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하는 여자 - 과학이 외면했던 섹스의 진실
대니얼 버그너 지음, 김학영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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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9.1







 최근에 영화 <피아니스트>를 보고 성욕, 특히 여성의 성욕에 관심이 가 이 책도 읽게 됐다. 참고로 방금 언급한 <피아니스트>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그 <피아니스트>가 아닌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작품을 가리킨다. 두 작품 다 비슷한 시기에 칸 영화제의 걸출한 상을 받아서 사람들이 많이 헷갈려하는데 내용은 완전히 다르다. 무엇보다 내가 언급한 작품의 원제는 '피아노 치는 여자'다. 내가 봤을 땐 이 제목이 작품의 내용을 더 함축적으로 담아내고 있다고 본다. 피아노 연주의 경지에 달한 주인공은 음대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며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지만 그럼에도 억압된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 결국 구덩이에 빠지는 게 그 작품의 주된 내용이다.

 좀 과격한 표현이란 건 인정하는데, 적어도 여성에 한해서 성욕이란 어느 문화권에서건 비슷한 무게를 갖고 있는 것 같아 그렇게 표현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일전에 나는 남성에게 성욕이란 필요악이지만 여성에겐 성욕이 있다는 걸 들키거나 스스로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수치이자 심한 경우엔 여성 전체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거나 극단적으로는 인간 실격 취급을 당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건 좀 다른 예시인데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사요나라 사요나라>에선 이런 경우가 등장한다. 학생 시절에 한 여자를 윤간했던 남자들은 성인이 돼서 안정된 생활을 하거나 과거의 치부가 드러나도 주변에서 '혈기를 이기지 못했다'는 식으로 순화된 반면 정작 피해자인 여성은 사회는 물론 가족들한테까지 외면을 받고 비참하게 산다. 비단 소설만의 극단적인 묘사로 치부할 수 없다는 건 어째서일까? 


 위의 소설에서처럼 서로간의 합의가 없는 폭력 행위일 뿐인 강간, 윤간의 경우에서도 피해자인 여자는 손가락질을 당하는데 하물며 성욕이 있는 여성은 어떨까? 서로의 합의가 전제된다면 제아무리 뒤틀린 성욕이건 관계를 가져서 행복하다기만 하면 남이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없음에도 지금까지의 우리 인식은 그렇지 못했다. <욕망하는 여자>는 여성의 성욕에 대해 얘기하면서 우리가 그간 성욕을 어떤 식으로 생각해왔었는지 간접적으로 비판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여성에게 성욕이 없다는 것은 집단적인 세뇌이며 여성의 성욕과 그 크기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곧 여성을 벼랑으로 내모는 것과 다름없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아마 그 벼랑의 이름은 자괴감일 테지.

 여성도 성욕이 있다, 라는 말은 어쩌면 남성이 믿고 싶은 그릇된 성적 판타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할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내가 굳이 이 자리에서까지 '어쩌면'이라고 하는 이유는 나 역시 성욕이 있는 남성이라서 이 책의 내용을 더 잘 받아들일 뿐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책에서 다루는 예시들, 욕망하는 여성들의 이야기의 수위는 상상 이상이었다. <피아니스트>도 수위가 세긴 했지만 그래도 픽션이라 그런대로 흘러 넘길 수 있었지만 이 책에서의 일화들은 과장이 있을지언정 전부 실화다. 유독 마조히즘에 주목한 것 같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지만 그래도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여성의 성욕은 좀 더 보편적이고 확실히 과소평가됐구나 싶었다.


 어떤 페미니즘 책에서 성애 소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나 이 분야의 본좌라고 할 수 있을 <O이야기>가 '다 떠나서 여성은 복종하길 원하는 존재라는 남성의 판타지를 충족시킬 뿐'이라는 구절을 읽은 기억이 난다. 사람마다 인식하는 페미니즘의 기준은 다르고 각각 어느 정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 성욕을 터부시하는 페미니즘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여성의 목을 조르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게 내 지론이다. 물론 성욕은 남성이나 종래의 남성중심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많이 악용됐고 그 피해는 극소수를 제외하면 온전히 여성의 몫이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성욕이란 남성에게도 여성에게도 기본적으로 쾌락이란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아마도 <욕망하는 여자>도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킬 뿐이라는 의견이 있을 것 같아 선수를 치겠는데, 결국 이 책도 데이비드 버스의 <욕망의 진화>가 그랬듯 반복적이고 일화들을 열거해 피로하게 읽히지만 적어도 내가 읽어낸 지점은 바로 이 질문 때문에 꽤나 의미 있게 읽혔다. 이 질문, 그래서 성욕이 뭐가 그렇게 나쁘단 건가?

 원래 저자가 돌려 말하는 편인 건지, 이 분야 사람들은 원래 시원시원하게 말을 안 하는 것인지, 아니면 번역의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마치 여운을 주려는 소설처럼 이 책의 저자도 - 그러고 보니 엄연히 과학 도서임에도 꼭 소설처럼 읽히긴 했다. - 사람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를 남기고 글을 마친다. '그래서 성욕이 뭐가 그렇게 나쁘단 건가?'란 질문도 내가 읽어낸 질문일 뿐 실제 저자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 어쨌든 이 책은 과학 도서라서 저자는 여러 욕망하는 여자들을 소개하며 여성에게도 성욕이 있다는 걸 입증하려고 했지, 그 이후에 성욕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받아들이는 건 전적으로 독자들의 몫일 것이다.


 결국 나는 이 책의 저자가 이뤄낸 과학적 성취와는 무관하게 내가 듣고 싶은 말만 적당히 간추려 나만의 판타지를 공고히 다진 것에 불과한지 모른다. 이건 비단 이 책만이 아닌 다른 책이나 영화를 볼 때도 자유로울 수 없는 부분이며 이는 앞으로도 스스로 꾸준하게 경계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해야 할 말은 해야겠다. 책에 등장하는 일화 속 여성들은 그 성욕으로 하여금 저자를 비롯한 여러 사람에게 충격을 주긴 했어도 적어도 행복해보였다는 점이다. 안정된 직장의 여성, 가정이 있는 여성, 충분히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이지만 잠자리에서만큼은 은밀한 성적 판타지를 실현하길 원하는 것이다. 나는 이게 행복한 인생이라 느껴졌고 만약 그 속에 불행이 있다면 자기 성욕을 털어놓지 못하는 답답함 때문에, 그리고 자기 성욕을 감당할 상대를 아직 못 만났다는 애처로움 때문일 것이다. 근데 이건 누구나 마찬가지 아닌가? 여성만이 아니라 사실 성욕은 누구한테나 마찬가지로 행복한 것이고 불행한 것이지 않은가.

 여성에게 있어 성욕은 드러내놓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미국도 그런데 우리나라는 오죽할까. 다른 건 몰라도 나는 여성에 대한 저러한 잣대가 심히 불공평하고 얼마나 걸릴지 몰라도 없어져야 할 전근대적 가치관이라고 여긴다. 물론 말은 이렇게 하지만 여성이 성욕이 있음을 어떤 식으로든 알려지는 게 위험한 일이란 건 인정한다. 자신의 신체적, 혹은 사회적 지위를 동원해 '먹잇감'을 노리는 남자가 많기에 욕망하는 여성의 존재는 엄청난 혼란을 야기시킬 수 있다고 나 역시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욕을 언제까지 덮어둘 수 있겠는가. 금방 말했듯 얼마나 걸릴지 몰라도 욕망하는 여자가 특기할 만한 존재로 여겨지지 않는, 말 그대로 성욕이 누구한테나 평등한 사회 분위기가 형성돼야 할 텐데...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읽은 책의 존재는 중요하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욕망의 진화>보다 더 후대에 전해져야 할 책이 아닌가 싶다.

성적인 사람, 즉 어떤 사람이 성욕을 드러내도 괜찮다는 것은 사회가 부여한 하나의 자유를 의미하며 그러한 자유는 여성보다는 남성의 것이다. - 33p




과학적 확신이 됐든 신이 내린 확신이 됐든 이렇게 소녀와 여자들은 느껴야 할 감정마저도 주입받고 있다. - 6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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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소설의 계보학 - 탐정은 왜 귀족적인 백인남성인가
계정민 지음 / 소나무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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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범죄소설에 문학적 시민권을 줘야 한다는 아주 인상적인 서두에 끌려 읽게 된 책이다. 추리소설을 좋아해서 이론적으로 접근하는 글을 종종 접했지만 이 책처럼 근원적인 부분에서부터 접근하는 경우는 처음 본 것 같다. 모든 소설은 범죄를 다루고 있음에도 종래의 범죄소설이나 추리소설은 대중적 인기를 겨냥한 싸구려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란 오명을 벗지 못하는 것에 관해 저자는 꽤나 인문학적, 역사적 근거를 들며 반박을 펼친다. 간단히 말해 주변에서 왜 추리소설 같은 걸 읽냐고 핀잔 같은 걸 들어본 사람이라면 공감이 갈 수밖에 없는 내용이리라고 기대됐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딱 서두까지만 흡입력이 있었고 본문은 쉽게 읽히지 않았다. 이 책에서 다루는 작품들은 전적으로 영국의 산업 혁명을 기준으로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 영국 추리소설과 미국에서 흥한 하드보일드물이다. 둘 다 내 취향과는 거리가 먼 작품들이다. 나는 영국 추리소설은 물론 일본 추리소설, 나아가 북유럽 추리소설까지 다룰 줄 알았는데 이렇게 영국과 미국 얘기만 하다 끝낼 줄은 몰랐다. 셜록 홈즈나 필립 말로를 좋아한다면 읽는 맛이 있었겠지만 난 그 두 시리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내가 다른 생소하기 그지없던, 이름도 처음 알았던 고전 추리소설에 얼마나 관심이 가겠는가.


 그나마 셜록 홈즈의 대표 단편은 몇 편 접해봐서 그 부분에 관해서는, '탐정은 왜 귀족적인 백인남성인가' 라는 파트는 재밌게 읽혔다. 당대 사회적인 분위기를 집약적으로 드러낸 존재가 탐정인데 그들의 모습은 전형적으로 기득권을 대표하는 존재로 표현됐다. 책의 저자가 젠더를 많이 언급해서 나도 비슷한 방식으로 말하자면, 요즘 '맨스플레인'이란 단어로 집약시킬 수 있는 남성의 모습이 탐정으로 승화되는 경우가 많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여성을 구하고 타락한 이세계의 존재를 상대로 - 주로 인도인들 - 승리를 거두는 경우가 많아 시대상을 짐작할 수 있던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확실히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게 괜히 있는 말이 아니구나 싶었다.

 원래부터 범죄소설은 늘 저평가를 받아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책의 서두가 준 인상과는 달리 본문은 그렇게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아서 생소하다면 꽤나 생소했다. 추리소설의 순수한 문학적 가치를 역설하기 보단 당대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텍스트란 점에 주목한 것은 읽는 이에 따라 좀 실망스러울 수도 있는 부분이겠다. 특히 추리소설하면 빠질 수 없는 존재인 탐정이 지금 기준에서 보면 부정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데에 거부감을 표할 사람도 있을 듯하다. 이건 비평적으론 흥미로운 요소지만 때론 그렇게 비평적으로 추리소설을 바라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 의견에 동의한다. 솔직히 뭘 이렇게까지라는 생각이 드문드문 들었다.


 하지만 서두에서 저자가 밝혔듯 우리 주변의 무수한 대중 문화는 충분히 다양한 시각에서 해석했었지만 유독 범죄소설은 그런 시각을 적용하지 않았다. 이 책이 저자의 바람대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리라고는 솔직히 좀 회의적이게 되지만 이렇게 '계보'라고 명명하는 책이 나온다는 게 썩 고무적인 일이라는 것만큼은 인정하고 싶다. 남다른 시선을 전문적으로 풀어내는 글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귀중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영문학에 식견이 있는 사람 중에 이 정도로 범죄소설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렇게 생각하면 더욱 귀중하기 이를 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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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바보
이사카 고타로 원작, 시오즈카 마코토 글 그림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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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얼마 전에 영화 <중력 피에로>를 보고 이사카 코타로 소설 원작의 2차 창작물에 관심이 가던 중에 오랜만에 이 만화를 읽었다. 동명의 연작 소설을 만화화한 작품으로 작가 시오즈카 마코토와 원작자 이사카 코타로의 말에 의하면 몇 가지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 예를 들면 염세적인 새 인간 - 대체로 원작과 비슷한 노선을 달리는 듯하다. 생각해보니까 저번에 이 만화를 다 읽고서 원작 소설도 읽자고 했었는데... 언제 읽게 되려나. 원작 소설의 목차를 보니까 만화화로 옮겨지지 않은 단편도 있는 것 같았다. 그 두 단편을 보기 위해서라도 원작을 읽어야겠다.

 참 골때리는 세계관이 아닐 수 없다. 8년 뒤 소행성 충돌로 지구가 멸망한다고 하자 세계는 크게 혼란스러워졌고 기존 질서도 붕괴하기 직전에 이르렀다. 하지만 5년이 지나자 혼란스런 상황은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고 사람들은 비교적 덤덤한 기분으로 남은 3년을 무탈히 보내고자 한다. 어차피 3년 뒤엔 모두 죽으니까 포기한 것인지 몇몇 인물을 제외하면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의 마지막 순간에 다가간다.


 세계 모든 사람들이 시한부 인생인 처지라는 게 인상적이었고 연작의 특성에 맞게 다양한 군상을 주목한 것도 좋았다. 일부 에피소드는 약간 식상하고 얼렁뚱땅 결말을 맺은 감이 있었는데 원작 소설에서도 같은 느낌일까 궁금하다. 만화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기본적으로 그림체가 출중하고 - 다만 인물들의 얼굴이 미묘하게 비슷비슷해서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천편일률적이거나 몰개성한 그림체도 아니고 흔히 말하는 오덕 그림체도 아니건만... 내가 이상한 건가? - 군데군데 암울한 미래상도 잘 표현하고 있어 몰입도가 높았다. 작가가 소설을 읽을 때 주목했던 공원에 세워진 토템도 그렇고 지금은 그 기능을 상실했다는 대학이나 체육관, 비디오 대여점 같은 공간도 흥미로웠다. 종말을 얘기하는 것치고 너무 일상적인 공간이거나 동떨어진 느낌도 주는데 그게 바로 이 작품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인생의 묘미는 그 끝을 알 수 없다는 것에 있기에 매사에 노력하고 순간마다 즐길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반대로 시한부 인생은 그런 인생의 묘미와 정반대의 인생이라 자연스럽게 비관적으로 살 것 같은데... 픽션으로만 가볍게 즐기고 넘어가기엔 상상조차 하기 싫은 설정이라 비교적 담백하게 묘사됐음에도 이야기들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나는 어차피 죽을 인생이니까 희망 없이 살다 갈 것인지,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마치 끝이 언제인지 모르는 것처럼 변함없이 살다 갈 것인지...


 8년이란 시간이 참 절묘하다. 꿈꿨던 일을 실현하기에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지 않은가. 사람마다 꿈꿨던 일의 기준이나 정의가 너무나 다르고 그건 이 작품에 수록된 이야기들만 봐도 알 수 있는 거지만 내 생각엔 그래도 긴 시간이라고 본다. 8년이면 초등학생 고학년이 성인으로 자랄 만큼 길다. 미대통령이 연임을 해도 8년이고 알다시피 그 기간엔 참 많은 일들이 벌어지지 않는가.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라고 보고 인생의 후회되는 일을 바로잡거나 한정된 시간이지만 그 안에서 미래를 꿈꾸기에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결국 상상으로 하는 말이기에 무책임하고 낙관적으로 뱉을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차피 배고파질 걸 알면서도 꼬박꼬박 끼니 챙겨먹고 어차피 더러워질 텐데도 정리하는 걸 보면 어차피 결과가 정해졌다고 해서 마냥 손을 놓는 사람은 의외로 적지 않을까 싶다. 내가 봤을 때 사람은 기본적으로 부지런하고 현재에 충실한 존재다. 당장 1년 뒤, 몇 개월 뒤라면 모르겠지만 8년 뒤에 멸망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 차분한 마무리를 짓기에 적절하지 않은가 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게 됐다.


 다시 말하지만 진짜 상상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이지만 그래도 상상해볼 수 있어 참 뜻깊은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상상, 쉽게 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네 삶은 얼마나 살려고 작정했던 것이냐...?

넌... 가령 내일 죽는다고 해서 갑자기 삶의 방식을 바꿀 수 있겠어? - ‘강철의 킥복서‘




살아남는다는 건... 그런 식으로 선택하고 선택받고... 그런 건 아닌 것 같아...

아등바등.. 발버둥치고, 몸부림치고... 그런 식으로 좀 더 필사적이어야 되는 게 아닐까...? - ‘심해의 망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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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개의 키워드로 읽는 북유럽 이야기 - 바이킹에서 이케아까지 50개의 키워드로 읽는 시리즈
김민주 지음 / 미래의창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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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3월에 헬싱키 경유 스톡홀름으로 가는 스탑오버 여행을 계획했다. 그 때문에 이렇게 조금씩 북유럽과 관련된 책이나 영화를 접하고 있다. 어제 핀란드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나왔다고 해서 걱정이 되지만 별 일 없다면 갈 테니... 일단은 준비를 하고 있다. 비행기랑 숙박은 예약을 끝냈고 환전은 아직 너무 이르니 지금은 다방면의 인문학적 준비를 해둘 때다. 부디 아무 일 없이 계획한 대로 갈 수 있다면 좋겠는데.

 작년부터 북유럽과 관련된 책을 자주 읽어서 북유럽 하면 얘기가 술술 나올 정도로 나름 빠삭한 편이라 생각했으나 이 책에서 새롭게 알게 된 게 많아 여러모로 유익했다. 책의 출간 시기가 2014년이라 약간 근거 없이 정보가 미흡한 책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착각도 그런 착각이 있을 수 없었다. 최근에 읽은 <다크 투어>의 저자 김민주 씨가 쓴 책으로 북유럽의 역사, 사회, 문화, 경제, 지역 별로 나눠 말 그대로 50개의 키워드에 대한 짧고 핵심을 잘 짚어낸 글들이 수록됐다. 일관성이 약간 부족한 외국어 표기만 빼면 고증에 있어서 흠이라곤 당장 떠오르지 않을 만큼 허무맹랑한 내용은 없었다. 내가 이전에 읽은 <스칸디나비아>란 책이 북유럽의 근대사까지만 다뤄 아쉬웠던 것과 달리 이 책에선 현대사, 노르웨이 테러나 노키아의 부진 등 따끈따끈한 이슈들도 다루고 있어 전반적으로 알차게 읽었다.


 책의 후반부를 차지하는 경제와 지역 파트에서 개인적으로 새로 알게 된 내용들이 많았는데 특히 경제 파트에서 나열된 북유럽산 글로벌 브랜드의 성공 요인을 분석한 글은 작가의 전문 분야가 잘 발휘돼 유독 가독성이 높았다. 레고로 시작해, 볼보, 이케아, 앵그리 버드 등 어느 나라 브랜드인지는 알았지만 정확히 무슨 이유로 그렇게 브랜드 가치를 높였는지는 솔직히 잘 몰랐는데 이 책 덕분에 알게 됐다. 예부터 평등을 지향한 북유럽 국가들이 복지에 힘을 쓰며 그 성향이 왕가는 물론 기업에도 뿌리를 내려 어떤 긍정적인 효과를 낳는지 엿볼 수 있었다.

 내게 북유럽은 흥미로운 곳이다. 세계 최고의 복지 수준과 정치적 투명성, 높은 평등 의식을 갖췄음에도 겸손함을 잃지 않는다는 건 - 그 문화권에서 겸손하지 않은 것은 물가밖에 없다... - 너무나 매력적이다. 물론 그 안에서도 그늘이 있는 등 마냥 로망만 갖고 바라보면 안 될 일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북유럽에 눈길이 간다. 내가 북유럽에 흥미를 갖게 된 계기는 북유럽 추리소설들이지만, 읽은 사람들은 고갤 끄덕일 것 같은데 요 네스뵈며 스티그 라르손이며 책들이 하나같이 벽돌처럼 두꺼워서 다른 사람한테 쉽게 추천하기엔 주저가 된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만약 주변 사람에게 북유럽의 매력을 알릴 책을 찾는다면 북유럽 추리소설보다 이번에 읽은 이 책이야말로 가장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내용을 얕지 않게 다루는 등 그 문화권의 이모저모를 잘 어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도 혼자 가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드는 것 같다. 정확히 말하면 같이 가고 싶은 사람들이 돈이 없거나 시간이 없어서... 참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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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서비스부
브누아 뒤퇴르트르 지음, 함정임 옮김 / 강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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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일은 어디에 회원가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평소엔 감정을 잘 통제하는 편인 나를 삽시간에 성격 다 버리게 만드는 일은 바로 고객서비스와 관련해 어디 사이트를 들어간다거나 아님 상담사와 전화 통화를 하는 것이다. 남들은 그런 나를 보고 뭘 그렇게 성을 내냐고 하고 나도 가끔 내가 왜 이럴까 싶다. 지금은 비교적 성을 덜 내는 편이지만 여전히 저런 일들은 나로 하여금 숨길 수 없는 분노를 유발한다.

 브누아 뒤퇴르트르의 짧은 소설 <고객서비스부>는 이전에 읽은 <소녀와 담배> 못지않은 프랑스산 똘끼와 투덜거림을 쉬지 않고 발산해낸다. 차이가 있다면 이 작품이 그나마 공감대를 넓게 형성하기에 좋은 작품이란 것이다. 누구나 휴대폰은 갖고 있을 테고 정기적으로 새로운 모델로 교체를 했을 것이며 그럴 때마다 각종 통신사, 고객서비스부와 관련해 골머릴 앓아본 적이 있을 테니까. 만약 없다면 그것대로 이 소설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소설을 수식하는 문구로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는 21세기의 랭보' 가 있는데 나 역시 공감이 많이 갔다.


 상담 전화가 됐건 인터넷 사이트가 됐건 나를 분노케 하는 건 두 가지다. 이 두 가지 때문에 나는 한때 스마트폰에서 2G폰으로 바꾸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을 정도다. 하나는 내게 필요한 고객서비스를 받는 과정이 너무 복잡하단 것이고 두 번째는 이 일련의 과정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닌 회사를 위한 것이라는 강한 깨달음이었다. 전자는 내가 기계치라서 그런 거라며 넘길 수 있다 해도 후자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부분인 것 같아 더 화딱지가 난다.

 글쎄, 내가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라면 쿠폰이든 적립금이든 꼬박꼬박 챙기는 건 좋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런 것들은 소비자를 위한 게 아닌 전적으로 판매자들을 위한 것이다. 누군가는 윈윈이라 생각하지만 판매자 입장에선 수많은 선택지 중에 소비자들이 자기네 제품을 선택하는 것이니 철저하게 자기들을 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판매자들은 당연하게도 '손해 보는 장사'라는 점을 어필하며 쿠폰을 뿌리거나 할인 행사를 하거나, 혹은 소비자에게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제품을 들이밀며 어떻게든 고객 유치라는 성과를 내려고 노력한다.


 실수로 택시에 휴대폰을 놓고 내린 주인공이 고객서비스부에 전화를 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이 소설은 짧음에도 장면 장면이 스트레스를 유발해 읽는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정당하게 받아야 할 서비스를 받고자 했지만 그러기 위해선 이들에게 철저하게 돈을 갖다 바치게 된다는 걸 깨달은 주인공은 조금 도가 넘을 정도의 투덜거림을 시전해 회사를 상당히 지치게 만든다. 그래서 후반부엔 가상의 존재인 줄 알았던 도미니크 델마르와 대면하고야 마는데 이 장면도 참 가관이었다. 마치 최근에 읽은 아멜리 노통브의 <적의 화장법>을 읽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결말은 내가 반쯤 예상한 대로 블랙 코미디스럽게 그려져서 딱하 안타깝다거나 하진 않았는데 그 결말로 이르는 과정은 좀 아쉬웠다. 뭔가 말을 하다 만 느낌이랄까? 굴복하는 건 좋은데 그래도 좀 더 물고 뜯어야 하지 않았을까? 차라리 중반부의 지리멸렬한 전개를 좀 덜어내고 후반부에 집중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분량은 적절하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지금껏 느껴왔으나 어디서 잘 토로하지 못했던 불만을 충분히 대변하기엔 약간 애매한 연출이었기에 공연히 화만 났지 딱히 남는 게 없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작가한테 동지 의식을 느낄 수 있었던 건 좋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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