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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남자
에카 쿠르니아완 지음, 박소현 옮김 / 오월의봄 / 2018년 4월
평점 :

인도네시아 출신 작가 에카 쿠르니아완의 <호랑이 남자>를 읽었다. 그는 작가이자 그래픽 디자이너라고 한다. 작년말에 전작 <아름다움 그것은 상처>가 나왔을 적에, 대단한 작품이라는 느낌에 일단 구매는 했지만 읽지는 못했다.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흔한 책쟁이의 이야기려나. 이번에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와 더불어 2016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우리가 보통 말하는 맨부커상하고 다르다는 점을 나는 강조한다)에서 경쟁한 쿠르니아완의 <호랑이 남자>(Man Tiger)가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 주말이 막 시작되기 전에 주문해서 만우절을 끼고 읽을 수가 있었다. 책을 읽고 내가 내린 결론은 기대 이상이었다. 참고로 로베르트 제탈러의 책 <한평생>도 당시 맨부커 인터내셔널 롱리스트에 올랐었다.
아직 <아름다움 그것은 상처>를 읽지 않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주술적 리얼리즘을 구사한다는 작가의 스타일에 대해 확실하게 말할 순 없지만, 무슬림 문화와 이종교배된 인도네시아 전통문화에서 유래한 하얀 암호랑이가 주인공 청년 마르지오에 빙의되어 사랑하는 연인의 아버지를 살해한다는 충격적인 설정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아름다운 그것은 상처>가 우리에게는 아무래도 생소한 인도네시아 현대사를 관통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면, <호랑이 남자>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나치게 주관적인 해석일진 모르겠지만, 자신 안에 호랑이가 들끓는 기운을 느끼는 청년 마르지오는 수백 년간의 네덜란드의 지배에서 벗어난 인도네시아 민중을 상징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어진 수십 년에 걸친 폭압적인 군부통치와 그에 반대하는 공산주의 계열 게릴라들과의 내전을 겪은 포스트임페리얼리즘의 전형이 소설 속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마르지오는 자신의 이발사 아버지 코마르 빈 슈엡과 태생적으로 불화할 수밖에 없다. 코마르는 자신의 아내 누라에니의 뿌루퉁한 태도에 질려 폭력과 패악질을 서슴지 않는다. 조상 대대로 호랑이의 기운이 전승되는 가운데, 주인공 마르지오 역시 그런 호랑이 한 마리를 가슴에 품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이빨로 이웃에 사는 예술가 안와르 사닷의 목을 물어뜯어 죽이는 끔찍한 사고가 발생한다. 에카 쿠르니아완은 왜 마르지오가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고찰을 시작한다.
쿠르니아완의 플래시백은 살인사건이 발생한 시점으로부터 가까운 시점에서부터 시작해서 그 이전의 과거로 목적지를 정한다. 코마르가 조숙아로 태어난 막내딸 마리안의 죽어가는 가운데 아버지로서의 역할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뛰어난 돼지 사냥꾼 마르지오는 분노한다. 결국 자신의 아버지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겠다는 결심에 거리를 누빈다. 하지만 과연 <호랑이 남자>의 내러티브가 그렇게 단순하기만 할 걸까. 그렇지 않다. 마르지오 집안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작가는 예리하게 파고든다. 애정 없는 가난한 결혼생활을 해야 했던 누라에니의 과거 그리고 결정적 사건, 이어지는 마르지오와 안와르 사닷의 막내딸 마하라니와의 로맨스들이 복잡하게 겹치기 시작한다. 네덜란드의 폭력적인 지배에서 벗어난 인도네시아의 집권층은 식민지 모국으로부터 배운 통치기술을 그대로 민중에게 적용했다. 한 마디로 법치와 대화에 의한 해결보다는 주먹으로 대변되는 폭력적 방식이 훨씬 더 빠른 모양이다.
아버지 코마르의 폭력 때문에 아버지를 증오하게 된 마르지오는 어머니 누라에니 역시 원인제공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고뇌에 빠져든다. 다독가로 유명한 쿠르니아완은 어쩌면 선배 대가 셰익스피어에게서 배운 <로미오와 줄리엣>과 <햄릿>에서 유래한 중요한 모티브를 인도네시아 고유의 전승에 차용했다는 느낌도 들었다. 우리네 인간의 삶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마르지오가 직면한 갈등을 전개하는 쿠르니아완의 저글링 기술은 인상적이다. 고뇌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을 저격한 장면은 그야말로 천의무봉 같은 솜씨였다.
200쪽 남짓한 길지 않은 분량에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을 녹여낼 수 있는 작가의 역량에 놀랐다.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호랑이 남자>에서 에카 쿠르니아완이 다루고 있는 인도네시아 전승에서 유래한 가장 유니크한 주제야말로 세계인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문학적 변별력이 아닐까 싶다. 결말 부분에 가서 다시 사건이 시작된 결정적 이유를 배치한 점도 훌륭하다. 이렇게 준비된 멋진 한 방이야말로 독자들에게 독서의 만족감을 제공하는 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봄이 왔으니, 이제 예전에 사둔 <아름다움 그것은 상처>를 찾아 읽을 시간이다. 기대한다.
[뱀다리] 당나귀점프가 맡은 표지 그림은 책의 주제를 제대로 짚어낸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