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팅 - 정신분석과 문학 무의식의 저널 Umbr(a)
알렌카 주판치치 외 지음, 강수영 옮김 / 인간사랑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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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보는 무의식의 저널 <엄브라 Umbr(a)> 시리즈다. ‘정신분석과 문학’이라는 부제에서 보듯이 글쓰기와 정신분석의 관계를 다루는 글들을 모았다.

이것은 “정신분석과 글쓰기 혹은 정신분석적 글쓰기라는 주제는 정신분석의 원초적 장면을 불러내어, 기원에서부터 작용한 문자의 기록행위를 전면화” [p. 10]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의 전집이 번역되어 있고, 자크 라깡(Jacques Lacan, 1901~1981)의 논문집 <에크리(Ecrits)>와 세미나 의사록도 번역되어 있다는 현실이 이 주제에 대해 학계에서 많이 다루고 있으리라 생각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이 책의 서문에서 “정신분석을 위시한 모든 담론들이 근본적으로 쓰기를 통한 기록에 기반하고 있다는, 너무도 당연한, 하지만 지식담론을 이해하는 데 매우 핵심적인 사실을 상기시킨다” [p. 11]는 말이 당혹스러웠다. 마치 사람은 먹어야 살 수 있다는 당연한 말을 상기시키는 것처럼.

 

앞에서 글쓰기와 정신분석의 관계를 다룬다고 했지만, 이 책이 다루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라이팅(writing)’과 정신분석의 관계라고 해야 한다. 학창시절의 교육 때문인지 ‘라이팅’이라고 하면 반사적으로 글쓰기가 튀어나오는 나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여기서 말하는 라이팅은 “단순한 글쓰기만이 아니다. 일체의 문자적 ‘새김’과 그로 인해 구성되는 텍스트를 포괄” [p. 19]한다고 한다.

 

마이클 스탠쉬는 [서론: 글과 ‘말하기치료’]에서 “정신분석은 프로이트가 자신의 임상적 경험을 글쓰기라는 근본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기록매체를 통해서 번역하고 전송한 방식이 낳은 직접적인 결과물”[p. 14]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프로이트가 성공한 실험을 ‘글쓰기(writing)’라는 번역기를 통해 보고, 독자가 재현하는 것이 정신분석이라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자가 (재현해서) 경험하는 것은 프로이트가 경험한 것과 절대 동일하지 않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독자에게 동일한 경험의 효과를 제공할 수 있다는 기대를 품고 글을 써 갔다” [p. 15]는 것이다. 마치 선종(禪宗)에서 화두(話頭)를 통해 깨달음을 전달하는 것처럼.

 

알렌카 주판치치의 [바틀비의 자리]는 후크송(hook song)의 반복되는 훅(hook)처럼 귓가에 맴도는 <필경사(筆耕士) 바틀비>의 주인공인 바틀비의 ‘prefer[그렇게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에 대한 분석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는 “단순히 거부하거나 특정한 행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부정을 긍정한다. 그 결과 그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근본적 차별을 손상시키는 제3의 영역을 열어주게 된다.” [pp. 28~29]

긍정도 부정도 아닌, 부정의 긍정이라는 제3의 영역은 물 위에 떨어진 잉크처럼 바틀비에게 일관성을 부여한 공허(空虛)를 강조, 그 자신과 그의 주변 현실을 파내어, 그를 ‘순수한 공간’을 만든다고 한다.

 

캐서린 말라부의 [신경문학]은 <모리스 블랑쇼: 바깥으로부터의 사유>에서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가 “우리가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내는 사건은 ‘밖’으로 나가는 통로이다. 언어는 담론의 존재양식을 피해 가고, 문학적 발화(發話)는 그 자체로 발전하면서 각 부분은 가장 가까운 이웃들과도 구분되고 멀리 떨어져 있는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들을 유지하면서도 모두 개별화하는 공간에서 매 지점마다 관계 내 자리잡고 있다”[p. 35]고 선언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깥으로부터의 사유는 해체의 사유만은 아니다. 푸코와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 1907~2003)에게 문학은 내가 간략히 설명했듯이 죽음과 트라우마의 언어” [p. 51]라고 하면서 문학을 환원주의적 신경생물학이 아닌 푸코주의와 접맥시켜 다루고 있다.

 

루씨 캔튼의 [문자의 실행: 글, 실재의 공간]은 문자의 실천으로서 행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글은 변화가 일어나는 장이 되어 목소리와 발화의 불확실성으로부터 텍스트의 고정성으로 이행하는 통로가 된다. 이런 식으로 텍스트는 의미를 제약하고 규정한다.” [pp. 57~58]

그런데 이렇게 고정된 문자, 텍스트의 실천으로서 행위를 다루기에는 문학보다 연극과 같은 공연 예술이 적합하다. 왜냐하면, “행위와 몸짓, 목소리와 리듬, 공간에서의 몸의 움직임 등을 통해 무대상연은 텍스트가 제공하지 못하고 또 할 수 없는 어떤 것에 형태를 부여” [p. 83]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미셸 라바테의 [문학해석에 저항하는 문자: 라깡의 문학 비평]에서 “라깡은 문자텍스트를 분석해서는 (즉 정신분석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분석이 아니라 비평해야 한다” [pp. 101~102]고 말한다. 피에르 바야르(Pierre Bayard, 1954~ )도 정신분석이 문학에 적용되어온 방식에 대해 비판하며, “정신분석독해의 정석들은 그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무의식적 환상, 원초적 장면, 어린 시절 기억의 중요한 역할 등에 대한 정신분석적 진리를 증명할 뿐이다. 이것은 그 결과가 오류라거나 방법론이 잘못되었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단지 완전한 예상 가능성을 함축한다. 이런 반복성과 예측 가능성은 고작 지루함과 이론적 빈약만을 낳은 뿐” [pp. 111]이라고 했다. 따라서 문학에 정신분석을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신분석을 문학에 적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캐서린 밀로의 [왜 작가인가?]는 정신분석이론을 통해 문학작품을 해석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한다.

첫째, “정신분석가에게는 본질적으로 문학작품을 정신분석적으로 해석하는 일의 정당성, 특히 작가를 관련된 당사자와의 연관성 없이 해석하는 일의 정당성 여부와 관련된 문제가 있다.” [p. 135]

둘째, “문학작품을 그 자체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이 경우 문학을 정신분석을 위해 사용한다.” [p. 135]

 

시기 요크칸트의 [기표와 문자, 라깡과 키에르케고르] 에서는 “어떻게 ‘집합체’로서 문자가 개념상 주체, 대타자와 소대상 - 대타자를 구성하는 것 - 의 원초적 관계를 있는 그대로 유지하는가” [p. 180]를 이야기한다.

 

트레이시 맥널티의 [제약의 작동: 상징적 삶의 미학을 향하여]는 독일 제3제국의 인종 학살프로그램을 기획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연구를 통해 “정치이론의 맥락에서 성문법 - 그리고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쓰기를 포함한다 - 의 기능과 중요성을 재(再)사유” [p. 190]하려고 한다.

 

무의식의 저널 <엄브라 Umbr(a)> 시리즈는 여전히 쉽게 다가오지 않고 어렵다. 그리고 저자들의 텍스트를 오독(誤讀)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걱정과 불안감을 떨치기 힘들다. 그러나 라깡 이론 혹은 정신분석학을 연구하는 이들에게는 이 시리즈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리뷰는 도서출판 인간사랑으로부터 무료로 책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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