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들의 학교
박민정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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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세계 역사상 가장 크고 역사가 오래된 식민지는 바로 여성이라는 말이 있는데, 말 그대로 국경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보다 적합한 말은 또 없을 것 같다. 생각해보면 어느 문화권에서건 차별은 존재하고 성차별 또한 당연히 있는데 박민정 작가의 소설집 <아내들의 학교>를 읽으니까 유독 성차별이 비단 특정 국가나 시대의 문제가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얘기해볼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공 수업을 박민정 작가에게서 받은 적이 있는데, 몇몇 수업 자료로 이 책의 수록작들이 다뤄진 적이 있다. 그때는 약간 흘러가듯 언급된 작품들이라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 학기 동안에 읽었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강의 첫인상과는 달리 막판에 꽤 만족을 했던 터라 애초부터 수업 시간에 던져진 주제를 열심히 쫓아갔더라면 좋았을 텐데... 지금에 와선 그저 늦은 후회일 뿐이다.



 '행복의 과학'과 'A코에게 보낸 유서'


 처음에 배치된 두 작품은 화자와 세계관을 공유하는 연작이다.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 일본에 대해 우리는 잘 안다고도 생각하면서도 어쩌면 가장 낯선 나라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연작에선 후자에 해당할 '먼 일본'이란 관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도서관에 가면 무라카미 하루키를 '촌상춘수', 히가시노 게이고를 '동야규오'라고 표기하는데 이는 다 작가 이름을 우리나라 한자로 치환한 발음을 그대로 옮긴 것들이다. 이 점은 소설 첫문단에서 짚고 넘어가는 부분인데 여기서 일본이 우리나라 사람에게 복합적으로 다가오는 나라라는 점을 엿볼 수 있었다. 이후 작중에서 등장하는 가상의 일본인들이나 그의 저술, 과거나 'A코에게 보낸 유서'에서 더 심화되는 우익의 혐오 활동을 통해 단순히 피상적인 묘사가 아닌 심층적인 묘사를 선보여준다.

 우리나라 문학에서 일본 문화를 이렇게 심층적으로 묘사하는 경우는 드물다. 사실 처음 읽는 동안엔 이렇게 묘사에 공을 들이는 이유가 와 닿지 않아서 읽히기는 잘 읽히는 한편으로 아리송한 기분도 적잖이 들었다. 전부터 일본 문화에 관심이 많은 나한테 있어선 아주 새롭거나 충격적이진 않았으나 나말고 다수의 다른 독자들에겐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자신이 일본 혼혈이란 정체성을 어떻게 확립해나갈 것인가 하는 주인공의 자아 성장담이라고 넘기기엔 작품의 묘사 수준은 철저히 공부를 하고 녹여낸 흔적이 다분했던 것이다. 그 흔적이 사람에 따라선 흥미로운 일본 문화 탐방 정도로 치부할 정도로 말이다.


 연작의 세계관 속 가상의 일본 저자의 체험 및 일기에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특히 민감하게 느낄 종류의 혐오 범죄가 등장한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게 일본 조총련계 학교 여학생을 살해한 - 조총련이란 단어는 가네시로 가즈키의 소설을 읽은 독자라면 낯설지 않게 들릴 것이다. - 이야기일 것이다. 일본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북한에 속하지도 않은 그들이 단지 옛날 한복을 연상시키는 교복을 입었다고 우익의 타겟이 된다는 건 참 혐오스러운 일이다. 사회의 성향에 따라 어디에나 강자가 있으면 약자도 있는 법이지만 저렇게 국적도 불분명하다시피 한 절대적 소수자들에게 행사하는 폭력이라니 끔찍한 일이지 않은가.

 박민정 작가는 기본적으로 여성 서사를 쓰는 작가이긴 하나 거기서 비롯돼 확장되는 세계관이나 심층적인 설정은 단순히 '여성 서사'라는 단어만으로 수식하기엔 좀 모자란 감이 있다. 아니, 표현을 달리 하자면 여성 서사의 외연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그 범위를 아득히 초월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고 봐야겠다. 단순히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화자의 이야기일 줄 알았던 작품이 이웃나라 일본의 갖가지 혐오 양상을 담아내고 그 안에서 여성을 비롯한 여러 소수자들을 억압하기론 남말할 처지가 아닌 한국의 모습도 그려 상당히 복합적으로 읽혔다.


 어느 나라에선 여성이 혐오의 대상으로, 어디에서는 여성을 전시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것엔 큰 차이가 없고 실제론 한국이나 일본이나 여기나 저기나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에 다다르니 초반에 느꼈던 '왜 이토록 일본 문화를 심층적으로 묘사하는가' 하는 질문은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이토록 일본을 묘사해도 결국엔 우리 모두에게 공감을 끌어낼 이야기에 도달한 걸 보고 기실 무의미했던 걱정이었구나 싶기 때문이다. 아까 '성차별이 비단 특정 국가나 시대의 문제가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얘기해볼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는데, 따지고 보면 외국 소설을 읽는 이유가 단지 외국 문화를 접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읽는 것 아니잖은가. 해외 여행을 하는 이유도 이와 마찬가지겠는데, 외국 소설을 통해 우리나라도 돌아볼 수 있고 혹은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이야기기에 읽는다는 걸 생각하면 이와 같은 깨달음이 사뭇 새삼스럽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내들의 학교'


 표제작. 등장인물들의 이해관계나 작품의 세계관이 한 번에 와 닿지 않고 괜히 번거롭게 꼬아놓은 감은 들지만 그래도 흥미롭게 읽힌 작품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와 동떨어진 세계관을 묘사했지만 읽는 동안 그런 이질감은 잘 안 들었고 결국엔 지금 현재 우리가 공감할 만한 이야기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위의 연작과 일맥상통한 점도 있었다. 제아무리 동성끼리의 결혼이 법적으로 제도화된 미래라 해도 사회적인 인식은 물론이고 방송국이 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시대를 못 쫓아갔다는 게 작품을 읽는 내내 상상이 됐는데 이 부분에선 비교적 최근에 읽은 SF 소설 <xx>가 연상되기도 했다.

 굳이 성적 취향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동성끼리의 관계에서도 사람의 기질에 따라 각자 서열이 나뉘고 이해관계도 복잡해지는 법이다. 그런데 한때 레즈비언이 페미니스트 사이에서 가장 이상적인 관계로 여겨졌다는데 이는 여성은 무조건 선하고 폭력적이지 않은 존재라는 일종의 성차별적 견해에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레즈비언은 단순히 성적 취향일 뿐이고 여성이라고 무조건 천편일률적인 성격을 가지지 않는다는 건 너무나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이건 흔히 자신이 페미니스트임을 강하게 주창하는 여성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인데 현대의 페미니즘, 여성 서사는 더 이상 이런 오류도 범하지 않아야만 비로소 여성 서사로 불릴 자격이 있다고 내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한다.


 구체적이진 않아도 아무튼 법에 비해 사람들 인식이 따라가지 못하는 가상의 미래를 배경으로도 레즈비언 커플의 인권이 가십거리에 불과하고 커플 개개인마다 견해가 다르다는 것, 여전히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은 사회적 약자건 소수자건 그들의 자극적인 스토리로 하여금 감성팔이를 시도한다는 것 등 공감이 가는 통찰이 많은 작품이었다. 꽤 파격적인 시도가 많은 소설이었지만 그럼에도 보편성을 이끌어내는 게 소설가 지망생으로서 배울 점이 많았다. 이런 걸 보면 정말 보편성이란 건 단지 소재의 참신함으로만 함부로 예단할 수 있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책의 다른 수록작은 지금 기준에선 평범하게 읽혔는데 책 자체는 소장 가치가 높아 나중에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최근 5년에서 10년 안으로 다시 읽은 소설들이 처음 읽었을 때와는 판이한 감상을 안겨서 이 책도 기대가 된다. 그게 몇 년 뒤가 될는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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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뢰인은 죽었다 탐정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2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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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8.2







 최근 하무라 아키라를 주인공으로 삼은 드라마를 봐서 내친 김에 원작 소설도 읽게 됐다. 시리즈 순서상 첫 번째 작품인 <네 탓이야>를 읽을까 했지만 특이하게도 난 이 책으로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를, 그리고 와카타케 나나미의 작품을 처음 접했다. 그래서 이 책을 정확히 10년만에 읽게 됐다. 가급적 어떤 책이건 다시 읽는다면 최소 5년 정도의 시간을 두려고 하지만 10년이라니, 아무래도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다. 이 책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만족도에 큰 차이는 없지만 그 사이에 이 책을 원작으로 둔 드라마를 시청했더니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지금 보니까 드라마가 확실히 드라마라는 장르에 맞춰 각색한 게 내 취향에는 좀 더 잘 맞았다. 원작은 영 건조해서...



 '짙은 감색의 악마'


 아마 드라마에서 가장 논란이 일었을 에피소드일 텐데 이 책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두 단편을 엮어낸 그 에피소드는 하무라 아키라의 적대자라고 할 수 있을 존재가 등장한다. 상당히 형이상학적인 존재감을 내뿜는 '짙은 감색의 악마'는 우연한 죽음은 따분하다고 말하면서 필연적인 죽음을 자기 임의대로 선사하는 괴악한 심성의 소유자인데 무슨 암시를 거는지 아무튼 최면의 대가라 상대를 정신적으로 궁지에 모는 일처리가 대단하다. 전편의 사건의 트라우마를 채 극복도 하기 전인 하무라가 또다시 지독한 시련과 마주한 셈인데 이 악마는 막판엔 대놓고 싸움을 거는 듯 정체를 숨기지도 않아 책의 시작을 장식하기에 괜찮은 에피소드가 아니었나 싶다. 제법 기대가 되잖은가.



 '시인의 죽음'


 내가 봤을 때 가장 와카타케 나나미스런 작품. 솔직히 시인의 죽음의 진상을 쫓는 전개는 좀 지루했지만 그가 자살한 이유를 납득할 수 있게, 그리고 엄청나게 서늘하게 묘사한 작가의 솜씨에 제법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이 단편은 드라마에선 다뤄지지 않았는데 시인의 약혼녀이자 하무라의 친구가 개성적이라서 이 캐릭터를 과감히 삭제한 드라마 제작진의 판단이 아쉽기만 하다. 혹시 모르지, 시즌 2에서 다뤄질는지.



 '아마, 더워서'


 이 단편도 드라마에서 다뤄지지 않았지만 범인의 심상과 비슷한 인물이 드라마에서도 등장한다. 도쿄의 더위는 살인적이기로 유명해서 소설이나 드라마나 그 묘사가 남달랐던 게 인상적이었는데 그렇다 해도 추리소설에선 약간 부적합한 요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스포일러라 자세히 말하긴 그렇지만 분량이 길고 짧고를 떠나 적어도 탐정의 노력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는 결말이 좋지, 이런 결말은 너무 허무하지 않나 싶었다. 나쁘게 말하면 좀 성의없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한마디로 범인의 동기가 충격적이고 현실에서도 있을 법하지만 픽션으로는 좀 약했다.



 '내 조사에 봐주기는 없다'


 이 단편은 드라마가 좀 더 괜찮았다. 하무라 아키라의 시크함과 인간미를 드라마가 동시에 잘 담았던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원작의 결말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 결말을 제시하니 말이다. 이미 몇 년 전에 자살한 여자의 주변인물을 더 추가해 꽤 그럴싸한 결말을 만들었다. 그 에피소드 말미에세 한 인물이 '세상은 자기네들이 원하는 답만 바라고 실제로 그쪽으로만 시선을 둔다'는 대사도 울림이 있어 원작에선 그를 못 듣는다는 게 내심 아쉬웠다.



 '편리한 지옥'


 반대로 이 단편은 끝까지 아리송했던 드라마보다 원작이 더 괜찮았다. '짙은 감색의 악마'가 드라마와 달리 좀 싸가지 없게 그려지는 게 흠이지만 - 드라마에선 제법 '간지'가 났다. - 그가 사람들에게 암시를 거는 교묘한 노하우가 납득이 가게 설명된 게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하무라가 탐정으로서의 숙명을 자각하게 만들고 그 과정이 독자들이 추리소설을 읽는 이유와 맞닿은 지점이 있던 것도 흥미로웠다. 수수께끼의 해결을 탐닉하는 심리엔 저항하기 힘든 중독성이 있단 것에 무척 공감이 됐다. 드라마에선 하무라의 언니가 자살한 이유를 안다는 걸로 하무라를 낚는데 소설은 디테일한 부분에서 달랐다. 드라마나 소설이나 다른 에피소드까지 묶어주는 흥미로운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내게 있어 처음 접하는 종류의 트릭을 선보여준 '여탐정의 여름 휴가'도 개인적으로 잊을 수 없는 작품이다. 처음 읽었을 때 이해가 안 가 몇 번이고 다시 읽은 기억이 난다. 지금 읽으니까 상대적으로 심심하게 읽혔지만 어쩔 수 없지. 그나저나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는 재미는 역시 쏠쏠하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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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연금술사 27
아라카와 히로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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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2






 스포일러 있음


 <강철의 연금술사>는 비단 나에게만이 아니라 다른 모두에게 인생 작품이라 칭해지는 만화일 것이다. 오랜만에 다시 읽어봤는데 27권의 분량을 순식간에 읽어서 역시는 역시 역시구나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초반의 몇몇 부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전개며 결말까지 연재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구상이 완료된 작품이기에 몰입도가 높은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예전에 연재 속도에 맞춰 한 권씩 한 권씩 끊어서 읽기보단 지금 이렇게 1권부터 한 번에 다 읽으니까 진가가 제대로 느껴진 작품이었는데, 복선은 모두 회수하고 누구 하나 버릴 캐릭터 없고 쓸데없는 장면이나 대사도 없었고 무엇보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동선이 훌륭했다.

 가령 엘릭 형제가 리젠블로 돌아갈 때 마르코 박사를 만난 것이나 윈리가 오토메일 고쳐주러 센트럴로 온 전개가 나중에 있어 정말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음을 생각해보자. 전자는 형제가 본격적으로 '현자의 돌'의 어두운 진실을 마주하게 되고 이는 아메스트리스 이면에서 꿈틀거린 국가적 음모와 맞닥뜨리는 계기가 된다. 후자의 경우 윈리가 포지션상 결국에 '기다리는 여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능동적으로 형제와 여정을 함께 하며 형제의 정서적 성장이라는 작품의 테마에 크게 기여해준다. 특히 윈리가 부모의 원수를 앞에 두고도 복수의 고리를 끊는 장면은 작품 초반부터 언급된 '등가교환'의 원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임을 생각하면 이래저래 모든 전개가 결말을 위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는 것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작중에서 하나의 물질로는 하나의 결과만을 내지 못하는 연금술의 원리를 들어 마찬가지로 하나의 행동엔 그에 합당한 결과밖에 얻지 못한다고 연금술사들은 역설한다. 작중 연금술사들이 작품 세계관에서 엄연한 과학자라는 걸 생각하면 만물의 이치를 그저 등가교환의 법칙에서만 바라보려는 이들의 사고방식은 과학만능주의의 일종이라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강철의 연금술사>는 연금술을 과학으로 치환해서 보면 생각 이상으로 곱씹어볼 점이 많은 작품이다. 대체로 우리네 세상이 과학만능주의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는 걸 떠올렸을 때 작품의 결말은 퍽 의의가 있었다.

 막판에 동생을 구하기 위해 연금술을 쓸 수 있는 잠재력을 기꺼이 내바친 에드의 모습에선 - 심지어 동생의 진리의 문을 통해 원래는 돌아갈 수 없었을 현실로 돌아온 것에서 더더욱! - 과학이 만능은 아니거니와 오히려 인간으로 하여금 신에 가까워졌다는 착각에 빠지게 만들 뿐이라는 주제의식이 강하게 느껴졌다. 특히 1화에서부터 신의 존재를 부정하며 오히려 자기들 연금술사가 신에 가장 가깝다고 얘기한 에드였던 만큼 이 결말이 소년의 성장기라는 측면에서도 참 적합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작품이 유독 비슷한 시기에 연재된 여느 소년 만화에 비해서도 암울한 세계관을 선보이긴 했지만 이런 어둡고 현실적인 세계관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가능성을 추구한 끝에 결말에서 형제들은 자기들이 신봉하던 과학의 법칙을 넘어선 가치를 찾아 다시 여행길에 오른다. 첫인상과는 달리 상당히 휴머니즘이 넘쳐나는 작품으로 끝맺어졌는데 돌이켜보면 이렇게 암울하게 세계를 바라봤기에 보다 휴머니즘을 역설하기에 더 설득력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세상이 얼마나 비참하게 생겨먹었건 외면하질 않으니까 밝은 이야기로 나아가기에도 하등 어색함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정말 뜻깊은 독서였다.

 아무튼 참으로 강철과도 같은 완성도를 지닌 작품이었다. 주제의식부터 정교한 서사나 연출, 입체적인 캐릭터들, 유려한 그림, 박진감 넘치는 액션, 부족함이 없는 설정, 그리고 개그까지. 만약 이 작품에서 개그가 없었다면 이렇게 부드럽게 읽히지 못했을 것이다. 애초에 작품 자체가 좀 심오한 감이 있어서 사실 처음 읽었을 때는 작품의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다시 각잡고 읽으니까 보면 볼수록 잘 만들어진 작품이더라. 어쩌면 나이가 들었을 때 읽어서 더 감상이 남다른지 모르겠다.


 이런 장편 연재 작품의 경우 뒬 갈수록 산으로 가는 경향이 있는데 이 작품은 결말까지 구상을 마치고 연재에 돌입해서 마치 소설을 읽을 때 주로 느끼는 작가의 절륜한 계획성을 엿볼 수 있었다. 예전엔 <아이실드21>, <데스노트>와 함께 이 작품을 인생 만화 BEST 3에 들곤 했는데 이젠 이 작품이 아예 독보적인 1등으로 자리잡게 됐다. 다른 연재 만화도 이만한 완성도를 지니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럼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것일 테지. 이런 만화는 평생에 한 번 만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니까.

고통을 동반하지 않는 교훈에는 의의가 없다.

인간은 어떤 희생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으므로.

하지만 그것을 뛰어넘어 자기 것으로 만들었을 때...

사람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강철 같은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 제108화 ‘여로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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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명화들 - 뭉크에서 베르메르까지
에드워드 돌닉 지음, 최필원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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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어쩌면 <절규>는 뭉크나 뭉크의 고향인 노르웨이만큼이나 유명한 그림일지 모르겠다. 그 유명세 때문인지 대부분의 명화가 그렇듯 <절규> 역시 도둑들의 표적이 됐는데 이 책은 <절규>가 첫 번째로 도둑맞은 사건을 다룬 논픽션이다. 런던 경찰청 '예술반'의 형사 찰리 힐을 주인공으로 삼은 일종의 전기물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 점이 여타 소설과는 다르게 읽혔다. 나는 개인적으로 뭉크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뭉크 관련 얘기가 좀 나오리라 기대했지만 뭉크나 <절규> 얘긴 잠깐 나오고 대체로 <절규>를 되찾는 수사와 예술 범죄들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중간중간 찰리 힐이 과거에 했던 수사나 비슷한 유형의 명화 도난 사건이 매우 많이 삽입돼서 집중이 잘 안 됐는데 아무래도 흡입력 있는 범죄물을 기대했던 나로선 약간 다른 형태의 전개라 내심 지루하게 읽혔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무기나 마약 못지않게 명화도 암시장에서 많이 거래된다는데 이 점은 우리에게 꽤나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야기 초반에 <절규>를 비롯해 세계적인 명화들이 그렇게 쉽게 도둑맞을 수 있는 이유는 미술관의 무척이나 안일한 보안 체제 때문이 크다고 볼수밖에 없다. 미술관의 경비원들이 그렇게 홀대를 당하고 보안 시스템 설치에 그렇게 인색해한다는 게 정말 놀라울 지경이었는데 그로 인해 갖은 명화들이 도둑맞고 일부 작품은 지금도 행방이 묘연한 걸 보면 정말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는 속담이 절로 나온다. 애초에 건사를 잘 했으면 심미안 없이 그저 명화의 금전적 가치에 끌린 도둑들의 표적이 될 일도 없었을 텐데. 명화들을 되찾기 위한 찰리 힐의 함정 수사는 분명 흥미롭지만 그가 속한 예술반이 여타 범죄 수사반에 비해 존재 의의가 저평가를 당하고 명화를 훔치는 일이 상대적으로 허들이 낮은 범죄란 걸 생각하면 참 한숨 나오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사건의 배경은 1994년 노르웨이 릴레함메르 동계 올림픽이 개최되기 거의 직전에 벌어졌다. 나라가 올림픽의 열기로 들떴을 때 벌어진 희대의 과시형 범죄다. 고작 사다리 하나로 간단히 <절규>를 훔쳐낸 범인들은 '허술한 보안에 감사를 표합니다' 라고 적힌 엽서를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노르웨이 경찰은 <절규>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범인들의 계획이 너무 절묘했고 미술관부터 시작해 노르웨이란 나라 자체가 범죄에 내성이 없어서 <절규>를 되찾기란 굉장히 요원해보였다. 그때 영국의 형사 찰리 힐이 나서게 되는데 이 부분이 나름 설득력 있게 그려진 게 좋았다. 책을 읽기 전엔 왜 영국인이 노르웨이 그림을 찾는 건가 싶었는데 명화란 그걸 그린 작가의 국적의 것이 아닌 - 뭉크는 죽기 직전 자신의 작품들이 나치에 의해 태워질 것을 두려워해 거의 전 작품을 오슬로에 기증했다. - 그 그림을 보고자 하는 전세계 모든 사람의 것이라는 맥락에서 본다면 영국이건 어디건 외국 수사관이 나서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여기까지만 했다면 좋았을 텐데, 상술했듯 이 책은 범죄물이면서 찰리 힐의 전기물이기도 한데 그래서 그런지 유독 그의 개인사가 많이 기술된 느낌이었다. 이 책의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 <절규>를 포함한 여러 명화를 둘러싼 함정 수사도 과거 회상식으로 다룬 건 좋았지만 그게 너무 잦았던 것, - 언급하는 그림들 중 대표적인 것만 그때그때마다 지면에 실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 게다가 찰리 힐의 인물 됨됨이나 성격을 지나치게 설명하려 든 것이 마이너스 요소였다. 찰리 힐이 어떤 인물인지는 설명하기 보단 에피소드로 묘사하는 식으로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 책은 엄연히 소설이 아닌 비소설에 해당해서 이런 부분이 특히 달랐던 것 같다. 느낌적인 느낌에 불과할 수 있지만 그래도 소설 전공해본 사람이라고, 소설적인 것과 그렇지 않는 느낌이 유독 대비가 됐다.


 찰리 힐에 대해서 얘기하느라 정작 <절규> 수사가 묻힌 감이 있는데 실제로 본편에 해당하는 이야기의 분량은 생각보다 짧았다. 어쨌든 감격스럽게도 <절규>는 되찾았지만 그 10년 뒤에 이 책이 세상에 나올 즈음에 다시 <절규>가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뭉크는 생전에 많은 버전의 <절규>를 그렸는데 동계 올림픽 전에 도둑맞은 <절규>와 10년 뒤에 도둑맞은 <절규>는 다른 작품이다. 어쨌든 그만큼 뭉크의 작품이 도둑들 눈엔 매력적이고 그에 비해 미술관들의 태도는 안일하기 짝이 없단 얘긴데... 이런 낮은 수준의 보안 시스템, 그리고 마음가짐으론 도대체 남아날 명화가 없겠다 싶었다. 결국 그 <절규>도 되찾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2년 전에 내가 <절규>를 직관한 게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정말 운이 좋은 거였구만. 그 어떤 보안 설계사도 도둑은 못 이긴다지만 앞으로는 같은 일이 안 벌어지길 바란다. 두 번 일어났으니 세 번도 안 일어난단 보장은 없고, 그때도 되찾으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다음은 없을 거라 생각하고 마음 굳게 먹어야 더 많은 사람들이 <절규>를 볼 수 있을 테니까. 물론 나도 다시 보러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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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부메의 여름 1 - 시안 코믹스
쿄고쿠 나츠히코 원작, 시미즈 아키 그림, 강동욱 옮김 / 삼양출판사(만화)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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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재미와는 별개로 선뜻 추천하기 까다로운 작품이 있는데 교고쿠 나츠히코의 '교고쿠도' 시리즈가 그에 해당할 것이다. 그의 데뷔작인 <우부메의 여름>은 600페이지가 넘는데 이게 시리즈에서 가장 분량이 짧음에도 진입 장벽은 낮지 않다는 게 놀라운 일이다. 분량도 분량이지만 특유의 장광설과 난해함이 그 시리즈의 매력이자 고질적인 단점이기도 할 텐데 이러한 부분이 너무 겁이 난다면 이 만화가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 듯하다.

 그래도 원작이 소설이라면 가급적 소설 먼저 읽어보라고 말을 하는 편이지만... 나도 <우부메의 여름>을 펼치기 전에 거부감이 만만치 않았던 지라 - 여담이지만 아는 형이 생일 선물로 주신 책이다. 선물로 받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걸렸을지... - 만약 만화가 있었다면 아무래도 이쪽에 먼저 손이 갔을 것 같다. 소설과 만화 둘 다 읽어본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내용은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만화가 원작을 잘 재현했고 장벽은 당연히 만화 쪽이 훨씬 낮다. 시각적인 재미는 물론이고 원작에서 느낄 수 있었던 장광설의 묘미도 알기 쉽게 잘 살린 편이다.


 그나저나 이렇게 만화로 다시 읽으니까 원작의 문제점이랄까, 약점이랄 만한 게 눈에 띄기도 했는데;; 일단 우울증 환자 세키구치가 화자가 됨으로써 원작이 300p이면 끝날 걸 600p로 늘어낳듯 만화도 2권이면 끝날 내용이 4권으로 늘어난 격이었는데 이게 다시 읽으니까 그렇게 답답할 수가 없었다. 뭐 이렇게 암시에 잘 걸리는지 도무지 신뢰할 수가 없어 세키구치는 어떤 의미에선 화자로는 실로 부적절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더군다나 에노키즈도 탐정이면서 사건 해결은 몰라라 - 다른 건 몰라도 신고도 안 하는 건 좀... - 하는 것도 지금 다시 보니까 너무 의도적인 연출이었다고 생각된다. 너무 의도적으로 후반부에 기대감을 줘서 경우에 따라선 사건의 내막에 실망한 사람도 적잖았을 듯하다.

 소설을 읽고 만화로 보니까 더 그렇게 느끼는 걸까, 거의 1/3 가량을 교고쿠도의 추리로 펼쳐지는 전개가 소설로 볼 땐 별 느낌 없었는데 만화로 보니까 너무 쉴 틈 없이 몰아쳐 되려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애당초 사건의 진상이 아주 논리적이라 볼 수는 없으므로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건 힘들다 하더라도 몇몇 부분, 이를테면 몇몇 인물이나 저주가 갑자기 등장하는 등 복선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약간 디테일이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사건의 내막이 어떻게 보면 논리적이라기 보단 최대한 말이 되게끔 억지로 갖다 붙인 느낌이 든다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도 요번에 그 부분이 강하게 의식됐는데 여러 우연의 일치가 작위적이긴 해도 전부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해서 시리즈의 매력은 잘 살렸다고 본다. 이른바 신개념 고품격 괴담이랄까. 괴담이라는 표현을 작중 교고쿠도는 질색할 것 같지만 제아무리 인간의 손에 의해 벌어질 만해서 벌어진 일이라지만 괴이하다는 말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이 작품이 영화로도 나왔다는데 영화는 어떻게 나왔으려나. 캐스팅이 어마어마하던데, 궁금하다.

 다른 게 아니라, 충격적인 내용 때문에 - 그림체도 만만찮게 충격적이었다. - 간과하기 쉬운 부분이었을 주제의식은 잘 살려서 그게 무엇보다도 다행이었다. 찾아보니까 이 만화를 그린 시미즈 아키란 작가가 아예 교고쿠 나츠히코의 작품 만화화를 전담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여러 작품을 그렸더라. 어쩐지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것 같더니... 왜 데뷔작을 이렇게 늦게 만화화했는지 모르겠지만;; 시리즈의 대표작인 <망량의 상자>부터 만화화된 작품이 많아 그 작품들도 보고 싶어졌다. 물론 소설을 먼저 읽은 다음에 만화로 볼 텐데 그렇게 되면 실제로 만화로도 읽기까진 꽤 시간이 걸릴 듯하다.



 https://blog.naver.com/jimesking/220491874682

 이건 원작 <우부메의 여름>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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