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의 바보
이사카 고타로 원작, 시오즈카 마코토 글 그림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9.3







 얼마 전에 영화 <중력 피에로>를 보고 이사카 코타로 소설 원작의 2차 창작물에 관심이 가던 중에 오랜만에 이 만화를 읽었다. 동명의 연작 소설을 만화화한 작품으로 작가 시오즈카 마코토와 원작자 이사카 코타로의 말에 의하면 몇 가지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 예를 들면 염세적인 새 인간 - 대체로 원작과 비슷한 노선을 달리는 듯하다. 생각해보니까 저번에 이 만화를 다 읽고서 원작 소설도 읽자고 했었는데... 언제 읽게 되려나. 원작 소설의 목차를 보니까 만화화로 옮겨지지 않은 단편도 있는 것 같았다. 그 두 단편을 보기 위해서라도 원작을 읽어야겠다.

 참 골때리는 세계관이 아닐 수 없다. 8년 뒤 소행성 충돌로 지구가 멸망한다고 하자 세계는 크게 혼란스러워졌고 기존 질서도 붕괴하기 직전에 이르렀다. 하지만 5년이 지나자 혼란스런 상황은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고 사람들은 비교적 덤덤한 기분으로 남은 3년을 무탈히 보내고자 한다. 어차피 3년 뒤엔 모두 죽으니까 포기한 것인지 몇몇 인물을 제외하면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의 마지막 순간에 다가간다.


 세계 모든 사람들이 시한부 인생인 처지라는 게 인상적이었고 연작의 특성에 맞게 다양한 군상을 주목한 것도 좋았다. 일부 에피소드는 약간 식상하고 얼렁뚱땅 결말을 맺은 감이 있었는데 원작 소설에서도 같은 느낌일까 궁금하다. 만화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기본적으로 그림체가 출중하고 - 다만 인물들의 얼굴이 미묘하게 비슷비슷해서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천편일률적이거나 몰개성한 그림체도 아니고 흔히 말하는 오덕 그림체도 아니건만... 내가 이상한 건가? - 군데군데 암울한 미래상도 잘 표현하고 있어 몰입도가 높았다. 작가가 소설을 읽을 때 주목했던 공원에 세워진 토템도 그렇고 지금은 그 기능을 상실했다는 대학이나 체육관, 비디오 대여점 같은 공간도 흥미로웠다. 종말을 얘기하는 것치고 너무 일상적인 공간이거나 동떨어진 느낌도 주는데 그게 바로 이 작품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인생의 묘미는 그 끝을 알 수 없다는 것에 있기에 매사에 노력하고 순간마다 즐길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반대로 시한부 인생은 그런 인생의 묘미와 정반대의 인생이라 자연스럽게 비관적으로 살 것 같은데... 픽션으로만 가볍게 즐기고 넘어가기엔 상상조차 하기 싫은 설정이라 비교적 담백하게 묘사됐음에도 이야기들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나는 어차피 죽을 인생이니까 희망 없이 살다 갈 것인지,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마치 끝이 언제인지 모르는 것처럼 변함없이 살다 갈 것인지...


 8년이란 시간이 참 절묘하다. 꿈꿨던 일을 실현하기에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지 않은가. 사람마다 꿈꿨던 일의 기준이나 정의가 너무나 다르고 그건 이 작품에 수록된 이야기들만 봐도 알 수 있는 거지만 내 생각엔 그래도 긴 시간이라고 본다. 8년이면 초등학생 고학년이 성인으로 자랄 만큼 길다. 미대통령이 연임을 해도 8년이고 알다시피 그 기간엔 참 많은 일들이 벌어지지 않는가.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라고 보고 인생의 후회되는 일을 바로잡거나 한정된 시간이지만 그 안에서 미래를 꿈꾸기에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결국 상상으로 하는 말이기에 무책임하고 낙관적으로 뱉을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차피 배고파질 걸 알면서도 꼬박꼬박 끼니 챙겨먹고 어차피 더러워질 텐데도 정리하는 걸 보면 어차피 결과가 정해졌다고 해서 마냥 손을 놓는 사람은 의외로 적지 않을까 싶다. 내가 봤을 때 사람은 기본적으로 부지런하고 현재에 충실한 존재다. 당장 1년 뒤, 몇 개월 뒤라면 모르겠지만 8년 뒤에 멸망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 차분한 마무리를 짓기에 적절하지 않은가 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게 됐다.


 다시 말하지만 진짜 상상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이지만 그래도 상상해볼 수 있어 참 뜻깊은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상상, 쉽게 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네 삶은 얼마나 살려고 작정했던 것이냐...?

넌... 가령 내일 죽는다고 해서 갑자기 삶의 방식을 바꿀 수 있겠어? - ‘강철의 킥복서‘




살아남는다는 건... 그런 식으로 선택하고 선택받고... 그런 건 아닌 것 같아...

아등바등.. 발버둥치고, 몸부림치고... 그런 식으로 좀 더 필사적이어야 되는 게 아닐까...? - ‘심해의 망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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