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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
존 쿳시 지음, 조규형 옮김 / 책세상 / 2003년 10월
평점 :
절판

내가 읽은 존 쿳시의 네 번째 작품은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문학적으로 패러디한 <포>였다. 그런데 내가 <로빈슨 크루소>를 읽었던가? 아마도 어린 시절, 축약본으로 만나지 않았나 싶다. 외딴 섬에 표류하게 돼서, 28년인가를 홀로 산 영국 출신의 크루소. 그의 곁에는 식인종들에게서 구해낸 프라이데이가 있었다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쿳시 작가가 새롭게 쓴 <포>에는 좀 다른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것은 바로 소설의 중요한 화자로 등장하는 수전 바턴이다. 딸아이를 찾아 신대륙 브라질의 바이아까지 먼 길을 나선 수전은 고향인 잉글랜드로 돌아가는 길에 선상반란을 만나 크루소와 프라이데이가 사는 섬에 표류하게 된다. 섬의 절대군주라고 할 수 있는 크루소는 모든 문명의 이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유일한 동료라고 할 수 있는 프라이데이와 소통을 위한 언어를 가르치는 것에도 관심이 없다. 하긴, 크루소의 말에 의하면 노예상인에게 혀를 잘린 프라이데이는 기본적인 대화조차도 할 수가 없었다.
외부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된 섬에서 밭뙈기를 일구며 간간이 찾아오는 열병을 앓던 크루소는 드디어 구조의 기회를 만나게 된다. 수전 역시 환영했지만 크루소는 결국 고향으로 향하는 뱃길에서 그만 죽고 만다. 프라이데이와 잉글랜드에 도착한 수전 바턴은 자신과 크루소의 표류기를 쓰려고 마음 먹는다. 근대의 여명기에 문명인으로서 왜 크루소가 기록을 남기지 않았는지 그녀는 궁금해 한다. 어떤 책에서 보니, 크루소야 말로 제국주의 시대 혹은 초기 자본주의 시대 첨병이라는 비판을 읽은 적이 있다. 저자인 다니엘 디포 역시 그런 취지에서 <로빈슨 크루소>를 쓰지 않았나 하는 추정에 대해 적잖이 공감이 갔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만들었던 영국인들은 바닷길을 이용해서, 새로운 시장과 원료공급지를 해외 식민지에서 찾았다. 그들은 철저하게 세계를 자아와 타자로 구분했고, 고대 그리스 시대의 헬라인들처럼 나머지 세계인을 바바리안(야만인) 취급을 했다. 소설의 후반에 등장하는 포와 수전과의 대화를 보면 그런 장면들이 여실하게 드러난다. 어쩌면 수전 바턴은 현대 페미니스트 같은 모습으로 노예 같은 처지에 처한 프라이데이에게도 자유와 욕망이 있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 반대에 서 있는 포는 수전의 성화 때문에 마지못해 프라이데이에게 문자를 가르치기 시작하지만, 야만인에게 그런 게 무슨 소용이냐며 묻는다. 오히려 그런 수전의 강요야말로 프라이데이를 피곤하게 만드는 거라고 주장한다. 이 둘의 대화를 보면서 어쩌면 다른 문화를 가진 이들에게 자신들의 문화와 문자를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폭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타자에 의한 행복 추구가 무슨 의미가 있냐는 말이다.
사실 길지 않은 분량의 내용이고, 로빈슨 크루소라는 누구나 다 아는 인물을 차용해서 새로운 스타일의 그야말로 논쟁적인 주제를 존 쿳시는 <포>에서 다루고 있다. 그가 성장한 남아프리카의 인종주의 현실도 역시 빠질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원래 주인들이었던 흑인들의 자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토지와 권력을 소유한 외지에서 도래한 백인들이 주인 행세를 하는 장면이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 포류해서 군주 노릇을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역사는 수없이 반복된다고, 신대륙 아메리카에서 플리머스에 상륙한 영국 청교도들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로빈슨 크루소 그리고 그를 창조한 다니엘 디포에게 무슨 보시하듯 관계하는 수전 바턴의 모습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녀의 주장대로 자유롭기에 욕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일까. 그리고 자신과 같은 이름의 소녀가 등장해서 자신의 딸이라고 주장하는 장면은 또 어떤가. 포는 소설의 흥미를 돋우기 위해 그런 장치를 만들어 냈다는 것인가.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들을 다루면서도 동시에 환상적인 장면들이 겹쳐지면서 독자는 혼란에 빠져든다. 사실 나도 책을 읽으면서 내가 제대로 읽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지금까지 읽은 존 쿳시의 작품과 다른 결 때문인지 소화해 내기가 쉽지 않았다. 어쩌면 이번에 재출간된 도끼 선생의 일화를 다룬 <페테르부르크의 대가>도 비슷한 궤적을 그리지 않을까 싶다. 새로운 존 쿳시 작가의 설렉션들이 잇달아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니 일단 기대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