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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셴든, 영국 정보부 요원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51
서머싯 몸 지음, 이민아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5월
평점 :
작가 출신 스파이, 서미싯 몸
이안 플레밍(Ian Fleming, 1908∼1964)의 007시리즈에서 나오는 제임스 본드처럼 비현실적인 모험담 위주였던 당대 스파이 소설들과는 달리 서미싯 몸(Somerset Maugham, 1874~1965)은 <어셴든, 영국 정보부 요원>(1928)에서 하나의 직업으로서 스파이를 묘사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존 르 카레(John le Carre; 1931~)는 <죽은 자에게 걸려온 전화(Call for the Dead)>(1961) 등 사실적 스파이 소설을 남겼다.
모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여기에 언급된 작가들은 모두 스파이 출신이다. 물론 <인간의 굴레>와 <달과 6펜스> 등 대부분 순수 문학작품을 남긴 서미싯 몸이 영국 정보부 요원 출신이라는 것이 의외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러시아 2월 혁명 후 멘셰비키의 알렉산드로 케렌스키(Aleksandr Kerenskii, 1881~1970)가 이끄는 내각을 지원하여 볼셰비키 혁명을 저지하라는 임무를 받고 1917년 7월 러시아 페트로그라드로 파견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스파이로서도 만만찮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어쨌든 이 책에서 정보부 대령 R이 작가 어셴든에게 “유럽의 여러 언어를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작가라는 직업이 첩보원이라는 신분을 위장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하다는 얘기였다. 책을 쓰기 위한 직업이라는 구실이 있으니 괜한 시선을 끌지 않고도 어떤 중립국에든 갈 수 있지 않느냐” [p. 16]라고 설득했듯이 작가는 스파이들이 이용하기에 최적의 직업 가운데 하나다. 물론 이 경우 작가들도 스파이 체험을 소재로 이용할 수 있으니 서로가 Win-Win 이겠지만.
재미있는 것은 스파이 활동을 했던 이들이 자신의 경험을 소재로 작품을 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007시리즈의 이안 플레밍,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등을 쓴 존 르 카레, <레드 스패로우>를 쓴 제이슨 매튜스(Jason Matthews; 1951~ ), <자칼의 날>과 <오데사 파일>을 쓴 프레드릭 포사이스(Frederick Forsyth, 1938~ ) 등이 그렇다. 아마도 자신의 행적에 대해 침묵해야 하기 때문에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답답한 마음을 풀고 자기 자랑을 한 것이 아닐까? 이는 “번역가 김석희는 “타고난 스파이, 습관적으로 자신을 위장하는 사람이 경험을 ‘제거할’ 필요가 생겼을 때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자문(自問)한 뒤 “소설을 쓴다”고 자답(自答)했다.1)”라는 얘기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스파이 소설을 남기지 않고, <찰리와 초콜릿 공장>, <멋진 여우씨>, <마틸다> 등 아동을 위한 작품을 쓴 로알드 달(Roald Dahl, 1916~1990)과 같은 경우가 예외적인 사례로 보인다.
작가 출신 스파이, 어셴든
이 소설에서 작가출신 스파이로 나오는 어셴든은 작품 구상을 핑계로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등 각국을 오가며 첩보 활동을 펼친다. <어셴든, 영국 정보부 요원>이라는 책 자체가 어셴든이 스파이 임무 수행 중에 겪게 되는 일화를 다룬 16편의 단편을 모은 것인데, 일종의 연작(連作) 소설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첫 단편인 [R]은 정보부 대령 R이 작가 어셴든을 스파이로 스카우트하는 얘기를 프롤로그처럼 간략하게 다룬다.
두 번째 단편인 [가택 수색]에서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정보를 입수해 어셴든이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프랑스에 있는 첩보국 본부에 전달하러 간다. 이 부분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경험할 수 있는 일인데, 뭔가 긴급하고 중요한 정보라고 생각해서 상사에게 보고하면, 상사가 ‘음……. 그래. 그런데 우리가 뭔가 손을 쓰기에는 너무 늦었군’ 혹은 ‘우리가 관여할 일이 아니야’라고 답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물론 그가 자리를 비우는 사이에 스위스 경찰이 가택 수색을 한 부분은 어셴든이 스파이였지 하고 되새기게 하지만.
네 번째 단편인 [대머리 멕시코인]에서 여섯 번째 단편인 [그리스인]까지는 멕시코의 우에르타 반란군 장군 출신임을 주장하는 살인 청부업자와 동행하여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오스만 제국이 독일 제국으로 보내는 기밀 서류를 입수하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벌어지는 일화를 다루고 있다.
열 번째 단편 [배반]에서는 조국을 배반하고 독일의 스파이가 된 영국인 그랜틀리 케이퍼를 회유하거나 제거해야 하는 임무를 맡아 스위스의 루체른에 간 어셴든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어셴든이 거의 아무 것도 하지 않고도 정보부 대령 R의 계획대로 진행되는 모습을 보면, 상사의 장기말이 되어 버린 조직원이 떠올라 씁쓸했다.
짧은 단편들의 모음이라서 그런 것일까? 이 책에서는 우리가 스파이 소설이라고 할 때 기대하는 쓰릴 넘치고 긴박한 모습을 찾기 힘들다. 오히려 스파이 소설적인 요소가 묻은 건조한 회사원의 느낌이 짙었다. 저자가 괜히 서문에서 “정보부 기관원이 하는 일은 대체로 단조롭기 짝이 없다. 많은 부분 쓸모 없는 활동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사실이고, 소설의 소재로 쓰려 해도 단편적이고 무의미한 것이 대부분” [p. 11]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007시리즈와 같은 빠른 전개, 긴박감, 반전 등을 기대하는 이라면 이 책이 지루하고 재미없을 것이고, <팅거,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즐겁고 재미있게 읽은 이라면 한 번 읽어 볼 만하다.
옥의 티
p. 206
한편으로는 멘델스존의 <무언가(無言哥)>와도 같은 ~ ⇒ 한편으로는 멘델스존의 <무언가(無言歌)>와도 같은 ~
‘무언가’가 Lieder ohne Worte의 번역이므로 한자 표기는 無言哥가 아닌 無言歌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