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급행열차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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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설터의 팬이다. 그가 평범한 삶에서 잡아내는 미세한 균열에 대한 포착이 담긴 서술을 너무나 좋아한다. 그의 책은 소설집 <어젯밤>으로 처음 만났다. 정말 몇 번을 읽어도 새로 읽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작가 중의 작가라는 별명이 그냥 붙여진 게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가벼운 나날들>, <올 댓 이즈>, <사냥꾼들>을 비롯한 그의 전작 읽기를 올해 목표 중의 하나로 삼았는데 우선 두 번이나 도전했다가 <스포츠와 여가>부터 다시 읽어야지 싶다. 읽다마 만 곳부터 읽어야할지 아니면 다시 처음부터 읽어야할지 조금 고민 중이다.

 

지금으로부터 딱 30년 전에 나온 제임스 설터의 <아메리칸 급행열차>에는 모두 11개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아마 우둔한 독자의 엉터리 독서 덕분인진 모르겠지만, 삶의 균열을 포착하는 대가이자 실패한 시나리오 작가의 내러티브는 정말 모호했다. 풋내기 변호사들로 자신들이 맡은 사건을 정말 그 누구보다 열심히 연구하지만, 의뢰인을 위해 법정에서 싸운 게 아니라 자신들의 물질적 성공을 위해 사건을 들고 독립하겠다는 선언에 주인공의 아버지는 기겁한다. 성실과 신의를 어기고서 변호사 업계에서 어떻게 업을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사소한 문제 따위는 나몰라라고 하고 유럽으로 건너가 중년의 일탈을 즐기는 친구들, 그들의 자신감에서 권력의 최정상에까지 올라갔다가 한없는 나락으로 추락한 어느 정치인과 그의 지기 생각이 났다. 물론 설터 답게 고리타분한 설교 따위는 늘어 놓지 않아서 마음에 들긴 했지만.

 

그리고 다음은 표지. 국내에 출간된 모든 제임스 설터 작가의 책을 한 작가가 그린 표지 그림으로 통일하는 뚝심을 보여주는 출판사의 기개를 높이 사서 별점 하나를 차감했다. 작가가 소설에서 흐르는 시간의 차감하는 뛰어난 기법을 보여 준다면, 이름도 모르는 화가의 표지를 고집하니 별을 하나 떼지 않을 수 없구만. 사실 <사냥꾼들>에서 드디어 다른 작가의 표지를 기대했지만 그조차도 의뢰를 했는지 어쨌는지 전투기 그림도 있어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작가는 픽션을 구성하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자신이 체험한 이야기들을 소설로 만들어내는 것도 기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군인의 길 대신 화가의 길을 걷게 된 군인동료 사관 생도들에게 왕따를 당하는 이야기를 그린 <잃어버린 아들들>을 보자. 우리의 육사도 그렇지만 미국 엘리트 군인을 상징하는 웨스트포인트의 이야기도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하긴 누구는 전투기 조종을 하다가 소설가가 된 양반도 있었지. 왠지 전장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게 된 병사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는 나의 예상과는 달랐다.

 

실패한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쓴 단편 소설 <영화>는 어떤가. 연기 실력이 전혀 갖춰지지 않은 인기 남자배우를 기용해서 달달한 러브 스토리를 만들려는 구상은 시대가 지나도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 누구나 안토니오니나 펠리니 같은 거장과 함께 영화사에 길이 남을 그런 영화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영화인들의 꿈이 아닐까. 이미 이순을 넘긴 나이에 설터 작가는 어쩌면 그땐 그랬지 하는 심정으로 엎어진 영화 제작의 이야기를 소설화했던 게 아닐까.

 

<20분>은 낙마해서 임종을 앞둔 어느 여성의 이야기다. 극도로 리얼리즘을 만나는 장면들, 난 작년에 읽은 애니 프루의 단편집 <브로크백 마운틴>이 바로 연상됐다. 아마 그 책에 실린 소설에서도 말에서 죽어가는 이야기가 나오지 싶었는데 말이다. 그러니까 말에서 떨어진 다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고작 20분이라는 것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생과 사, 세상 모든 인간이 가는 길이 뒤바뀔 수 있다는 점이 놀라울 따름이다. 소설의 주인공을 구한 이들이 멀리 떨어진 병원이 아니라 인근에서 동물이고 사람을 제일 잘 돌보는 수의사에게 데려갔다고 해서 인생이 바뀌었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 번 대가의 작품에도 편차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런 실례를 설터의 <아메리칸 급행열차>를 통해 만날 수가 있었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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