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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건 부두로 가는 길 - 조지 오웰 르포르타주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7년 전에 산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읽었다. 나의 오래된 책장에서 찾아낸 하지만 그동안 읽지 않았던 책이다. 작년에 <카탈로니아 찬가>를 읽으면서 행동하는 지식인이자 시대의 양심이었던 민주적 사회주의자 조지 오웰의 전작읽기에 도전하는 첫 번째 과제였다고나 할까.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영국 북부 랭커셔와 요크셔 지방을 3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모든 것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당대의 에너지원이었던 탄광에서 일하는 탄광 광부들에게서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일들을 기록한 1부와 사회주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기록한 2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에 비해 2부에 솔직하게 읽기가 쉽지 않았다. 지난 5일 동안 집중적으로 읽었고 오늘 오후에 다 읽는데 성공했다. 뿌듯하다.
지금으로부터 자그마치 82년 전 기록임에도 어떻게 해서 육체노동자들의 삶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당시 산업 역군이었던 광부들 - 소설에서는 필러(filler, 우리말로는 막장꾼)들로 표현된다 - 수시간에 걸쳐 탄광에 가서 7시간 동안 쉴 시간도 없이 숨가쁘게 석탄을 캐냈다. 조지 오웰은 먼저 그들이 거주하는 열악한 하숙집에 대한 스케치부터 시작하는데, 거의 벌이의 1/3에 해당하는 금액을 갈취하면서도 끔찍할 정도의 악취와 비좁은 공간 그리고 형편없는 식사를 제공하는 하숙집이 대다수였다고 한다. 광부들은 갱도에 가득한 탄진 때문에 진폐증과 안진증이라는 직업병에 시달려야 했다고 한다.
그런 끔찍한 병들도 막장에서 벌어지는 사고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절단과 발파 그리고 채탄의 과정으로 이루어진 석탄을 캐내는 과정에서 가스 폭발 사고는 상수였고, 그보다 무서운건 갱도 붕괴사고였다. 그나마 예전에는 나무 기둥이 버팀목이 되어졌는데, 갱도가 더 길어지고 철제 기둥으로 바뀌면서 삐거덕 거리는 경고음 대신 순식간에 갱도가 무너져 내리는 사고가 주기적으로 발생했다고 한다. 그런데 탄광의 육체노동자들에게 그런 사고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바로 실업이었다. 생존을 위해선 탄광에서의 육체노동과 그 대가로 주어지는 임금이 필수적이었는데, 일자리가 날아가면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곧 사회적 사망진단을 의미하는게 아니었을까. 그래도 영국에서는 얼마 안되는 돈이나마 실업수당이 주어졌다고 한다. 그게 1936년 당시의 일이었다. 중산층 계급에게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겠지만,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실업수당을 받아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가면서 가정을 꾸렸다고 한다. 중산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노동자 계층의 생존력이 더 강했다고나 할까.
저널리스트의 입장에서 조지 오웰은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어울릴 수는 있어도 그들이 삶에서 감당하는 육체노동은 할 수 없었노라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교육 받은 계급의식은 노동자 계층의 몸에서 냄새가 난다는 식의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하급 부르주아 계급은 노동자 계층 위에 군림하면서 자본가 계급의 완충작용을 했다는 예리한 지적도 눈여겨 볼만하다.
이상이 1부에서 다루어진 내용이라면 2부에서는 쁘띠 부르주아 계급으로서 자신의 처지를 인식한 “타락한 근대의 반쪽 지식인(283쪽)”의 고백이다. 식민지 인도에서 태어난 조지 오웰은 원래 자신의 신분으로는 엄두도 내지 못한 명문 이튼 스쿨을 장학금을 받아 졸업했다. 하지만 대학 진학을 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았던 그는 대영제국의 식민지 버마에서 하급관리 생활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버마에서 피부 색깔로 지배자와 피지배자 그리고 피압제와 압제자라는 구도로 형성된 제국주의의 본질을 파악한 오웰은 5년간의 식민지 관리 생활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본국인 영국에서도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 형성된 계급문제는 식민지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른 게 없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이에 조지 오웰은 런던과 파리에서 수년간 부랑자 생활을 하기도 하면서 비로소 프롤레타리아 문학가 그리고 민주적 사회주의자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압제자는 언제나 틀렸고, 피압제자는 항상 옳다는 자신만의 명제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한편, 산업혁명 이래 영국 사회를 휩쓴 기계화의 과정을 유심히 관찰한 조지 오웰은 산업혁명 당시 과학과 기계에 대한 적대감이 존재했다고 기록한다. 지난달부터 읽기 시작한 리처드 플래니건의 신간 소설 <굴드의 물고기 책>에도 등장하는 기계파괴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연상됐다. 조지 오웰은 궁극적으로 기계화의 승리가 이루어졌고, 사회주의는 필연적으로 기계화의 진행에 따라 발전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관철시킨다. 한 마디로 말해서, 미래에는 기계가 인간이 해야할 육체노동을 대신하게 될 것이고 인간은 그렇게 해서 얻어진 여가 시간에 자신이 하고 싶은 창조적 활동(유희)을 하면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지금 보면 기계화가 인간의 노동해방을 위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본가 계급의 이윤확대만을 위해 진행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리고 실업이라는 이름의 괴물이 노동자들의 삶을 덮쳐 버렸고.
물론 노동과 그런 여가 시간에 이루어지는 노동이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그런 일조차도 기계가 대신할 수 있지 않은가에 대해서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하지 않나 싶다. 그리고 기계화의 부작용으로 발생된 이슈들은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연달아 발생한 대형 크레인 사고를 비롯해서, 위험의 외주화로 불린 대형 화학공장에서 발생한 사건사고들을 보면 82년 전에 이미 이 민주적 사회주의자가 자본주의에 대한 병폐를 미리 알고 있던 예언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기계화 시대에 시도 때도 없이 발명과 개량을 추구하는 것이 어느새 인간의 본능 (같은 것)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작가의 지적도 주목할 만하다.
노동자들에게서 유리된 인간미 없는 사회주의 운동이 스스로 괴리시키고, 기질적으로 우파일 수 밖에 없는 인텔리 주류들을 미래의 파시스트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는 조지 오웰의 경고는 정확하게 시대의 흐름을 파악한 것이었다. 그가 주창하는 사회주의란 어떤 형식의 압제도 타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82년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많은 것이 변했지만 미래의 예언자가 본질적으로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자본의 노예가 되어 상대적 빈곤과 압제에 시달리는 우리의 모습을 본다면 어떤 말을 할지 문득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