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슬픈 날, 아름다워서 슬픈 곳
난분분 꽃잎 떨어지는 날이 곧 올 시기다. 추위 뚫고 올라온 꽃잎이 봄햇살 무게를 못이기고 떨어지는 풍광이 슬프고 아름다울 것이다. 이 아름다운 날, 생각나는 일이 있어, 목울음이 자꾸 올라오는 계절이다.
˝제주도의 사월은 참으로 화사한 유채꽃으로 온 섬을 물들이지만 그것이 비린 아픔이란 것을 아는지.˝<제주4.3을 묻는 너에게> 14p
˝...통꽃으로 툭툭 떨어지는 그 잔인한 낙화는 어쩔 수 없이 나에게 목 잘린 채 땅에 뒹굴던 그 시절의 머리통들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지상의 숟가락 하나>79p
제주공항, 모슬포, 정방폭포, 곶자왈, 성산포, 제주의 곳곳. 멋모르고 웃으며 사진 남기던 장소들에 핏빛 절규가 흐른 일이 있었음이, 너무 늦게 마주한 것이 가슴 아프다.
*폭도, 빨갱이
˝거지 꼴의 그 허약한 노인, 아낙, 아이들이 이른바 ‘폭도‘였다. <지상의 숟가락 하나> 81p
˝젖먹이 아기도? / 절멸이 목적이었으니까.
무엇을 절멸해?/빨갱이들을.˝ <작별하지 않는다> 220p
˝...숨이 끊어진 젖먹이를 젖은 부두에 놓고 가라고 경찰이 명령한 겁니다. ... 그 여자 목소리가 가끔 생각납니다. 그때 줄 맞춰 걷던 천 명 넘는 사람들이 모두 그 강보를 돌아보던 것도.˝ <작별하지 않는다> 267p
˝...갓난아기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광기가 허락되었고 포상되었고, 그렇게 죽은 열 살 미만 아이들이 천오백 명이었고, ...˝ <작별하지 않는다> 317p
*옮기지 못하겠는...
사건의 발단과 과정을 따라가본다. 어이없고 가당찮은 비상식들이 수없이 이어진다. 의문과 울분과 한탄과 두려움으로 속이 아프다. 수사적으로가 아니라 정말 물리적으로. 그 모든것을 하나하나 옮기고 싶고, 또 옮기지 못하겠고, 하며 앓는다.
˝나는 바닷고기를 안 먹어요. ... 그 사람들을 갯것들이 다 뜯어 먹었을 것 아닙니까.˝ <작별하지 않는다> 225p
˝그해 고구마 농사는 풍작이었다. 송장거름을 먹은 고구마는 목침 덩어리만큼 큼직큼직했다.˝ <순이삼촌> 93p
*슬픔을 아는 아름다움
봄꽃의 슬픔을 말하는 나에게 지인은 꽃이 져야 열매 맺는 것 아니냐 한다. 지난 엄혹한 시기의 찬바람에 져 버린 그 많은 사람들이 맺어 남겨준 씨앗. 미약한 일이지만 잊지 않는 것으로 씨앗을 지켜보고자한다. 튼튼히 자라도록. 외면하지 않으려 노력한 이들의 마음씨에 기대어 건너가보려 한다.
˝잊지않겠다고 생각했다. 이 부드러움을 잊지 않겠다.˝ <작별하지 않는다>
˝생의 모든 소중했던 굴곡들을 기어 통과할 때에, 저는 당신의 예술을 많이 의지했습니다. 슬픔을 아는 아름다움만큼 가치있는 것은 없으니까요.˝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18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