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변의 피크닉 스트루가츠키 형제 걸작선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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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개인적으로 SF소설은 잘 읽지 않는 편이다. 다음주 독서모임 도서로 선정이 돼서 읽게 됐다. 왠지 사고 싶지는 않고 해서 도서관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읽었다. 난생 처음으로 하는 희망도서였다. 이언 머과이어의 <얼어붙은 바다>도 신청하려고 했으나 누가 먼저 신청해서 두 번째로 빌려다 읽고 있는 중이다. 개인적으로는 후자가 더 재밌지 않나 싶다.

 

<노변의 피크닉>은 구 소비에트 SF 소설로 하몬트라는 지역에 외계인의 “방문”이 이루어진 뒤, 벌어지는 사건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소설이 특이한 점은 SF소설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 중의 하나인 그 흔한 외계인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푸른 철모”의 군인들이 통제하는 것으로 봐서 전 세계적인 이슈가 분명한데, 외계인들이 방문한 “구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작가인 스트루가츠키 브라더스 역시 관심이 없어 보인다. 방문과 구역을 자신들의 삶의 터전으로 삼은 인간 군상들에 이야기에 방점을 찍는다.

 

소설은 물리학자 밸런타인 필먼(필먼 방사점의 창시자?)가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는 뉴스로 시작한다. 그리고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곳은 방문구역으로, 아마도 외계인들이 지구를 방문한 거점들로 보인다. 그리고 그 방문구역에 외계인들이 남겨둔 물체들을 노리는 스토커(사냥꾼)들이 노획물들을 사냥 중이다. 요즘 우리가 일상에서 목격하고 있는 위험의 외주화라고나 할까.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그것이 가치 있는 일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획물들을 원하지만 마녀의 젤리, 불타는 솜털, 악마의 배추, 모기지옥 같은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은 부유한 이들은 사냥꾼을 고용해서 구역의 충만한 “깡통”을 돈을 주고 사들이는 시스템이다.

 

당연히 사냥꾼이라고 불리는 스토커가 등장할 순서고, 23세의 3년차 연구원 “빨강머리” 레드릭 슈하트가 나선다. 보통 3인조로 구성된 스토커들이 노획물 사냥에 나서는데 레드릭은 이번에 키릴 파노프 박사 그리고 텐더와 함께 구역에 침투한다. 독자는 무언가 스페이스 오딧세이를 능가하는 그런 스펙터클한 대우주 서사시적 시퀀스를 기대해 보지만 아쉽게도 <노변의 피크닉>에는 그런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 굳이 예를 들어 보자면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레드릭과 아서 버브리지가 인간의 소망, 아니 욕망을 들어준다는 전설의 금빛 구체를 찾아 나서는 장면로 만족해야지 싶다.

 

대신 아르카디와 보리스 스트루가츠키 형제들은 구역에 등장하는 치명적인 마녀의 젤리처럼 부글부글 끓는 인간의 욕망을 저격한다. “돈은 돈 생각을 하지 않는 위해 필요한(279쪽)” 거라는 문장처럼 모든 것을 집어 삼키고 있는 자본주의 3.0 시대의 부조리를 명징하게 드러내는 표현이 또 존재할 수 있을까. 욕망을 발현시킬 수단인 돈을 얻기 위해 스토커들은 명백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구역에 침투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구역에 침투하면서 생기는 부작용(키릴 파노프는 구역에 침투한 후 심장파열로 사망했다, 레드릭의 몽키를 보라) 혹은 침투 중에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 따위는 욕망의 실현에 우선하지 못한다.

 

이 소설에서 가장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장면은 전자 장비 공급처 대리인 리처드 허버트 누넌과 노벨 물리학상 수상에 빛나는 밸런타인 필먼 박사의 대화였다. 우리 지구인들은 꾸준하게 외계와의 대화를 시도해 오고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와 다른 이성을 가진 객체에 대한 호기심과 미지와의 조우가 우리에게 긍정적일 거라는 가정 아래 추진된 것이 아닌가. 우리는 무언가 지구별에 외계인들이 남긴 흔적을 찾기 위해 수많은 비용과 시간을 소모하고 있지만, 어쩌면 그런 것들이 소설의 제목처럼 “우주의 노변에서 열린 피크닉”에서 외계인들이 흘린 샌드위치 조각이나 병뚜껑 같이 하찮은 부산물들을 찾는 행위는 아닐까라는 식견에 감복했다. 그리고 미지와의 조우가 궁극적으로 소설에 나오는 구역처럼 스토커들을 집어 삼키는 블랙홀처럼 작동할 수도 있는게 아닌가 말이다.

 

여전히 SF장르물은 나에게 쉽지 않은 도전이다. 소설을 읽으면서도 계속해서 무언가 흥미로운 지점을 파악하려고 노력했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지금으로부터 46년 전에 발표된 <노변의 피크닉>은 요즘 나오는 세련된 SF소설에 비하면 좀 싱거운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미지와의 조우라는 우리 인류가 추구하는 지향점에서 비롯된 인간은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면 그것대로 만족할 만하지 않은가 싶다. 이 책 이전에 열린책들에서 소개된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이라는 제목의 소설도 있다고 하는데 다음주까지 이 책도 읽어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어제는 오멜라스 시리즈로 소개된 스타니스와프 렘의 <사이버리아드>와 로버트 J. 소여의 <멸종>도 중고서점에서 사왔다. 품절/절판된 책이라고 해서 더 호기심이 간 것도 사실이다. 어쨌거나 2월에는 SF소설을 주로 읽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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