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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생활은 계속된다
이나가키 에미코 지음, 김미형 옮김 / 엘리 / 2018년 2월
평점 :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계기로 해서 내 주변의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정리하며 내려 놓기 시작하다가 결국 번듯해 보이는 아사히신문사라는 회사까지 내려놓은 아프로 헤어의 중년 이나가키 에미코 씨의 <그리고 생활은 계속된다>를 읽었다.
사실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이웃 우리에게도 대단한 충격이었다. 싸고 안전한 에너지원으로 각광 받던 원자력발전의 허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일대 사건이 아니었을까. 우리나라에서도 원전마피아들로 똘똘 뭉친 카르텔들이 여전히 극성을 부리고 있는 가운데, 우리 동남해안에 밀집되어 있는 노후화된 원전 중의 하나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원전마피아들이 선전을 해도, 유시민 작가가 지적한 대로 영원히 불타는 불덩어리 원전을 담보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사건이 터진다면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지 궁금해졌다.
어쨌든 저자 이나가키 씨는 원전사고를 계기로 해서 전기 절약에 나선다. 한달 평균 2,000엔 정도 나오는 전기료를 줄이기 위해 갖은 애를 써보았지만 오히려 미세하게 전기료가 더 많이 나왔다는 사실에 저자는 충격을 받고, 획기적인 방법이 아니면 안되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니까 아예 전기를 잡아먹는 원천을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문명의 편리한 이기를 이용한다면 우리 주변에 너무 불필요한 것들이 배치해 둔 게 아닐까. 저자의 첫 번째 타겟은 바로 청소기였다. 나도 호시탐탐 요즘 최신유행이라는 다이슨 무선청소기를 남자의 로망이라며 노리고 있지만, 어려서부터 빗자루와 쓰레받기로 청소를 해온 몸이라 그런지 지금도 전깃줄이 지나치게 늘어지는 진공청소기보다 가끔은 원시적 방법을 선호하는 편이다. 가루같은 것들이 날릴 적에는 물론 대번에 진공청소기를 동원하지만 말이다.
다음 목표는 전자레인지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 어렸을 적에는 전자레인지가 없었다. 없다가 생긴 것들에 대해서는 사라진다고 해서 아예 방법이 없는 게 아니니 아쉬울 게 없을 듯 싶다. 그런데 이나가키 씨는 그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아예 냉낭반까지 하지 않는 선까지 도달한다. 뭐랄까 지금은 작고하신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몸소 실천하는 지식인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그러면서 동시에 자연에 순응해 가는 자신의 자유로움을 느끼는 경지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저자는 자신의 주변에서 전기를 소모하는 물건들을 하나둘씩 제거하는 방식으로 절전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도전은 무모하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그건 바로 냉장고다. 냉장고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우리 거실 혹은 부엌의 한 편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던 거대한 플라스틱 상자였다. 그나마 저자에게 다행인 것은 딸린 식구가 없고, 냉장고 사용을 중지하던 계절이 겨울이었다는 점이다. 누가 나에게 과연 냉장고 없이 살아 보라고 한다면 어떨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저자는 냉장고 다이어트를 하면서 냉장고는 시간을 정리하는 장치였다고 적었. 그리고 꼭 필요한 먹거리들만 구매하고, 주변을 정리하며 자신의 가치와 본질에 대해 깨달음까지 부수적으로 얻었노라고 고백한다. 이거 너무 거창한 거 아냐? 하지만 되돌아 보면, 그동안 냉장고에 양껏 쟁여 두었다가 미처 먹지 못하고 버린 먹거리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아마 지금 당장 집에 있는 냉장고에 든 먹거리들을 꺼내 정리해보면 상당수가 바로 음식물 쓰레기로 분류가 되지 않을까 조금 두려운 마음도 드는 게 사실이다. 저자는 연간 버려지는 632만 톤에 해당하는 음식물 쓰레기 중 절반이 가정, 아마 그중에서도 냉장고에서 화석의 모습으로 최후를 맞는다고 쓰고 있는데, 우리 회사 동료는 ‘미라’라는 재미난 표현을 쓰기도 했다.
이나가키 씨는 욕망과 불안 그리고 스트레스로 점철된 우리네 삶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시대에 대량폐기를 하게 되었다는 예리한 분석을 내놓는다. 저자의 아버지는 일본이 고도의 경제성장기를 구가하던 시절에 가전제품 회사의 영업사원으로 복무했었는데, 상여금의 일부로 자사에서 만든 제품들을 사들였다고 한다. 그러니 어려서부터 최신 첨단기기에 둘러싸여 성장했다고 한다. 특히 컬러 텔레비전이 나왔을 적에는 동네 친구들에게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는 말이 참 인상적이었다. 뭐 그 땐 그랬지. 그리고 그런 가전제품들이 과연 가사노동으로부터 여성들을 해방시켜 주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감이 든다고 적고 있다. 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최소한 가전 제품 신기3총사 중의 하나인 세탁기는 세탁이라는 중노동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주었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 어쨌든 최첨단 인터넷 시대에 사물인터넷(IoT)이 눈앞에까지 도달했지만, 마냥 좋아만 할 일인가 싶기도 하다. 텔레비전 리모콘만 하더라도 어찌나 복잡한 기능들이 많은지 헷갈릴 판인데 나이드신 어르신들은 오죽하겠냐 싶다.
이나가키 에미코 씨의 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때도 나에게 과연 꼭 필요한 게 무얼까하고 주변에 불필요한 것들을 다이어트하겠다고 결심했었지만 며칠 가지 못하고 끝나지 않았던가. 저자처럼 거창하게 전기세 반값 그런 지키지 못할 공약보다는 집안의 불필요한 전선 코드부터 뽑는 작은 실천부터 시작하는 게 내 자신을 비우고, 그 안을 깨달음으로 채우는 첫 걸음이 아닐까 싶다. 책은 유쾌하고 재밌었고, 아쉽게도 너무 금방 읽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