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차미혜 사진 / 난다 / 201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달에 그동안 미뤄두고 있던 프리모 레비를 읽었다. 죽음의 절멸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자의 비애를 담담하게 소회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그의 책과 블로그들을 통해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독일 점령군에 봉기한 바르샤바 시민들의 이야기를 접할 수가 있었다. 이제 맨부커상을 빼놓고는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는 작가가 된 한강이 폐허가 된 도시 바르샤바에서 보낸 편지 <흰>을 읽었다.

 

시인지 소설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흰>의 영어 제목은 <The Elegy of Whiteness>란다. 그냥 <흰>으로는 무슨 뜻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는데 영어제목 <흴 수밖에 없는 비애>라고 해석을 하니 좀 더 그 의미가 명징해진다고 할까. 소설의 서두에 흰색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을 하나씩 나열한 다음, 본론에서 차례로 풀이하는 방식이다. 전통적 서사구조는 단호하게 배격해서, 독자는 내가 지금 소설을 읽고 있는 건지 아니면 시를 읽고 있는 건지 알 도리가 없다. 그게 정확한 저자의 의도일진 모르겠지만, 심술쟁이 독자는 독자만의 특권이라고 할 수 있는 오독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흰색하면 빼놓을 수 없는 눈도 등장한다. 차가움의 상징이지만 또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 존재인 눈, 눈으로 덮인 세상에 대한 동경의 이면에는 검은색 발자국으로 훼손될 가련한 운명에 대한 감상이 살포시 지나간다. 어쩌면 폐허에서 다시 수도를 재건한 바르샤바의 이미지가 그것이려나. 밥을 짓기 위해 스페인에서 난 흰쌀을 사러 마트에 들르는 일상의 스케치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먹는다는 행위는 생존을 위한 것이고, 생존하기 위해 우리는 부지런히 무언가를 살 수 있는 재화를 벌기 위해 매일매일의 윤회를 거듭한다.

 

배내옷에서 출발해서, 자기 삶에 앞에 존재했던 부모님의 첫 번째 아이를 앗아간 가혹한 운명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그녀가 살았다면 자기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그 이야기는 바르샤바 출신으로 벨기에로 입양되었지만, 6살 아이 때 죽은 형의 혼과 대화하는 어느 소년의 이야기와도 묘한 접촉점을 이끌어낸다. 신비하기도 하여라. 극도의 리얼리즘에서 갑자기 신비주의로 전환하는 이 당황스러움이란.

 

각기 다른 맛을 대표하는 선수인 소금과 각설탕의 대조는 또 어떠한가. 요리하다가 칼에 손을 베이고 또 소금을 집다가 더 큰 쓰라림을 느끼게 된 심정을 이럴 때 상처에 소금 뿌린다라는 표현을 절실하게 배웠노라는 고백이 귓가를 스쳐간다. 지금은 설탕이 흔해빠졌지만, 예전에 물자가 귀할 시절에는 각설탕 하나만 있으면 남부럽지 않은 그런 시절도 있었다. 장방형 안에 숨어 있는 아찔하게 달콤한 유혹을 거부할 수 있는 아이들이 있을까? 조금만 할짝여도 자극적인 달콤함이 입 안 한가득 퍼져나가는 순간의 쾌락이란 앞서 등장한 순백색 소금의 쓰라림과 그 결을 달리한다.

 

책에 나오는 글들에 동감하는 편이지만, 어떤 기억들을 훼손되지 않는다는 작가의 생각에는 동의하지 못할 것 같다. 세상에 훼손되지 않는 게, 변하지 않는 영원에 근접한 게 존재했던가. 그런 건 유토피아에나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더 그리워하고 아쉬워하는지도. 또 한편으로는 시간의 훼손이 모든 걸 블루어(blur)하게 만들고 망가뜨린다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말에는 또 동감하고 싶어지고. 이래서 인간은 양가적 감정의 존재인 모양이다.

 

한소끔 떨어져서 이제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된 저자의 글을 읽으니 상쾌한 기분이다. 열광과 환호가 잦아진 자리를 채우는 꾸준한 글쓰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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