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감상적 킬러의 고백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평점 :
품절
8년 만에 루이스 세풀베다의 <감상적 킬러의 고백>을 다시 사서 읽었다. 아무리 중고책이라고 하지만 커피 한 잔 값보다 못하다니. 물론 가격으로 책의 가치를 매길 순 없겠지만 말이다. 세풀베다 작가의 팬이 되게 된 계기를 제공했던 책이어서 그런지 무척이 애정이 갔다. 물론 지금은 절판돼서 구하고 싶어도 중고서점 말고도 구할 수가 없다. 8년 전에도 그랬던 것 같다. 그 때 산 책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고, 이번에 다시 사서 읽게 됐다.
<감상적 킬러의 고백>은 동명의 제목과 <악어>(야카레)라는 두 편의 중편 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오래 전에 읽었을 적에는 분면 전자가 더 인상적이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 다시 읽을 적에는 <악어>에 더 호감이 갔다. 어쨌든 순서상 전자부터 이야기를 해보자. 금년 42세의 업계의 솜씨 좋은 킬러는 맡은 임무를 성실하게 처리하는 실력으로 세금도 떼지 않는 고소득자 대열에서 아시아와 아메리카 그리고 유럽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오늘도 상위 1%에 육박하는 고소득을 올리고 있다. 난 왜 다른 것보다 가장 우선적으로 세금을 내지 않는다는 킬러의 말에 그렇게 공감이 갔던 걸까.
어쨌든 직업상 한 곳에 뿌리를 내릴 수 없는 남자는 24살 먹은 자신의 “계집애”에게 헌신적이다. 성적이 매력이 철철 넘치는 그녀를 위해 부르주아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고급 아파트를 구입해서 크고 작은 파티를 열었다나. 모든 게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던 중년 킬러의 앞길에 장애가 하나 등장했다. 그것은 바로 새로 받은 미션에 등장하는 표적이었다. 무슨 NGO단체에서 일하는 표적을 제거하는 일거리였다. 동물적 감각을 지닌 킬러는 첫인상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결국 이 일에 얽혀 그만 조기은퇴를 당할 신세가 되었다. 자신의 계집애는 결국 바람이 나고 말았고, 일거리는 꼬이고 심지어 표적에게 도움을 받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니. 마드리드에서 이스탄불로 남아가 일처리에 나서지만 미합중국 마약 단속반(DEA)까지 등장하는 원하지 않는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파리의 아지트에 도착했지만 자신의 계집애가 여전히 멕시코에서 놈팡이와 놀아나고 있다는 사실에 킬러는 분노한다. 자신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하룻밤의 쾌락을 위해 창녀들과 놀아나면서 젊은 아가씨의 바람에 이렇게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장면이 참으로 우습기까지 했다.
결국 멕시코시티에 표적이었던 NGO 인사를 찾아내 마지막 임무를 완수하고 은퇴하는데 성공하는 킬러. 더 놀라운 엔딩을 위해 세풀베다 작가가 준비한 파이널컷은 확실히 대가의 솜씨다웠다.
<감상적 킬러의 고백>이 1940년대 미국 누아르 영화적 스타일이라고 한다면, <악어>(야카레)는 작가의 친환경적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이탈리아 밀라노에 자리 잡은 비토리오 피혁 회사와 아마존 강 유역에 사는 아나레 족이 어떻게 연관될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세계화가 더 이상 저지할 수 없을 정도로 일상화된 마당에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서로 절실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됐다. 태고이래 아나레 족 삶의 기반이었던 야카레(악어)가 서구 자본주의자들에게 큰 돈벌이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세계적 희귀종으로 보호되어야 할 인류 공동의 유산인 아나레 족의 야카레에 눈독을 들인 비토리오 피혁 회사는 거의 공짜로 원자재인 악어가죽을 밀수한 다음, 높은 이윤의 부가가치를 창출할 궁리만 할 따름이다. 야카레가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아나레 족의 생존 따위는 관심도 없고, 오히려 자신의 사업에 방해가 되는 이들을 밀렵꾼을 동원해서 가차 없이 몰살시킬 정도니 말이다.
칠레 경찰 출신 다니 콘트레라스는 스위스의 헬베티카 보험회사 조사원으로 밀라노에 파견되어 비토리오 브루니의 죽음이 그전에 있었던 다른 두 명의 죽음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 회사가 아마존 정글에서 저지르는 추악한 범죄에 가까운 사업을 막기 위해 아나레 인디오 전사들을 동원해서 독침으로 근육을 마비시키는 방법으로 암살에 나섰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거악을 일소하기 위해 공적인 영역에서의 처벌 대신 사적 처벌이라는 신속한 방법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대상이 자신의 아버지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돈 비토리오의 딸 오르넬라로 대변되는 가진 부르주아 계급의 한계성을 엿볼 수도 있었다. 끝까지 사적 응징의 도구로 아나레 인디오 사냥꾼들을 이용하고, 그들의 안위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서구인들, 다른 표현으로는 헤아슈마레(물을 증오하는 사람들)가 가진 이중성을 세풀베다는 가감 없이 고발한다.
소설에서 힘없는 아나레 부족에 대한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가져온 병폐의 칼날이 언제라도 우리를 향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세풀베다 작가가 구사하는 문학적 경고로도 해석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경 보호나 종 보전 같은 이슈들이 단순히 우리가 살고 있는 바탕이 되는 지구별을 위한 것이라는 것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외면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차별적 난개발로 수많은 동식물들이 멸종 위기로 내몰리고, 종 다양성에도 치명적인 위협이라는 환경보호주의자들의 경고가 있었지만 삶의 편리로 포장된 우리 인류의 이기주의에 묻히고 있는 현실이 암담하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