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온천
요시다 슈이치 지음, 민경욱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월급날이었는데 어제 나에게 작은 선물을 하나 해줬다. 알라딘 중고서점에 가서 줌파 라히리의 소설집 하나와 요시다 슈이치의 <첫사랑 온천>을 샀다. 여기저거시 많이 들어봤지만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은 처음으로 읽었다. 원래는 <일요일들>을 사러 갔었는데, 새로 나온 개정판 표지가 없어서 사지 않고 대신 절판된 <첫사랑 온천>을 샀다. 단돈 3,300원 그것도 15% 할인 받아서 2,800원에 데려왔다. 제법 괜춘한 책이 커피 한잔 값도 되지 않는다니. 물론 책의 가치를 단순하게 돈으로 매길 순 없겠지만 말이다.

 

퇴근 무렵부터 읽기 시작해서 자정을 조금 지나서 다 읽을 수가 있었다. 모두 다섯 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소설집인데 배경은 모두 온셴(온천)이다. 엉뚱하지만 온천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읽다 보니 나도 일본 온셴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온천은 겨울 노천탕이 제 맛이 아닐까. 바깥에서는 흰눈이 펑펑 내리고 계곡 아래 자리 잡은 노천탕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쐬며 ‘코히 비루’를 한 잔 마시면 세상사 다 잊을 수 있을 것 같지? 천만 요시다 슈이치는 세상사가 그렇게 만만치 않다고 소설에서 피력한다.

 

고등학교 시절 첫사랑을 잊지 못해 사력을 다해 성공의 정점에 섰다고 생각하는 순간, 시게타의 아내 아야코는 둘이 찾은 온천에서 이혼을 요구한다. 어쩌면 시게타의 모든 노력은 바로 아내의 이혼 요구를 듣기 전까지의 성취를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리라. 아내는 왜 나한테 이혼을 요구하는 거지? 물론 도쿄 명문대를 나온 아내가 자신에게 과분한 여자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게타는 다른 사람들보다 갑절을 노력으로 분위기 괜찮은 서민주점을 연달아 내며 성공가도를 달려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아내의 이혼 요구로 시게타의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왜 이혼하고 싶은지에 대한설명은 여백으로 남긴다. 그래 인생은 그런 거지.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그에 대한 명백한 보상이 이루어지는 건 아니니까. 시게타의 스토리가 안타깝긴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했다.

 

다음에 이어지는 수다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쓰지노와 와카나의 <흰 눈 온천> 스토리야말로 한겨울 온천 여행의 백미를 그대로 잡아준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분위기 띄우는 거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두 사람이 만났으니 그 다음에 전개될 이야기는 명약관화하다. 쓰지노가 한 마디하면, 와카나도 열 마디로 대꾸하는 방식으로 둘의 만남은 그야말로 찰떡궁합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그런 어색한 분위기가 싫어서 의도적으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적극적이었다는 고백이 이어진다. 그리고 타인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그랬더고 했던가. 그렇지 침묵보다는 그런 게 차라리 낫지 않으려나. 한 겨울의 온천 별채에서 낯선 커플과 장지문 하나 사이로 묵게 된 쓰지노는 한밤 중에 찾은 온천탕에서 옆방 남자와 마주하게 되고 무언가 대화를 시작하려는 자신의 의도가 옆방 남자의 묵언 때문에 침묵에 빠지게 되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동창 가즈미와 교토로 불륜 여행을 떠난 남자 유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망설임의 온천>도 흥미롭다. 아내에게는 업무 차 출장 때문에 교토에 간다고 하고서는 최근에 만난 가즈미와 밀월여행에 나서는 남자. 무엇 하나 스스로 해내지 못하고 미루던 남자가 어떻게 불륜이라는 일탈을 과감하게 시도했는지 궁금하다. 가즈미와 택시 안에서 교토 여행을 기획하면서 내내 택시 기사 아저씨의 눈치를 보는 장면이 주는 스릴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어찌어찌해서 결국 교토에 도착하고 때마침 걸려온 아내의 전화 대화에 담겨 있던 ‘도쿄, 기록적인 폭염 40도’라는 단어가 자신보다 먼저 도착한 가즈미의 메모에 있는 것을 본 유지의 감정은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자신이 감행한 화려한 일탈이 어쩌면 아내와 가즈미가 친 덫이었을까.

 

보통 커플이 찾는 온천에 아내 마치코 없이 교스케는 보험회사의 일급 세일즈맨이다. 나같은 사람이 보면 정말 민폐 친구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캐릭터지만, 각자도생의 정글 같은 시절에 이보다 더 적합한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저돌적인 세일즈를 감행하는 사나이다. 교스케는 아내 마치코에게 좋은 집과 멋진 옷 그리고 맛있는 음식을 사주기 위해 마시고 싶지도 않은 술을 마시고, 고객들과 스키 여행을 갔다가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며 자신의 ‘노오력’을 적극적으로 어필해 보지만, 아내 마치코는 그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순간 교스케의 아내 마치코는 정말 현인 같아 보인다. 보험 가입에 성공하면 그동안 공들인 교스케는 월급명세서에 찍힌 성취감을 누릴 지도 모르겠지만, 이후의 인간관계는 파탄의 수순을 걷게 된다. 처제의 신랑감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오로지 보험을 판매할 생각만 하는 남자의 삶에 저절로 혀를 차게 된다. 나홀로 나선 온천 여행에서 만난 화장품 회사 사장 가오리를 설득시켜 보험판매에 거의 성공한 교스케가 들려주는 비밀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마지막 고등학생 겐지와 마키 커플이 등장하는 에피소드는 거의 발칙하기까지 하다. 알바를 뛰어서 번 돈 3만엔으로 겁도 없이 온천 여행을 기획하는 겐지 군. 자신의 방에서 마키와 관계를 하다가 아버지에게 발각이 되는 장면 그리고 평생 마키 만을 사랑하겠다는 결심을 환상적인 섹스를 기대하며 찾은 온천에서 하게 되는 겐지의 천진난만한 생각에 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린 친구, 삶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게 아니라네. 어쩌면 이야기는 소설의 첫머리에 등장한 첫사랑에 성공했지만, 이별하게 되는 시게타 아야코 커플로 순환하게 된다.

 

200쪽 남짓한 <첫사랑 온천>으로 요시다 슈이치를 읽기 시작했다. 분량도 적당하고 온천을 공간적 배경으로 했다는 점에서 무리 없는 독서였다고 생각한다. 복잡한 책 읽기에 독서 슬럼프에 빠졋다면 슬럼프 탈출하는데 안성맞춤인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시다 슈이치의 책들은 그렇게 아껴 두었다가 책읽기가 지겨워졌을 때, 공명이 준 비단주머니처럼 하나씩 꺼내서 읽어야 하나 하는 즐거운 상상에 빠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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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6 14: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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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8 20: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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