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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남극 탐험기
김근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7월
평점 :
아마 요즘 모바일 세대는 20년 전, 최대 유행이었던 피씨통신의 하이텔이니 나우누리니 하는 말들이 낯설지도 모르겠다. 하긴 그 시절에 태어나지도 않았으니 알 수가 없겠지. 그 시절에 장르소설을 쓰던 이가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제 등단 소설가로 우리 곁에 다시 찾아왔다. 어쩌면 김근우 작가의 귀환은 소설 <우리의 남극 탐험기>에 주인공 ‘나’와 묘하게 등치되는 장면들로 시각화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대중소설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순수문학이고 싶은 ‘경계문학’의 작가라는 타이틀을 달아 드려야 하나. 동시에 아무도 찾지 않는 잊혀진 작가가 되는 두려움을 ‘나무야 미안해’라는 자학적 풍자와 해학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우면서 애잔하게 다가온다. 독자는 도대체 남극 탐험 이야기는 언제나 등장하는 거야 하면서 소설의 절반을 흥미진진하게 소화한다.
그렇다. 소설에는 언제나 운명적 만남이 있기 마련이다. 야구 선수를 꿈꾸는 소년이 7:0 콜드게임으로 질 운명의 게임에서 어떤 계시를 받아 미래가 촉망받는 선동현이라는 유망주 투수의 공을 담장으로 넘긴다고 하더라도 숙명은 바뀌지 않는다는 거. 그리고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도전해야 한다는 언어유희의 소용돌이 속으로 작가는 독자를 쉴새 없이 재촉한다. 그런 작가의 ‘드라이브’가 솔직히 마음에 들었다. 공무원 아버지를 둔 흙수저 아들은 결국 느즈막히 공부를 시작해서 수포 영포 국포 등등을 거치면서 삼류 무광대학 경제학과에 진학한다. 그곳에서 A폭격기라는 별명으로 명명된 국문과 강지진 교수의 스포츠 용병이 되어 맹활약을 벌이기도 한다. 뭐 그 정도는 애교겠지. 그리고 운명의 사랑 강혜진을 만나 반년 가량 뜨거운 사랑 끝에 금수저 애인을 걷어차 버리는 기백을 보여 주기도 한다.
어찌어찌해서 소설가가 된 나의 이야기가 소설의 반쪽이라면, 다른 반쪽은 나의 남극 탐험을 가능하게 줄 광야의 초인, 아니 영국의 초인 어니 헨리 섀클턴 교수가 등장할 차례다. 모두 다 아는 인듀어런스 호의 기적을 만들어낸 바로 그 섀클턴 경 말이다. 이름도 똑같다. 그러니 백여년 전 결국 남극점을 밟는데 실패하고 채 오십이 되지 못한 채, 남극 부근의 사우스 조지아 섬에서 지구별을 떠난 섀클턴 경의 분신이 어느 순간 등장하리라는 건 명약관화한 사실일 수밖에 없다.
시각장애를 가지고 영국의 귀족집안에서 출생한 교수가 23세에 옥스퍼드 대학 박사 학위를 가지고, 케인즈주의 좌파연구의 한 획을 긋게 되는 것 또한 흥미로운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어린 시절의 학대와 차별 따위는 문제도 아니다. 김근우 작가는 섀클턴 교수의 신자유주의가 언젠가는 붕괴할 것이라는 계시와 헬조선의 밑바닥을 차근차근 긁고 있는 한때 경제학 전공자 ‘나’의 상황을 묘하게 연결시킨다. 만나야 할 사람들은 만날 수밖에 없다는 소설적 공식을 충실하게 따르면서.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는 일명 시카고 학파 신자유주의 전도사들과 대처리즘의 기수 마거릿 대처 수상에 대한 신랄한 섀클턴 교수의 비판은 영국병을 치유한 것으로 오도된 대처리즘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에는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1997년 동아시아를 비롯해 우리나라를 강타한 IMF 위기와 월스트리트의 금융전문가들이 설계한 금융 파생상품에서 비롯된 2008년 외환위기는 섀클턴 교수를 21세기 경제 노스트라다무스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다시 어찌어찌해서 한국에 초빙된 교수는 찜질방과 식혜 그리고 화투에 매료되어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고 운명적으로 출발은 장대하였으나, 슬슬 경계문학이라는 이도 저도 않은 글을 매일같이 생산해 내며 잊혀져 가고 있던 작가 나와 조우하게 되었다. 그래 그렇게 가는 거지.
작가가 구사하는 상당히 날카로운 현실비판에 이 놀라운 전개는 또 뭐지 하며 이 작가가 과연 그전에 고양이 잡아먹은 오리 타령하던 이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자기 스스로 헛소리의 대가를 자처하는 그답게 독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을 나는 굳게 믿었고, 그것은 현실화되었다. 한국에서 섀클턴 박사와 나는 치열한 승부근성과 판돈이 난무하는 고도리 게임으로 일치단결해서 남극행에 나서게 된다. 일전에 읽은 마리아 셈플의 <어디 갔어, 버나뎃>에 등장하는 버나뎃처럼 진짜 남극 탐험에 나서게 됐다. 후유, 소설의 절반도 지나서 비로소 본 궤도에 접어든 기분이라고나 할까.
아직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지 못했지만 영화관람을 유도하는 현란한 소개와 더불어 나와 섀클턴 경의 무모한 남극 탐험 도전은 계속된다. 그리고 소설은 드디어 SF 계열로 점프를 시도한다. 말하는 북극곰 치피가 등장해서 탐험대의 일원이 되어, 썰매를 끌기도 하고 나와 박사를 업어 나르기도 한다. 북극에 살다 지구 반대편까지 찾아온 치피가 없었다면, 스노모빌이며 식량마저 바닥이 나 절망적인 순간에 하늘을 나는 펭귄들이 등장해서 펭귄 밀크를 제공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무도한 도전은 그야말로 시작도 하기 전에 끝이 났을 지도 모르겠다. 남극신과 오래 전에 작고한 섀클턴 경이 보우하사, 나는 무사히 남극 탐험을 마치게 됐다. 동상으로 손가락 두 개 정도 잃은 건 아무 것도 아니라며 자신을 위로하면서 말이다.
그럴 가능성이 거의 제로지만, 과연 <우리의 남극 탐험기>가 영화화된다면 재밌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상상을 해봤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장르에 편입시켜야 할까? SF 공상과학? 탐험물? 좌충우돌 횡설수설 성장영화? 그 모든 카테고리에 다 들어갈 수 있다는 게 장점이면서 동시에 영화화에 장애물이 될 수 있겠지 싶다. 문학적 가치 따위일랑은 말 좋아하는 평론가 양반들에게 넘기고, 주말 동안 너무 재밌게 읽은 것만으로도 대만족이다. 왜 책 표지에 설산 위에서 춤추는 북금곰과 손잡은 펭귄이 있을까 싶었는데 책을 다 읽고 나니 바로 이해가 됐다. 김근우 작가가 앞으로 만들어낼 새롭고 멋진 횡설수설 퍼레이드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