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 - 오스만 제국에서 아랍 혁명까지, 개정판
유진 로건 지음, 이은정 옮김 / 까치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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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아랍’이지?

 

‘아랍’이라는 말을 들으면 뭐가 떠오를까? 대체로 ‘이슬람’이라는 종교나 ‘중동(中東)’이라는 지역이 떠오를 것이다. <역사서설(歷史序說, Muqaddimah)>로 유명한 역사철학자 이븐 할둔(Ibn Khaldun, 1332~1406)은 아랍을 오아시스 주변에서 간단한 농사를 하며 정착한 무리를 포함한 유목민으로 인식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래서 ‘아랍’을 ‘사막의 거주민’이라는 베두인(Bedouin)을 의미하는 보통 명사로 이해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는 보는 ‘아랍’은 조금 다르다.

 

이슬람 초기 아랍인은 아라비아 반도 부족들 중에서 언어(아랍어)와 종족적 기원을 공유하고 다수가 수니 이슬람을 믿는 공통 신앙을 가진 사람들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p. 19]

 

어쨌든, 중동(中東) 지역에 위치하지만 튀르크어를 사용하는 튀르키에나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이란은 아랍에 속하지 않는다고 본다. 또한, 공식적으로 여전히 ‘이슬람’을 국교로 채택하지 않고, ‘레바논 내전(1975~1990)’ 이전에는 기독교 국가에 가까웠던 레바논의 존재도 ‘아랍’을 ‘이슬람’이나 ‘중동(中東)’과 동일시할 수 없게 한다.

 

 

유진 로건의 [아랍]은

 

이 책은 아랍의 근대와 현대를 다루고 있는 역사책이다. 크게 4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제1장부터 제3장까지는 오스만 제국의 아랍 지배와 함께 시작된 아랍의 근대사를, 제4장부터 제8장까지는 영토와 영향력을 잃어가는 오스만 제국의 발버둥을, 제9장부터는 제14장까지는 1948년 아랍인의 땅에 유대 국가가 건국된 이후 아랍 국가들의 모습을, 개정판을 내면서 추가된 제15장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아랍인들의 현재를 각각 그리고 있다.

 

 

아랍의 근대화

 

이 책 <아랍>은 오스만 제국의 9대 술탄 셀림 1세(재위 1512~1520)가 거느린 소총으로 무장한 최신의 화약 보병부대와 맘루크 왕조의 49대 술탄 칸수 알 가우리(재위 1501~1516)가 거느린 개개인의 무력에 치중한 기병이 충돌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오스만의 맘루크 제국의 정복은 아랍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맘루크 검객과 오스만 소총수의 운명적인 무력 충돌은 아랍 세계의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또한 오스만의 정복은 이슬람 등장 이후 처음으로 아랍 세계가 비(非)아랍인이 세운 수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 중략 ~

하지만 1517년부터는 아랍 지역 밖의 수도들에서 정해진 규칙에 따라서 아랍인의 사회적 지위가 협의되었고, 이와 같은 정치적 현실은 근대 아랍 역사의 본질적인 특징 중의 하나가 되었다. [p. 34]

 

쉽게 맘루크 왕조의 멸망을 아랍 근대의 시작이라고 얘기하지만, 사실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다.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고대, 중세, 근대, 현대의 시대구분(時代區分)은 사실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는 적용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근대(近代, Modern)’라고 하면, 흔히 시민사회의 성립과 자본주의의 형성을 떠올리는데, 이 기준으로 보면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그 상징이 된다. 하지만 ‘나’라고 하는 개인의식의 성립을 기준으로 한다면 르네상스 시기까지 소급할 수 있다. 그래서 ‘근대(近代, Modern)’를 르네상스부터의 ‘Early Modern’과 프랑스 혁명부터의 ‘Late Modern’으로 나누기도 한다. 그렇다면 오스만 제국의 아랍 지배도 이 기준을 적용해서 ‘Modern’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총, 칼 같은 냉병기(冷兵器)에서 소총과 같은 화약무기로의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이는 아랍의 근대가 유럽의 근대와 다르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아랍의 근대는 어떤 것일까?

 

맘루크 제국을 정복한 후 2세기 동안 오스만 제국은 북아프리카에서 아라비아 남부까지 성공적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아랍 지역에서 정치체제를 표준화할 생각이 없었던 또는 표준화 할 수 없었던 오스만은 많은 경우 지역 엘리트들과 협력을 통하여 통치하는 방식을 택했다. 각각의 아랍 지역들은 이스탄불과 각기 다른 관계를 맺으면 각양각색의 행정 구조를 만들어냈지만, 그들 모두는 분명히 하나의 제국의 일부였다.

~ 중략 ~

그러나 중앙과 아랍 주변부 간의 역학관계가 18세기 후반에 달라졌다. 새롭게 등장한 지역 통치자가 세력을 규합하여, 종종 오스만 제국의 유럽 적국들과 협력하며 오스만 체제에 반하는 자치를 추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p. 60]

 

이건 아무리 봐도 봉건제(封建制) 혹은 고려 시대와 비슷하지 않은가! 이를 “같은 국가의 통제 하에 있으나, 서로 다른 법률과 관료에 의해 다양한 종교집단들이 함께 삶을 영위하는 일종의 ‘모자이크 구조’가 수백 년 간 오스만제국의 근간을 이룬 질서의 핵심1)”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니 오스만 제국이 아랍을 지배하고 몇 세기가 지난 후에  ‘오스만의 근대화 개혁’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물론 오스만 제국의 아랍 지배에 의해 아랍의 ‘근대가 시작’되었다면서 다시 근대화’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그렇다면 아랍의 근대화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총독이었던 무함마드 알리(1770~1849)의 개혁이 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무함마드 알리는, 훗날 오스만이 모방하게 되는, 유럽의 개념과 기술에 의존하여 이집트를 개혁의 길로 이끌었던 혁신가이기도 했다. 그는 중동 지역에서 최초로 농민 군단을 창설했다. 또한 유럽 바깥에서는 최초로 실현된 산업화 프로그램에 착수했고, 군에 필요한 무기와 직물을 생산하고자 산업혁명 기술을 도입했다. 교육사절단을 유럽의 수도들에 파견하고 유럽의 서적 및 기술편람을 아랍어 판본으로 출판하기 위해서 번역국도 창설했다. 뿐만 아니라 오스만 술탄의 총독이 아닌 독립적인 군주로 자신을 대우하는 유럽 열강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기도 했다. [p. 100]

 

대체로 지방의 강력한 권력자와 중앙은 갈등을 빚기 쉬운데, 풍요롭고 넓으며 중앙과 충분한 거리를 갖고 있는 이집트 총독들은 그런 유혹을 받기 쉬웠다. 무함마드 알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와 오스만 제국의 아슬아슬한 관계는 오스만 제국이 그리스의 사실상 독립을 요구하는 영국과 프랑스에 맞서기로 결정하는 바람에 그리스 반란군을 진압하던 이집트 군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 파탄에 이르렀다. 그 결과 무함마드 알리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인 시리아를 침략했다.

 

오스만 개혁의 시대는 제2차 이집트 위기2)가 정점에 이르렀던 1839년에 시작되었다. 술탄 마흐무드 2세가 죽고 10대였던 압돌 메지드 1세가 등극한 1839년은 급진적인 개혁 프로그램을 선포하기에는 좋은 시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무함마드 알리의 이집트 군으로부터 급박한 위험에 시달리고 있던 오스만 제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유럽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었다. 유럽으로부터 영토와 통치권에 대한 보장을 받기 위해서는 근대국가 세계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유럽 기준의 치국책(治國策)을 충실히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유럽 열강들에게 확인시켜줄 필요가 있다고 오스만 정부는 생각했다. 더구나 마흐무드 2세의 밑에서 일했던 개혁가들은 전대 술탄의 치세 동안에 이미 시작된 변화들을 강화시키고 그의 계승자로 하여금 개혁 과정에 참여하도록 만들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러한 이중적 동기가 오스만 개혁 시대의 특징이 되었다. 유럽의 환심을 사기 위한 선전행위가 대내외적인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개혁에 나선 진심 어린 결의와 결합한 것이다. [p. 128]

 

아이러니하게도 외부의 간섭에서 벗어나 부강해지기 위해 시작한 일련의 개혁과 개발 사업은 도리어 오스만 제국을 더욱 유럽의 지배에 종속시켰다. 특히 유럽으로부터 들여온 차관은 오스만 제국을 파산으로 몰고 갔다.

 

프랑스는 1881년에 튀니지로 지배권을 확장했고, 영국은 1882년에 이집트를 점령했으며, 이탈리아는 1911년에 리비아를 장악했고, 유럽 열강은 1912년에 모로코(오스만 지배로부터 독립을 지켰던 유일한 북아프리카 국가였다)를 프랑스-에스파냐의 보호령으로 인정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북아프리카 전체는 유럽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다. [p. 155]

 

이런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에 아랍인들이 대항했지만, 신식 무기와 강력한 군대를 가진 그들을 이길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제국주의적 편의에 따라 조성한 팔레스타인 같은 위임통치령은 또 다른 불씨를 잉태했다.

 

벨푸어 선언이 공동체 간의 갈등의 빌미가 되었다. 팔레스타인의 매우 제한적인 자원을 고려한다면,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공민권과 종교적인 권리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그곳에 유대인들을 위한 민족향토를 건설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예상한 대로 위임통치는 대립하던 두 민족주의, 즉 고도로 조직화된 시오니즘 운동과 영국의 제국주의 및 시오니즘적 식민주의라는 이중의 위협에서 기인한 새로운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간의 충돌을 야기했다.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제국주의가 중동에서 양산한 가장 큰 실패작이었고, 그 결과 중동 전역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갈등과 폭력사태에 휘말리게 되었다. [pp. 277~278

 

이런 상황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대 국가가 건국되면서 수많은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발생했다. 이에 대항하여 젊은 아랍 민족주의자 군인들은 1949년 시리아에서, 1952년 이집트에서, 1958년 이라크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이들은 구 제국주의 국가인 영국이나 프랑스와는 연계가 없었지만, 초 강대국 미국과 소련이 내세운 ‘냉전(冷戰)’이라는 새로운 질서(New Order)에는 적응해야만 했다.

 

이스라엘에게 수에즈 전쟁은 군사적으로 놀라운 승리였지만 정치적으로는 후퇴를 의미했다. 벤 구리온은 IDF(이스라엘 방위군)가 무력으로 점령한 영토에서 철수해야 하는 현실에 당혹스러웠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아랍 이웃 국가들에게 이스라엘 군대의 기민함을 보여줄 수 있었다. 그러나 3국 침략에 동참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이 지역에 대한 제국주의 정책의 연장선으로 생각하던 아랍 세계의 보편적인 인식이 더욱더 강해졌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제국주의와 연계되면서 아랍 세계가 유대 국가를 인정하거나 평화를 구축하는 것은 물론이고 받아들이는 것조차 더욱더 어려워졌다. 그 대신에 이스라엘을 패퇴시키는 문제는 팔레스타인 해방뿐만 아니라 중동에서 제국주의 세력을 일소하는 문제와도 동일시되기에 이르렀다. [p. 432]

 

하지만 각국의 이해관계에 부딪혀 단합되지 못한 아랍 민족주의는 쇠퇴했고, 무력으로 유대 국가를 말살하는 일은 실패로 돌아갔다.

 

아랍 정부들은 시오니스트 적과 싸워서 팔레스타인 향토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아랍의 공동 의제에 말로만 경의를 표할 뿐, 모두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쫓고 있었다. 그리고 이 일대의 석유 자원이 막대한 부를 창출하여 아랍의 세계 경제에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힘이 중동을 제어하게 되었다. [p. 503]

 

하지만 석유의 힘보다도 이슬람의 힘을 더욱 믿는 젊은 세력이 등장해서, 이란에서 혁명을 일으켜서 왕정을 폐지시키고, 이집트에서는 사다트 대통령을 암살했다. 나아가 이들에 의해 극단적인 이슬람주의 테러 세력이 형성되었다.

 

한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오슬로 평화 협정 체결은 유대인과 아랍인의 공존 가능성을 보여줬지만, 오늘날에도 끊이지 않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그 길이 아직 멀고 멀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개정판을 내면서 추가된 제15장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아랍인들의 현재를 보여준다. 튀니지에서 발발한 “아랍의 봄”으로 인하여 아랍 각국은 혁명의 물결에 휩싸였지만, 그것이 성공한 튀니지를 제외하고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거나 더욱 참혹한 내전으로 빠져드는 등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다.

 

튀니지는 아랍의 봄 혁명 이후 새로운 헌법 질서로의 평화로운 정치적 이행을 성사시킨 유일한 아랍국가이다.

중략 ~

튀니지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은 중도적이고 세속적인 두 개의 다른 정당과 연대함으로써 고도의 국민적 단결을 유지했다. 새로운 헌법 초안을 마련하는 과정은 지난했지만, 강제보다 합의에 기반한 특성을 띠었다. 2014년 1월 채택된 신헌법에는 혁명운동의 성과인 시민의 권리와 법의 지배가 명시되었다. [pp. 729~730]

 

그리고 <아랍>은 아랍의 민주주의에 대한 저자의 희망적인 전망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튀니지의 취약한 민주주의 실험이 성공한다면, 이는 아랍 세계와 전 세계에 큰 이득이 될 것이다. 아랍 세계가 2010년대의 폭력과 대대적인 파괴로부터 벗어났을 때 아랍인들은 반드시 책임 정부에 대한 자신들의 정당한 요구를 재개할 것이기 때문이다. [pp. 729~730]

 

 

 

 

옥의 티

 

p. 67

아랍의 지역 경제는 실질적인 이득을 보았고 장인(丈人)과 민병(民兵)에 대한 후원 확대로 지역 통치자의 힘은 더욱 커졌다. ⇒ 아랍의 지역 경제는 실질적인 이득을 보았고 장인(匠人)과 민병(民兵)에 대한 후원 확대로 지역 통치자의 힘은 더욱 커졌다.

 

1) 김가희, <이슬람 국제체제의 역사적 탐구를 통한 걸프위기의 재구성>,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7, p. 22

2) 제2차 이집트-오스만 전쟁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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