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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 ㅣ 이산의 책 17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차혜원 옮김 / 이산 / 2001년 1월
평점 :
일본 출신 중국사의 대가라는 미야자키 이치사다 선생의 <옹정제>를 읽었다. <강희제>는 서구 학자인 조너선 스펜스 교수의 책으로 만나 봤고, <건륭제> 역시 완독은 못했지만 역시 서구 학자의 시선으로 들여다 보았다. 이번에도 역시 모국 사람은 아니지만, 역시 나름대로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는 이방인의 시선으로 아시아 대제국을 호령했던 군주를 조명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분량이 짧아서 부담 없이 도전할 수가 있었다.
흔히들 말하는 강희 건륭연간 사이에 낀 청나라 5번째 황제로 긴 제위기간을 자랑하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낀 비운의 인물이라고나 할까. 3대 순치제 시절에 대망의 중원 패권을 차지한 청조는 강희 연간의 대규모 반란과 원정을 통해 안정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노년의 강희제는 후계자 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이후에 없을 황태자를 세워, 후계를 도모했지만 이미 조정의 큰 문제가 된 보스 정치의 폐해로 황태자가 낙마하고 결국 자그마치 35명이나 되는 황자들 가운데 사아거 인전이 대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45세의 나이에 천자의 자리에 오른 옹정제는 훌륭한 정치로 사해인민을 다스리겠다는 당찬 포부와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청년 천자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그런 자세가 아니었을까. 일단 만승의 자리인 황제가 된 옹정제는 주변 정리부터 시작한다. 비록 형제이긴 했지만 자신과 황위 계승 경쟁자들이었던 형제들을 숙청하고, 태조 누르하치의 장자 추옝의 후손들인 수누 일족도 순차적으로 정리해 나간다. 물론, 십삽아거 이친왕처럼 자신에게 충성한 형제들에게는 그만큼 합당한 대우를 해주기도 했다. 역시 권력은 부모형제와도 나눌 수 없다는 오랜 격언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미야자키 교수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수누 일족에 대한 기사에서 충성심과 인내 그리고 성실함에서 한족을 압도했던 만주 귀족에 대한 후한 평가를 아끼지 않는다. 고작 인구 100만 정도의 만주족으로 백배나 되는 한족이 사는 중원 대륙을 점령한 성취에 대해 만주족 신인 아부카이 칸의 수호가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으리라는 인식도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소수의 만주족이 다수의 한족을 영원히 지배하기 위해선 기존의 이데올로기만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수누 일족은 소수의 신에서 보편적 신인 기독교로 귀의했던 게 아닐까. 자신의 일족을 핍박하는 천자의 부당한 처사에 수누 노인은 당당하게 맞서는 장면에서는 만주 꼴통의 기개를 엿볼 수도 있었다. 역시 보수라면 이 정도는 되야지 하는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일본 작가의 옹정제 평전에서 흥미로웠던 점 중의 하나는 당대 여론을 주름 잡았던 독서인, 다시 말해 관료들에 대한 평가다. 현대 같은 미디어가 없던 시절 여론을 좌지우지했던 그룹은 역시 관료 지식인 계급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다.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에 대해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 지는 불을 보듯 뻔하지 않은가. 400개 주나 되는 광활한 중국 대륙을 통치하기 위해서 관료제에 대한 천자의 장악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문제는 아무리 옹정제가 만기친람 스타일의 독재군주라 하더라도 모든 것을 다 챙길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황제는 주비유지라는 방식으로 순무나 총독 같은 주요 지방관들로부터 기밀 보고를 받았고, 사실여부를 가리기 위해 밀정 정치를 충실하게 활용했다. 천자의 지방관들이 모두 그가 총애한 총독 3인방 리웨이, 텐원징 그리고 오르타이 같은 유능한 행정관료들 같았다면 천명을 대신해서 천조를 다스리는 수월했겠지만, 자본과 결탁한 관료들을 다스리기란 난망한 주제였다.
지식인 계급에게 독점된 자본 집중 문제도 결국에 가서는 중국이 근대화로 이행하지 못하게 된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저자는 냉철하게 분석한다. 비슷한 시기의 유럽에 비해 청나라의 생산력을 월등했지만, 산업혁명을 거친 유럽에 비해 재생산에 투입되지 못하고 사장된 자본 때문에 결국 아편전쟁으로 이어지는 서구 열강의 침탈이라는 암흑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개인적으로 조너선 스펜스 교수가 <반역의 책>(사두기만 하고 아직 못 읽었다)에서 다룬 악비의 후손으로 알려진 웨중치에게 모반을 권고한 쩡징과 <대의각미록>에 대한 문자옥에 대해 미야자키 교수는 어떤 평가를 했을 지 궁금했는데, 간략하게 다루고 넘어 가서 좀 아쉬웠다. 대인배 모습을 보이고자 황제는 한낱 서생에 지나지 않는 쩡징과 무려 토론 배틀을 벌여 그를 마침내 굴복시키는데 성공하고 삼족을 멸하는 처벌 대신 석방한다. 그렇게 끝나면 좋았으련만, 아들 건륭제가 즉위한 다음 쩡징은 처벌을 면할 수 없게 된다. 각종 유언비어의 출처였던 <대의각미록>도 역시 시중에서 회수되었다.
중년의 나이에 제위에 오른 옹정제는 선제 강희제와 아들 건륭제가 선택한 관용의 정치보다는 수성과 관리의 제왕으로 중국식 독재방식을 선호했다. 문제는 제국에 주어진 모든 문제를 황제가 관리할 수 없다는 현실이었다. 어쩌면 황제의 지나친 자신감이 청나라 다른 황제에 비해 비교적 짧은 제위 기간으로 나타났던 게 아닐까. 아무리 체력이 강한 제왕이라고 하더라도 정신적 스트레스와 관료들을 제압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보면 결국 쓰러지기 마련이다. 어쨌든 낭비과 허례허식을 허용하지 않는 현실주의자로 옹정제는 제국의 재정을 견실하게 다졌고, 다음 대의 건륭제 시절의 대원정을 위한 튼튼한 국가재정을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다만, 강희제나 건륭제처럼 전장에서 특별한 공적을 쌓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후대에 빈약한 평가를 받게 되어 아쉽다는 의견을 저자는 개진한다.
마크 C. 엘리엇의 <건륭제>를 읽다 말았는데, 옹정제 평전을 읽고 나니 그 책이 다시 읽고 싶어졌다.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 중에서 윌리엄 T. 로가 쓴 <청 : 중국 최후의 제국>도 중간에 멈춰 서 있다. 앞으로 남은 두 달 동안은 새로운 책들을 읽을 게 아니라 읽다만 책들부터 하나씩 읽어야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