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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다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7년 7월
평점 :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읽기 시작했다. 요시다 슈이치 작가의 책들을 최근에 읽기 시작했는데 신간 <다리를 건너다>에서 요시다 씨는 독자의 예상을 뛰어 넘는 그런 파격적인 스토리텔링을 구사했다. 작가 소설의 핵심요소 중의 하나는 불륜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불륜”에대한 정의를 검색해 보니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서 벗어난 데가 있음’라고 되어 있었다. 단순하게 결혼생활에서 다른 상대를 만나는 것을 불륜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내 생각과 사전적 정의는 상이했다. 물론 광의의 차원에서 본다면 틀린 말도 아니었지만. 이번 작품에서도 작가가 그 누구보다 멋지게 잘 다루는 소재를 활용하면서 또 차원의 세계로, 다시 SF물을 연상시키는 결말에까지 도달하는 장면을 보면서 역시 작가는 이래야 하는구나,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의 자세로 새로운 도전을 마다해야 하지 않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결혼 8년차 아이가 없는 아키라와 아유미 부부는 부모가 싱가폴로 취업해서 가족이 이사하게 되었지만 거부하고 일본에 남기로 결정한 고등학교 조카 고타로와 일상을 영위한다. 화자 아키라는 도쿄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는 아유미의 처조카 고타로와 함께 사는 걸 그다지 부담스러워 하지 않으면서도, 최근에 사귀기 시작한 유카짱과의 관계를 걱정한다. 유사 아버지의 고민이라고 해야 할까? 고타로와 유카짱은 아키라의 걱정 대로 결국 모종의 사고를 치게 된다.
한편 갤러리 오너 아유미에게 자신의 작품을 봐달라며 일본주나 쌀을 보내오고 심지어 집에까지 찾아오는 예술가 지망생 아사히나 다쓰지의 집요함에 아유미는 진저리를 내고 있는 중이다. 아키라는 조심스럽게 아사히나 군의 가능성에 대해 전문가인 아내에게 물어보지만 아내는 단칼에 전혀 가능성이 엿보이지 않는다는 선언한다. 아유미의 판단 착오였을까? 아니면 저명한 인사의 추천으로 아유미의 예상과는 달리 아사히나 군은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이 또한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의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이 에피소드에서 등장한 세월호 사건에 대한 언급에 마음 한구석이 저릿저릿해져 온다.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본 작가도 희대의 비극에 대해 글을 남겼구나하고 말이다.
다음에 등장하는 여름 에피소드에서는 아키라 스토리에서도 등장했던 도의원 성희롱 사건의 진범일지도 모르는 히로키의 아내 아쓰코의 관점에서 전개된다. 현재에서 70년이나 지난 다음의 이야기인 <그리고, 겨울> 편 전까지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묘한 접점을 가지고 있다. 내가 그동안 요시다 슈이치를 읽으면서 느낀 점인데 이 작가는 그런 접점을 묘사하고 전개하는데 있어 매우 탁월한 실력을 보여준다. 무리하지 않으면서 이어지는 부드러운 전개, 아 전의 에피소드에서 그런 장면들이 있었지 하고 무릎을 탁 치게 하는 발군의 능력 말이다. 현대 뉴스 미디어의 활용에 있어 요시다 슈이치는 정말 뛰어나구나 싶다.
아내는 마초 스타일의 남편 히로키가 성희롱 사건에서 잡히지 않은 주범이라는 의심을 하기 시작한다. 남편이 보여준 그간의 행동을 유추해 볼 때,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그녀의 판단이다. 아들 다이치 군이 무더운 여름날, 수영장 교습 중에 쓰려졌다는 소식에 놀라운 마음을 추스르며 아들을 절친한 아야짱 엄마의 도움을 받아 집으로 데려온다. 남편 히로키가 렌즈 회사를 운영하는 친구 에하라 씨에게 부정한 뇌물을 받는 장면을 목격한 아쓰코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남편과 가정을 지키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러면서 다른 충격적인 뉴스들이 연달아 등장해서 자기 남편의 스캔들이 덮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구독 중인 주간지 담당에게 전화를 해서 새로운 특종을 캐달라는 독촉을 하기도 한다. 이 에피소드에서 아쓰코의 특종 독촉은 가을 에피소드로 이어지는 접점을 만들어낸다. 그러던 어느 날, 경찰이 자신의 집을 찾아오자 남편의 스캔들 꼬리가 잡혔는가 긴장하지만 아야짱 엄마와 수영장 오야 코치가 사라졌다는 소식에 안도하기도 한다. 자신이 알게 된 비밀 때문에 시작된 아쓰코의 번민은 예상치 못한 결말로 끝을 맺는다.
자, 이제 소설 <다리를 건너다>에서 가장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세 번째 에피소드 <가을-겐이치로>가 등장할 차례다. 그동안 요시다 슈이치 작가는 개인의 영역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에 전력을 다했었는데 이번 소설에서는 사회 이슈들에 대한 질문들에 도전한다. 우리나라의 세월호 사건일 필두로 해서, 도의원 성희롱 사건, 파키스탄의 말랄라 유사프자이 테러사건, 2014년 홍콩의 우산혁명에 이르는 다양한 이슈들을 이번 작품에 녹여 내고 있다. 다큐멘터리 작가 겐이치로는 와타이고 동아리에서 만난 가오루코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 자신의 일에 충실한 남자 겐이치로는 평화헌법을 지지하는 일본 국민 대신 말랄라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지지하는 가논짱을 취재하고, 홍콩의 우산혁명을 취재하는 자신의 일에 충실한 남자다.
하지만 완벽해 보이는 겐이치로 삶의 균열은 약혼자 가오루코에게서 비롯된다. 앞선 에피소드의 주인공이었던 아쓰코 씨의 특종 독촉전화를 받았던 주간잡지 사의 친구로부터 애인 가오루코와 한때 그녀가 빠졌던 유부남 유키 씨와 함께 지하철을 탔다는 이야기를 들은 겐이치로는 가오루코가 약속을 갑자기 취소한 날 불길한 예감에 유키 씨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아, 그전에 요시다 슈이치 작가는 모든 에피소드를 종결시키는 <그리고, 겨울> 편에 대비해서 미래의 안드로이드 인간을 만들 수 있는 연구를 진행 중인 사야마 교지 교수를 등장시킨다. 자신의 세포를 이용해서 정자와 난자의 유전자 재조합 과정을 통한 복제인간 프로젝트 말이다. 이미 영화 <아일랜드>에서도 등장했던 예의 컨텐츠에 대한 기시감이 겐이치로가 말하는 “스페어” 개념과 어우러지면서 과연 요시다 슈이치 작가가 왜 굳이 이 스토리를 소설에 집어넣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궁금증은 결말에서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다.
다시 겐이치로와 가오루코의 이야기로 돌아와 결국 겐이치로는 옛 사랑을 잊지 못하는 여자와 그 남자가 만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안 본 것으로 할 수도 있었겠지만, 순수한 겐이치로의 양심은 그것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마치 세월호 사건을 없었던 것으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이들의 양심 그리고 위안부가 없었다는 주장을 펼치던 아사히 신문의 추락이라는 뉴스가 자기 남편의 부정을 감추어 줄 거라는 아쓰코 같은 개인이 대변하는 일본인들의 양심을 예리하게 타격한다. 결국 가루이자와 별장의 비극으로 이어지고, 전국을 도주하던 겐이치로는 쓰시마에서 와타이고를 혼신의 힘을 다해 두드리며 삶 가운데 옳지 않은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한다.

소설 <다리를 건너다>는 결말의 수레를 굴리기 시작한다. 처음의 세 이야기들이 현재상을 다룬 거라면 <그리고, 겨울>은 70년 뒤 사야마 교지 교수가 개발한 기술이 창궐한 디스토피아 일본을 시공간적 배경으로 한다. 어쩔 수 없이 리들리 스콧의 레플리컨트를 연상시키는 ‘사인’이 도래했다. 가사나 병간호 같이 기존의 인력이 동원되는 로봇이 대신하고, 70만 명 연구소에서 태어난 사인(복제인간)과 결혼도 하고, 군인으로 전선에 배치하기도 한다. 역시 인간과 같이 유한한 존재라는 점 그리고 생식능력이 없다는 점 등은 레플리컨트와 유사하다. 주인공 히비키와 린은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릭 데커드와 레이철처럼 알 수 없는 지점을 향해 도주를 감행한다. 과거의 모든 것이 현실에 영향을 미치게 된 70년 후 미래는 과연 교정될 수 있을 것인가.
시간을 오가는 웜홀까지 등장한 <다리를 건너다>를 확실히 흥미로운 작품이다. 내가 지금까지 읽은 요시다 슈이치 작품 중에서 최고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문제는 몇 개 읽지 않았다는 것이 단점이긴 하지만. 복잡하면서도 또 결말이 너무 궁금하게 만드는 저력을 보여준 저자는 미래를 위해 현재에 옳은 일을 하라고 주문한다. 이 순간의 결정들은 모두 미래를 만드는 원동력이다. 무엇이 잘못 되었다면, 충분히 반성하고 고치면 될 게 아닌가. 그렇게 세상을 바꾸기 위한 고민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는 열대야 속에서 눈을 비벼 가며 읽을 정도의 수고를 감내할 만한 수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