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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제 - 화이질서의 완성 ㅣ 아이필드 히스토리 History
단죠 히로시 지음, 한종수 옮김 / 아이필드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1. 오래 전 읽었던 김용의 <의천도룡기>의 시대적 배경은 13세기 원명 교체기다. 몽골족 천하였던 원나라 조정에 분연히 맞선 홍건적의 무리들 중에 실제 인물이었던 상우춘, 서달 그리고 훗날 홍무제가 되는 농민 출신의 주삼(맞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이라는 이름의 주원장이 차례로 등장한다. 소설에 따르면 구양신공을 익힌 절세무공의 소유자이자 명교 교주 장무기는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는 그런 능력의 소유자였다.
2. 일본 역사가 <영락제>에 등장하는 주인공 연왕 주체, 훗날 명나라의 세 번째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성조 영락제가 조카 건문제를 상대로 일으킨 반란은 정난의 변[靖難之變]이란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다. 조선시대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는데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의 자리를 찬탈하기 위해 일으킨 쿠데타 후에 역모를 도모한 이들에게 정난공신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당시에는 역도들에겐 영광이었겠지만, 훗날 치욕적인 칭호로 바뀌게 될 줄은 그 땐 아마 몰랐겠지. 참고로 3등 정난공신에 성삼문이 들어 있어 놀랐는데, 쿠데타세력이 억지로 부여한 것이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은 중국사에 등장하는 여러 군주 중에 역시 조카의 자리를 무력으로 찬탈하고 제위에 오른 문제적 인물 연왕 주체/영락제를 일본인 역사가의 시선을 통해 읽게 됐다. 단죠 히로시 교수는 단순하게 영락제에 대한 평전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부제가 말해 주듯이 그를 통해 중국식 화이질서가 완성되었다는 점을 이 저술에서 강조하고 있다. 중국은 원래부터 다민족국가일 수밖에 없는 숙명이었다. 중원을 중심으로 한 중화제국과 변방의 북적, 서융, 동이 그리고 남만이라고 불리는 이적들의 연합체가 바로 현재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화이질서의 핵심이다. 전통적 화이사상은 중화가 중심이라는 세계관이면서 동시에 이적의 존재를 필요로 했다. 그리고 전통 유가사상에서는 차별과 포섭이라는 방식을 통해 화이사상의 질서를 도모했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중국의 역사는 중화와 이적의 중원쟁탈전이었다. 당대 이래 유지되던 중화질서는 몽골의 제국 원나라가 중원의 지배자가 되면서 일대 충격을 불러왔다. 변방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온 이민족이 중원의 지배자가 된 것이다. 이어진 원명교체기의 격변을 기존에는 민족투쟁이라는 차원에서 다루었지만, 점차 학계에서는 민족투쟁 대신 농민과 지주 혹은 관료계급 간의 계급투쟁이라는 측면에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는 점을 저자는 지적한다. 중화세계에 한족(漢族)으로만 구성된 국가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오랑캐를 내쫓자는 ‘구축호로’나 ‘회복중화’ 같은 구호들은 정치적 선동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명교체가 민족혁명이라는 주장은 무의미하고, 오히려 원명시기에 역사적 일관성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저자는 주창하고 있다.
원나라 말기, 홍건적 세력으로 천하쟁패에 나섰던 세 명의 군웅들은 다음과 같다. 강서의 진우량, 소주의 장사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경의 주원장이다. 그 중에서 진우량이 주원장과의 대결에서 처음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고, 장사성마저 패퇴시키는 토너먼트에서 승리한 주원장은 대도(지금의 베이징)에 자리 잡은 원나라를 정벌한 한족 대표선수가 되었다. 서달과 상우춘으로 구성된 북벌군은 의외로 손쉽게 몽골정부를 패퇴시키고, 마침내 중원을 통일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홍무제 주원장은 가혹한 형벌제도와 특임부대를 가동한 공포정치 그리고 십만 명에 달하는 인원들에 대한 숙청과 옥사를 통해 전제통치의 기반을 마련했다. 한편, 국가는 ‘유덕군민’(有德君民)이라는 왕조 교체의 정당성을 위한 천명사상을 강조했다. 독재군주였던 황제는 기본적으로 유교의 덕에 의한 덕치국가를 표방하면서, 역설적으로 이제 막 탄생한 거대한 제국의 정권강화를 위해 무자비한 율(律)에 의한 형벌 사용을 마다하지 않았다. 레이 황 교수도 자신의 저서 <만력 15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명나라에도 법률이 있었지만 실제 제국통치의 실제는 바로 유가사상의 윤리, 도덕이었다고 언급했다. 홍무제가 실시했던 군주독재의 강화는 시대적 요구였으며, 왕조말의 혼란을 바로 잡기 위한 질서확립에 따른 전제의 정도 강화는 필연적이었다는 사실에 저자는 주목한다.
한편, 태조 홍무제의 건국 초기 최우선 과제는 북방으로 물러간 몽골족의 북원에 대한 대비와 남쪽 해안에 출몰하는 왜구와 해적으로부터 국가와 백성을 방비하는 일이었다. 세계제국이었던 원나라 시절에는 무역을 권장하는 풍조가 있었지만, 태생적으로 보수정권일 수밖에 없었던 명나라는 대외무역을 국가가 관장하는 조공무역으로 제한하고 해금, 다시 말해 쇄국정책을 실시했다. 남해안에 대한 전수방위 전략이 어느 정도 성과를 발휘하자 이번에는 북쪽 국경으로 눈을 돌렸다. 제국은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을 시행하면서도 동시에 북방수비를 위해 9명의 황자들을 분봉하는 봉건시스템을 가동했다. 문제는 중앙집권제와 분봉제의 이해가 서로 상충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설상가상으로 변방에 파견된 유능한 군왕들이 병권을 쥐게 된다면 중앙에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점을 홍무제는 몰랐을까? 홍무제 당대에는 컨트롤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후대에는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우려는 2대 건문정권에서 실제로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건문제와 훗날 영락제가 되는 연왕 주체가 4년간 내전을 벌인 정난의 변이다.
적통 출신 황태손으로 주원장 사후 제위에 오른 건문제는 고명대신 황자징과 제태 그리고 방효유의 조언을 받아 삭번과 관제개혁을 시도한다. 건문제의 삼촌뻘로 새왕이라 불린 9명의 유력한 제왕들이 차례로 영지와 제왕의 신분을 빼앗기자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던 북평(현재의 베이징)의 연왕부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황제의 칼끝이 노리는 최종목표는 자신이라는 걸 잘 알고 있던 연왕은 수세에 몰리기 전, 거병에 나선다. 어린 황제를 주변에서 농락하는 간신 황자징과 제태를 제거라는 대의를 내세웠지만, 처음부터 연왕의 목적은 조카의 제위찬탈이었다. 장장 4년간에 걸친 내전을 통해 연왕 주체는 환관과 다수 관료들의 내응으로 수도 금릉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한다. 그 와중에 건문제의 시신을 발견되지 않았는데, 그런 이유로 분사했다는 주장과 도망해서 은신해 살았다는 설이 난무했다고 전한다.
무력을 통해 정권탈취에 성공한 연왕은 태종(훗날 성조로 개칭) 영락제로 그토록 염원하던 제위에 오른다. 태조 홍무제의 바람과는 달리 4년간의 내전으로 천하는 다시 혼란스러워졌고, 부도덕한 방법으로 제위에 올라 정통성 논쟁의 중심이 된 영락제는 부황이 세우고자 했던 질서의 재확립에 매진하게 된다. 자신에게 절대 굴복하지 않았던 절동학파의 거두 방효유 일족과 강성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한 영락제는 건문정권의 관료들에게 아량을 베풀어 자신에게 충성하면 그전의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통 큰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선비와 유학자들을 대거 동원해서 당대 최대 유서인 <영락대전> 편찬에 나선다. 학자들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유도하며, 명조의 근간인 문치주의 지배확립을 위해 철저하게 준비된 포석이었다. 아울러 자신의 약점을 감추기 위해 역사에 대한 윤색과 날조도 마다하지 않았다. 영락제 시절에 저술된 태조실록은 자그마치 세 번이나 개수작업을 하게 되는데, 자신이 태조의 정비였던 마황후의 소생이었다는 역사적으로 상충되는 사실에도 손을 댔다. 자신의 조카였던 건문제에 대해서도 상대적으로 유약하고 무능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단죠 히로시 교수는 명대에 저술된 관찬 자료에 대해 취사선택해서 보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언제나 그렇듯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어떤 점에서 보면, 진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승자가 원하는 “가공된” 기록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명실상부한 천자의 자리에 오른 영락제의 정치적 모델은 세계제국의 제왕이었던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였다. 수성의 군주답지 않게 영락제는 집권 초기부터 공격적인 모습으로 나갔다. “사이 조공”이라는 방식으로 중화를 중심으로 한 질서를 강조하면서, 주변의 번국들에 조공을 강요했다. 사실 조공제도는 중화제국에게 경제적인 면에서 마이너스였지만, 영락제는 그런 점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만큼 명나라의 정치력과 경제력이 조공무역의 마이너스를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실리보다는 명분을 중시하는 영락제의 스타일 때문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경제중심지 남경(금릉)에서 출발한 명나라 정권은 태생적으로 북방수비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20년간 북평에서 제왕생활을 한 연왕/영락제는 원나라 시절부터 정치의 중심이자 국제도시였던 북경을 미래의 수도로 삼기로 마음먹고, 천도를 위한 장기 플랜을 가동시켰다. 수많은 남인 출신 관료들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제위 19년 만에 자신의 계획을 관철시키는 데 성공한다.
보수주의자였던 아버지 홍무제와 달리 대외원정에도 영락제는 적극적이었다. 우선 즉위 초기 신료들의 반대를 제압하고 안남원정을 시도해서 400년 동안 독립을 유지해온 안남을 내지화했다. 환관 정화를 기용해서 수차례에 걸친 남해원정에 나서기도 했다. 대항해시대 유럽 국가들처럼 무역항로를 개발하기 위한 경제적 목적으로 시작한 원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실리는 없었지만 사이 조공이라는 영락제의 원대한 목표를 위해 조공국을 늘리는데 일조한 것은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숙원사업이었던 다섯 차례에 걸친 북방정벌을 영락성세의 한 가지 특징으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전까지 중화제국의 천자가 직접 북벌에 나서 막북을 넘은 적이 없었다. 이 원정 역시 비용만 많이 들어가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사업이었지만 사이질서의 확립이라는 원대한 계획안에서 본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영락제는 마지막 원정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단죠 히로시 교수는 내정면에서 영락제가 어떤 성취를 이루었는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빈약하게 다루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모름지기 정관의치에 비교할 정도의 영락성세라고 한다면 백성들이 그 이전에 비해 얼마나 잘 살게 되었는지 사회경제적 측면의 연구도 필요할 텐데 지나치게 정치사적 차원에서 영락연간을 다룬 게 아닐까 싶다. 태조 홍무제의 후계를 자처한 것에서 보듯이 황제권강화를 위해 기존의 금의위와 환관이 중심이 된 특무기관 동창을 이용한 스파이 정치라는 폐단을 남기기도 했다고 한다. 재상제를 폐지한 홍무제의 결정은 황제권강화에는 용이했을지는 몰라도, 모든 결정이 황제에게 집중되는 현상을 빚기도 했다. 아무리 천하를 다스리는 일이 황제의 직무라고 할지라도 그 많은 업무들이 황제에게 집중되는 현상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영락제는 환관들을 중용해서 비서관으로 삼고, 내각대학사라는 이름의 실질적인 재상역할을 맡은 관료를 중심으로 한 내각을 처음으로 운용했다. 만력 연간의 이름난 수보대학사 장거정의 이름을 보니 지난달에 읽은 레이 황 교수의 <만력 15년>이 생각나 반가웠다.
숨 가쁘게 영락제를 다룬 평전을 읽고 리뷰까지 마쳤다. 대중역사서라고 보기에는 저자가 강조하는 화이질서에 대한 내용이 자못 심오하다는 생각이다. 초반의 지루함을 이겨내면 비로소 삼촌과 조카가 천하를 두고 다툰 내용이 나오고, 연왕이 제위에 올라 영락성세를 이룬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데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영락제>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레이 황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형제간의 골육상쟁을 치르고 황제가 된 당태종 이세민에게 세간의 도덕률을 적용해서는 안된다고 했던가. 내가 역사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학자도 아니고, 일개 독서인으로 볼 때 건문제의 충신으로 남은 방효유가 썼다는 연적찬위라는 네글자가 보여주는 절개와 윤리는 영락제의 불의한 찬탈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부도덕한 찬탈자가 이룬 성세라는 신화를 우리의 근대 산업화 과정 어딘가에서 본 듯한 기시감에 역사는 꾸준하게 반복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