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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품 (특별판) ㅣ 작가정신 소설향 11
정영문 지음 / 작가정신 / 2017년 5월
평점 :
이제는 익숙해져서 “그래, 그렇게 가는 거지”라고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세상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막 읽은 정영문 작가의 소설 <하품>에 대한 이야기다. 그전에 이미 <목신의 어떤 오후> 그리고 <어떤 작위의 세계>에서 충분히 체험하지 않았던가. 정영문 작가에게는 어떠한 특별한 서사를 기대해서는 안된다고. 그리고 애석(?)하게도 두 작품 모두 완독하지 못했다. 특히 <어떤 작위의 세계>는 4년 전에 멀리 타이와 캄보디아 휴가여행에까지 데려갔으나 읽다 말았고 아직까지도 다시 펴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에 비하면 장편(掌篇)소설 분량의 <하품>은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해야 할까.
소설은 동물원에서 만난 두 남자의 대화로 시작한다. 어떻게 보면 짧은 단편영화를 한 편 본 느낌이라고나 할까. 상대방이 오리궁둥이라고 지칭하는 남자가 화자다. 어떻게 보면 둘은 오래 전부터 안 사이인 것 같으면서도 또 그만큼의 간격을 지닌 사이다. 속으로만 생각할 법한 이야기들을 스스럼없이 전개하는 것으로 볼 때, 그만큼 각별한 사이인 것 같다가도 모욕적인 언사도 마구 던지는 걸 보면 또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여전히 전통 서사구조에 얽매인 독자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이거 이야기가 산으로 가는 건 아닌지하는 그런 노파심이 스물스물 일어난다.
정말 뜬금없는 이야기들이 오고 간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 같으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시니컬한 대화에 그만 넋이 나갈 정도다. 그래도 묘한 매력이 있다. 낙타와 타조의 타자가 같이 쓰인다는 그자의 말에 나는 네이버 한자사전을 검색한다. 팩트체크, 맞았다 낙타(駱駝)의 타(駝)자와 타조의 타(駝)자는 같은 글자다. 그런데 타조 타(鴕)자는 또 왜 존재하는 거지? 헷갈릴 수 밖에 없다. 엉뚱하게도 얼마 전 찾은 동물원에서 새끼 낙타가 정말 오랜만에 태어났다는 뉴스가 생각났다. 그 날은 시간이 없어서 아기 낙타를 못봤다. 썩은 사과를 깎아서 나눠 먹고, 그자가 코끼리를 주려고 준비한 튀긴 강냉이를 못마땅해 하면서도 낼름낼름 받아 먹는 오리궁둥이 화자의 묘한 심리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할지 모르겠다. 그래, 그렇게 가는 거겠지.
타인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코털을 뽑아대는 그자의 모습을 보면서 혐오감을 느끼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도 그러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당최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들의 행진이 이어진다. 나도 코털을 정리하고 싶어졌다 순간.
그래 이렇게 비루한 이야기들의 종점은 과연 어디일까?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법, 그자의 곁을 지금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어하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심리를 작가는 예리하게 꼭꼭 짚어낸다. 무언가 재밌고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어하지만, 그들에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주어진 시간은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무언의 무위를 부추긴다. 오래 전에 같이 누군가를 해쳤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이 둘은 전직 킬러였단 말인가. 오가는 말로 견주어 봤을 때,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도대체 둘의 관계는 무슨 관계란 말인가. 마치 선문답이 오가고 둘은 다음을 기약하며 여름날의 풍경을 마무리한다.
소설을 읽는 동안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코털을 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