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의 운동화
김숨 지음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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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29년 전, 6월 난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을까. 너무 오래 전이라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 본다. 80년 광주에 이어 내 고향 인천에 공수부대가 투입된다는 유언비어가 끝도 없이 퍼지고 있던 시절, 난 도서관에 공부를 하러 갔던 기억이 난다. 무더운 날에 도서관에 올라갔지만 도시 전역을 뒤덮은 시위 때문에 아마 도서관이 문을 열지 않았던 것 같다. 김숨 작가의 <L의 운동화>에서 작가는 바로 29년 전 그 시절을 달구었던 한 청년의 운동화 복원에 관한 과정을 소설화했다.

 

소설을 읽기 전에 팟캐스트로 실제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를 복원한 과정을 이미 들어서 그런지 소설의 전개는 생각보다 편안하게 다가왔다. 이런 종류의 기시감이라면 항상 대환영이다. 1부와 2부로 나뉘어진 소설 <L의 운동화>의 화자는 열사가 남긴 운동화의 복원을 맡게 될 복원전문가 “나”다. 며칠 전 독서모임에서도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었는데, 왜 작가는 이한열이라는 본명을 놔두고 굳이 "L"이라는 이니셜을 사용해야 했을까. 세상 모든 이들이 이 소설의 무엇에 관한 그리고 누구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다 알고 있는 마당에 말이다.

 

어쨌든 나레이터 나의 관점에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이한열 기념관의 채 관장이 열사의 운동화 복원을 의뢰하면서 나의 고민은 시작된다. 사실 고미술품을 전문으로 복원해온 나는 폴리우레탄 소재로 된 신발을 복원하는 작업을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소설의 모든 전개가 그렇듯, 나는 숱한 고민 끝에 의뢰를 맡을 수밖에 없는 운명일 테고 각고의 노력 끝에 복원을 완성하게 될 것이다. 그 와중에 다양한 현대미술과 복원 사례에 대한 이야기들이 소개된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특히 나치 전투기 조종사 출신으로 현대미술 퍼포먼스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요셉 보이스의 죽은 산토끼 퍼포먼스는 결국 인터넷 검색을 하게 만들었다. 우리나라 리움 미술관에도 오리지널이 전시된 거미엄마 루이스 부르주아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프레스코화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복원에 얽힌 이야기를 읽으면서, 복원은 창조가 아니고 최소한의 복원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것이라는 작가의 주장에 절로 공감이 갈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가 잠시 곁길로 샜다. 어쨌든 소설은 필연적으로 열사의 운동화 복원 과정 중에 이한열 열사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에 대한 재구성을 들려준다. 다른 계절도 아닌 바로 6월에 내가 이 책을 읽어야 하는 당위성이 바로 이 점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마저 들게 하는 사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어떤 영화 비평 글에서 좋은 영화란 모름지기 사유, 좀 더 고상하게 표현하면 철학할 수 있게 해주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는 주장을 읽었는데 소설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김숨 작가의 <L의 운동화>는 그런 점에서 정말 좋은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화 동아리 출신으로 다른 학우들을 보호하기 위해 소크(SOC)가 되어 시위대 최전선에 아픈 몸을 이끌고 섰던 젊은 청년의 미래를 앗아간 민주화의 대의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는 사유는 정확하게 복원작업대에서 오랜 시간의 풍화와 보존상의 문제로 빈사 상태에 이른 그의 운동화를 대면하게 된 복원전문가 “나”의 실존적 질문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복원이 과연 최선의 방법인가라는 질문 역시 의미심장하다. 열사가 신던 타이거 운동화는 그의 마지막 순간에 함께 하기 전까지는 어디에서나 살 수 있는 대량생산된 아무런 의미 없는 기성제품(ready-made)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슬픈 죽음의 기억이 담긴 그의 운동화는 암혹했던 시절의 역사를 증언하는 유물로서 더할 나위 없는 비물질적 가치를 담은 오브제가 되어 역사의 전당에 오르게 되었다. 작가는 동시에 보존연구소에서 묵죽도를 담당한 이소연 복원가의 이야기를 투트랙으로 진행한다. 보관상의 실수로 훼손된 묵죽도(열사의 운동화 역시 마찬가지였다)를 복원하기 위해 한지를 한 겹 한 겹 핀셋으로 덧대는 그녀의 모습은 전작 <바느질하는 여자>의 연장전처럼 작가가 집요하게 파헤치는 장인의 아우 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녀가 감당해야 하는 신산한 삶의 여로 역시 그렇지 않아도 진중한 이야기에 시간의 더께와 무게를 더한다.

 

김숨 작가는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는지 소설 속에서 다양한 이야기들을 등장시킨다. 모든 것이 예술의 소재 혹은 살아 있는 역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까, 요셉 보이스의 죽은 산토끼를 비롯해서 잇 아트(eat art)의 창시자 다니엘 스포에리 같은 현대미술가를 필두로 해서 아흔도 넘어 기소되어 실형을 선고 받은 나치 전범 오스카 그로닝 에피소드까지 아우르고 있다. 그래도 요셉 보이스의 죽은 산토끼의 그것을 이소연 복원가의 남편이 아들을 보러 다녀오는 길에 로드킬한 토끼 이야기에 연결하는 장면에서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어쩌면 소설 어딘가에 나오는 작가의 표현처럼, 모든 것은 환(幻)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이 소설을 이번 달에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그렇게 허겁지겁 읽었을 지도 모르겠다. 2년 전에 만난 한강의 <소년이 온다>가 그랬던 것처럼, <L의 운동화> 역시 다 읽고 나서도 그 여운이 참 오래갈 것 같은 그런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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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6-27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 복원 작업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위화의 에세이에 나온 내용처럼 우리나라 젊은 세대들이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잊을까 봐 걱정됩니다.

레삭매냐 2016-06-27 22:02   좋아요 0 | URL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입니다.
위화 작가의 말대로, 국내 작가들이 뜬구름 잡는
타령보다 좀 더 리얼리티에 접근한 이야기들을
다뤄 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