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 - 한국의 미를 세계 속에 꽃피운 최순우의 삶과 우리 국보 이야기
이충렬 지음 / 김영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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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곡 최순우는 누구인가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좋아하던 문학소년 최순우(崔淳雨, 1916~1984)의 인생에서 전환점은 우현(又玄고유섭(高裕燮, 1905~1944)과의 만남이었다개성부립박물관(開城府立博物館)에서 관장과 관람객으로 시작된 인연은 최순우가 고유섭의 제자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하지만그는 고유섭의 다른 제자인 메이지대학 정경학부 출신인 수묵(樹默진홍섭(秦弘燮, 1918~2010)이나 도쿄제국대학 경제학부 출신인 초우(蕉雨황수영(黃壽永, 1918~2011)과 달리 송도고등보통학교 출신이었다때문에 진홍섭과 황수영과 함께 개성 3()’로 불리면서도 그는 승진이나 급여에 불이익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그가 국립박물관 개성분관의 서기로 있을 때, 2년 연하의 후배인 진흥섭이 개성분관의 관장으로 선임된 것이나 그가 1954년 보급과장(1961년 미술과장으로 명칭이 변경)으로 진급한 후 20여 년 간 만년과장이었던 것도 아마 그 탓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곡(兮谷최순우는 묵묵히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우리나라 문화유산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찾고 알리는 일에 평생을 바친 박물관인이 (되었다왜냐하면,) 그는 선조의 문화와 이 땅의 유산이 총체적으로 모여 있는 박물관이 왜 중요하고 얼마나 가치 있는지  (알았기 때문이다)그랬기에 일생을 바쳐 국립중앙박물관을 지켰고 발전시켰다.” [pp. 4~5]

이런 최순우의 삶은 제대로 된 나라라면역사를 기억하는 민족이라면 분명히 기억해야 할 만큼 의미 있다하지만많은 이들이 최순우에 대해 알지 못한다그나마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가 빛을 보지 않았다면그의 이름은 한 장의 깨진 청자 기와조각처럼 무심코 지나쳤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삶은 외로웠다지금은 우리 문화유산이 아름답고 자랑스럽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일제강점의 후유증인 식민사관과 해방 이후를 휩쓴 서구우월주의에 힘겹게 맞서야 했다오래되고 낡은 것에 볼 게 무엇이 있느냐는 냉소와 비웃음이 난무했다.

그런 시대에 그는 남의 것이 아닌 내 것에 설레고 떨리고 사무치고새것이 아닌 옛것에 홀리고 미치고 취했다수탈과 전쟁을 빼앗기고 무너지고 파괴된 폐허의 시대에서 아름다움의 가치를 발굴하고 지키고 보존” [p. 5]했을 뿐 아니라우리 문화재가 정당한 대접을 받도록 요구하고 이를 관철했다.

 

 

최순우를 기억하는 키워드

 

첫째한국미의 보존

최순우는 한국전쟁 중에 서울 국립박물관을 점령한 북한군의 문화재 반출 지시를 목숨을 걸고 지연시켜 소장 문화재를 부산으로 안전하게 피난시켰다이후 국립중앙박물관이 이전개관할 때마다 그의 공이 컸다. 1981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을 구(중앙청 청사 건물로 이전하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자 그 주역으로서 일하다가 제반 계획과 공사가 한창 진행되는 동안 격무와 신병으로 개관을 눈앞에 두고 세상을 떠났다.

 

또한 그는 1946년 고려의 정궁(正宮)의 터인 만월대(滿月臺)에 미군 막사를 세우는 공사를 막은 후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개발논리에 의해 흩어지고 버려지고 있는 문화재 발굴과 보호에 최선을 다했다강진의 청자기와 가마터인천 경서동 녹청자 가마터광주 무등산 금곡요 등 세월의 흐름 속에 잊혀진 채 쓰러져갔던 국보급 문화재와 유적의 발굴 답사출토유물 정리연구와 전시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그의 정성이 묻어있었다.

 

나아가 당시 국립박물관에 예산이 없어 구입하지 못한 주요 유물들이 일본으로 밀반출되는 상황을 안타깝게 생각해같은 개성 출신 사업가인 호림(湖林윤장섭(尹章燮, 1922~2016)에게 문화재 수집의 단초를 제공하고훗날 호림미술관을 설립할 때도 조언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둘째한국 문화유산으로 세계를 감동시키다.

최순우는 분단과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진 대한민국을 그저 가난한 신생국이 아니라 오랜 역사와 고유 문화를 가진 국가임을 세계에 알렸다.

1957년 겨울부터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의 도자기목기회화 등을 해외에 전시하면서 그때마다 호송관과 전시담당 학예사의 역할을 수행했다. 1973년에  ‘한국미술2000년전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를 시작했으나 서울 암사동 신석기 시대 유적지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가 기원전 3000년 토기임이 밝혀진 이후에는 한국미술의 역사를 수정, ‘한국 미술 5000년전으로 변경해서 전시를 했다이러한 전시를 통해 전 세계에 한국의 서화도자기조각건축물의 독창적이고 찬란한 아름다움을 떨쳤다나아가 한국 미술의 이해와 보존·진흥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57년 말부터 진행된 한국 국보 전시회관람객 중에는 우리나라 유학생도 많았다사실 유학생 사회에서는 전시회가 열리기 전 “누구 창피를 보이려고 시시한 것들을 가지고 왔느냐”는 뒷공론도 있었지만전시회가 개막되고 <뉴욕타임스등 여러 신문에서 한국 미술의 특색 있는 아름다움을 대서특필하자정말로 그렇게 좋은지 보겠다며 하나 둘 찾아왔다최순우는 훗날 유학생들의 그런 모습에 대해 “말하자면 학생들은 미처 몰랐던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을 외국에 와서 비로소 알게 되었고따라서 저절로 우러나는 민족적인 긍지를 체험하게 되었던 것이다”라고 회상했다.” [p.206]

 

유럽 국가들의 요청으로 한국미술 5천년전을 진행할 때는 한국 국보에 대한 보험액을 국제수준에 비해 절반 정도로 산정하자 그는 보험액을 올리지 않으면 전시를 못하겠다면서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 정당한 대접을 요구했다그 결과이후 우리나라 국보는 해외전시 때 세계 최고수준의 대접을 받게 되었으니 그의 힘으로 국격(國格)을 올려놓은 셈이다.

어떻게 보면 그의 한국미술 5천년전’ 전시는 한류(韓流)’의 원조라고 볼 수도 있을 듯 하다.

 

 

셋째한국미의 아름다움을 글로 알리다.

아마도 많은 이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읽고 혜곡(兮谷최순우(崔淳雨, 1916~1984)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되었을 것이다하지만 최순우가 남긴 글은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문화재에 대한 척박한 인식 속에서 그는 1947 9월 [서울신문]에 발표한 ‘개성 출토 청자파편’부터 시작해서 한국의 멋과 가치를 문화재 해설 280미술 관련 에세이 205논문 41사료해제 86편 등 모두 600여 편의 글로 남겼다.

또한 1950년부터 서울대고려대홍익대이대 등 여러 학교에 출강하여 미술사를 강의하면서 후학을 많이 길러내었다같은 박물관에 근무했던 진경시대 문화 연구의 대가이자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가헌(嘉軒최완수(崔完秀, 1942~ ), 불교미술의 권위자 강우방(姜友邦, 1941~ ), 6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한 소불(笑佛정양모(鄭良謨, 1934~ ) 등도 그가 길러낸 후학이라 말할 수 있다.

 

오직 박물관과 문화유산만을 생각하고 살아온 삶이지만,

1963년 조선 백자와 반닫이 등 조선시대 목가구 수출을 저지했다고 중앙정보부에 끌려가고, 1966년 석가탑 보수복원공사 때는 내부가 썩은 전보대로 인해 2층 옥개석의 모서리 한쪽이 조금 훼손되자 복원책임자라는 이유로 문화재 보호법 제60조 및 제70(파손과 관리소홀)를 위반했다고 형사 입건되어야 했다심지어 공무원 병가 허용기간이 두 달이라는 이유로 직장암으로 죽어가는 그에게 문화공보부에서는 사람을 보내 사표 제출을 독촉한 일화에 이르러서는 아연실색(啞然失色)할 수 밖에 없었다.

 

최순우 같은 분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한국인으로 살아갈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풍납동 토성 보존과 관련된 현실 등을 바라보면 왠지 답답하다심지어 최순우가 한국 전쟁 당시인 1952 1 <민주신보>에 문화재의 수난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아래의 글이 여전히 생명력을 가진 듯해서 씁쓸했다.

우리 스스로의 무지와 무위무책(無爲無策)으로 무참한 파괴가 쉴 새 없이 자행되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더 슬퍼하는 바이다.

중 략 ~

건축 이외의 문화재만 하더라도다행히 국립박물관과 덕수궁미술관의 주요 문화재는 안전히 소개(疏開)되어 있다고 하나이 방대한 미술품의 보존관리를 담당한 기관에 최소한도의 소요예산과 인원도 배정되어 있지 못하여소개 문화재는 그 중요성에 반하여 현재 너무나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 )

무지와 무위무책의 악몽에서 어서 깨어나야 할 것이다무엇이 더 급한지 무엇이 더 소중한지를 가릴 줄 모르는 한모든 연유를 전쟁에만 돌리는 한우리 문화재 보존의 앞날은 암담하다.” [p.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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