 그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과 끝맺음이 돋보이는 결말을 이 작품이 선보였다고 본다. 이 에피소드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이 시리즈 전체의 구성을 생각했을 때 하는 말이다. 왠지 뻔했지만 안정적이었던 결말에선 만감이 교차했다. 그래서 굳이 후일담이 17권으로 따로 나와야 했을까 싶었는데...

지킬 게 있으면 비극에 휘말리기 쉽다고. - 15권 225p




현명한 사람들이 함정에 빠지는 것은 결코 무능해서가 아니야. 태만해서지. - 16권 147p




호로와 로렌스의 대화를 쓰면서 늘 염두에 둔 것은, 계속 행복할 수 있는 이야기가 가능한가 아닌가였습니다. - 14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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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나한테 이럴 수가 - 아무도 말해 주지 않은 여행의 끝
주오일여행자 지음 / 자그마치북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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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6.9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아무도 말해 주지 않은 여행의 끝. 이 허무한 여행의 끝을 살펴보는 여행 에세이 <여행이 나한테 이럴 수가>는 나름 부지런하게 여행을 다니는 나에게 있어 제목만으로 흥미를 갖게 만드는 책이었다. 나 역시 짧게는 2박 3일 길게는 2주를 여행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그렇게 허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귀국하기 전엔 그렇게 한국이 그립고 한국 음식을 먹고 싶어도 막상 돌아오면 그게 하루를 가질 않는다. 책에서 저자가 '영원히 끝나지 않은 여행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일'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못한다는 구절이 있었는데 난 저자의 말에 동의하지 못하는 편이다. 내게 여행은 힘들고 지루한 일상 속의 나 스스로에 대한 보상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근데 보상만 받다 보면 마음이 점점 편치 못하게 되는 법. 그럼에도 귀국하는 날은 역시 허무하고 귀국하고 나면 더 허무한 건 부정할 수 없기에 책의 본격적인 내용이 궁금했다.

 여행 에세이인데 여행의 끝을 얘기한다니, 굉장한 호기심을 갖고 펼쳐들었든데 생각보다 감흥이 없는 내용이라 놀랐다. 책의 첫 번째 챕터인 '여행이 끝났는데도 세상은 멀쩡한 거 있죠'라는 문장과 밑에 '밑줄긋기'에다 따로 옮겨 적은 마지막 구절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너무 감상적이고 했던 말 또 하는 식인 터라 읽히기는 빨리 읽히되 머리에 크게 들어오는 건 없었다. 나는 이런 책을 두고 '볼 수는 있어도 읽히진 않는다'고 하는데 그 말에 딱 맞았다.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저자가 여행 때 찍은 사진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정확히 어디의 풍경을 찍은 것인지 몰라도 - 솔직히 이것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 사진은 잘 찍더라.


 여행 이야기, 그것도 남의 여행 이야기를 듣는 걸 꽤 좋아한다고 생각했기에 더욱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사랑을 다른 사랑을 잊으려 한다는 말처럼 결국 여행을 다른 여행으로 잊으려 한다는 건데, 이런 태도는 좋았지만 문제는 그걸 책의 마무리가 아닌 책의 중간에 넣었다는 것이다. 엄연히 '여행의 끝'에 대해 말하겠다고 공언했으면서 결국 다른 여행 에세이처럼 여행을 가는 이야기를 쓴다는 게 개인적으로 불만이었다. 결국 무슨 내용이든 잘 쓰면 그만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난 이렇게 컨셉을 확실히 지키지 않는다는 게 뭔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그 전에 작가가 여행의 끝에 대해 한다는 얘기가 내 성에 차질 않았기에 드는 불만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보면 여행의 끝을 얘기하는 여행 에세이란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는지 저자는 여행이 끝나서 다시 여행을 추억하는 식으로 글을 전개했다. 나도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블로그에 최소한의 기록은 해두니 사람 생각은 다 똑같구나 싶었지만 난 저자가 그 이상을 얘기해주길 바랐다. 대충 짐작하기로 저자는 무슨 돈과 여유와 배짱이 있었는지 몰라도 적어도 2년 가까이 해외를 여행했는데 그렇게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니 집에서 눈치가 보이고 한국 사회에 적응이 좀 힘들고 어째 친구들에게서 뒤쳐진 것 같은 느낌 - 어째 그런 느낌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뒤쳐졌다. - 이 들었다 하는 얘길 더 했어야 했다. 그걸 마르고 닳도록 얘기하고 나서 여행의 후유증을 다른 여행으로 잊는다는 말이 나왔으면 뭔가 울리는 바가 있었을 텐데 내가 기대했던 것들이 전체적으로 가볍고 지극히 개인적인 어투로 적혀있어서 에세이보단 일기를 읽은 느낌밖에 안 들었다.


 에세이 아무나 쓰는 거라고 깎아내리는 사람이 있는데 난 그런 말 진짜 싫어한다. 어쨌든 내가 글을 전공했기 때문도 있고 에세이 자체가 아무나 쓴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쉬운 장르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도 있다. 물론, 그런 말을 하게 만드는 에세이가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그런 말 싫어한다. 그래서 난 다른 말을 하겠다. 이 책은 그래도 나름 흥미로웠지만, 내 여행을 돌아보는 게 좀 더 낫겠다 싶었다고. 결국 책을 읽고 일주일이 지난 지금 기억이 나는 건 제목인 '여행이 나한테 이럴 수가'와 각 챕터의 문장들이라니 원.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어느 날 문득, 아주 먼 자리까지 떠나고 싶을지 모른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쩌면 여행을 시작하고 끝내며 사는 게 우리 삶의 전부일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이리저리 움직이며 자신의 별자리를 만들어 보자. 설사 실패한다고 해도 결국 별자리를 완성하기 위한 작은 흔적일 뿐이다. 자리를 옮겨야 비로소 완성되는 별자리처럼, 우리 인생도 점처럼 찍힌 여행의 좌표들을 이어 붙여야 마침내 완성될지도 모르니까. - 22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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