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꾼들
제임스 설터 지음, 오현아 옮김 / 마음산책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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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마음산책에서 나온 제임스 설터의 1957년 데뷔작 <사냥꾼들> 보면서 든 생각 두 개. 드디어 지금까지 나온 모든 설터의 책 표지를 장식했던 던컨 한나의 이미지에서 탈출했다는 점(정말 대환영이다)과 왜 계속해서 번역자가 바뀔까 하는 생각. 예전 경험을 유추해 보면, 헤르타 뮐러의 책 번역자가 모두 달라서 출간된 뮐러의 책에서 동일 작가의 균질성을 담보하지 못했다는 점이 바로 떠올랐다. 나름 첫 두 권의 책을 번역한 박상미 작가와의 궁합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아마 내 생각과 출판사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어쨌든 앞으로도 5권의 책이 더 나올 예정이라고 하는데 나의 설터 컬렉션이 늘어갈 생각을 하니 그냥 기분이 좋다.

 

*** 오 맙소사, 책 표지의 비행기 그림이 던컨 한나의 이미지가 아닐 거라고 나의 추측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다. 다시 확인해 보니 던컨 한나의 그림이란다. 이 작가가 전투기 그림도 그렸다고? 미치겠다 정말. 아니 ‘집구석의 화가’(a painter at home)라는 별명을 가진 작가가 왜 전투기 그림을 그렸냐고.

 

로쟈 선생이 알라딘 북플에 남긴 글을 보고 설의 데뷔작이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책을 주문해서 바로 읽기 시작했다. 딸랑 5% 정도. 하지만 일주일 동안 읽을 책이 갑자기 너무 많아져서 잠시 휴지기를 가졌다가 어제부터 다시 시작했다. 재밌어서 단박에 절반을 다 읽어 버렸다. 위키피디아를 뒤져 작가의 신상을 조사해 봤다. 제임스 설터의 본명은 제임스 아놀드 호로비츠, 배경을 바로 알 수 있는 이름이군. 1925년생으로 웨스트포인트 출신의 군인 출신 작가였다. 2차 세계대전과 특히 한국전에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한 점이 눈에 띄었다. 소설 <사냥꾼들>에서도 일본을 거쳐 한국전에 투입된 주인공 클리브 코넬 대위는 작가의 분신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100번의 전투비행을 마친 베테랑 조종사로 1952년 2월에 한국에 도착해서 미그기를 격추시킨 기록도 가지고 있다.

 

31세의 클리브는 7년 경력을 가진 베테랑 전투기 조종사로 남들은 군경력을 마치고 사회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만 전장의 흥분을 자아내는 짜릿한 분위기를 동경한다. 문제는 전투기 조종사로서는 치명적인 시력 약화 문제가 그에게도 예외는 아니라는 점이다. 이번 전쟁이 마지막으로 생각한 클리브는 한국전을 마지막 무대로 생각하고 전투기 조종사로서 탁월한 전훈을 세우고 전역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에이스 더치 이밀 대령 휘하에서 편대장이 되지만, 교묘하게도 자신이 출격하는 날마다 적기를 만나지 못해 공적을 쌓지 못하는 긴장의 나날이 계속된다. 언젠가 창공을 날다가 빛 속으로 사라지겠다는 생각도 해보지만, 이미 5대의 적기를 격추시켜 에이스가 된 라이벌 로비 대위 편대팀이 공적을 올리는 것을 지켜보는 클리브의 심정은 착잡하기만 하다. 인간 세상 어디에나 등장하는 경쟁구도가 전투기 조종사들 사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기이하게 생각한 점은 하늘에서의 전투에 나서는 용사들이 하나 같이 자신의 안위보다는 적기를 격추시켜 소위 명예의 전당에 오르고 매스컴을 타서 주위에 자신의 용맹을 과시하겠다는 생각들로 가득차 있다는 점이었다. 사실 한국전쟁은 휴전단계에 접어들어, 일개 비행전단의 활약이 크게 의미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걸 알고 있는 듯이, 미그기를 모는 소련 전투기 조종사들도 공적을 세우기 위해 마치 먹이를 향해 벌떼처럼 달려드는 F-86 세이버와 굳이 공중전을 벌일 이유가 없다. 그 점이야말로 우리의 주인공 클리브 코넬 대위가 번번이 허탕을 치는 진짜 이유였다.

 

하지만 진짜 클리브의 라이벌은 로비가 아니었다. 그는 바로 일본에서 마주치기도 했던 풋내기 조종사이자 자신의 휘하에 있는 소위 에드 펠이었다. 책 뒤에 실린 ‘야비한 성공과 장엄한 패배’가 의미하는 게 무언지 궁금했는데 미그기를 추적하는 가운데 윙맨으로 리더를 호위하는 본연의 임무보다 적기를 격추시켜 에이스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타인의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위험 아랑곳하지 않는 자칭 ‘닥터’ 펠의 치기어린 행동을 가르키는 말이었다. 클리브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공군 에이스의 자리에도 오르지 못할 그런 위인이었지만, 미그기 격추라는 전훈을 애처롭게 원하는 이밀 대령의 후원 아래 오직 결과만이 말해준다는 사회의 평범한 진리에 따라 영웅으로 추대되기에 이른다. 어쨌건 간에 닥터 펠의 연속된 성공은 클리브를 더욱 소외시키기에 이른다. 자신의 본심을 잘 아는 들레오와의 도쿄 휴가를 보내다 만난 일본 여성 에이코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되뇌이는 클리브의 모습에서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남자의 진심을 엿보기도 했다.

 

마지막 무대답게 100번의 미션 비행을 앞둔 클리브 대위는 멋지게 적의 에이스 케이시 존스를 잡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일이 공교롭게 진행되려고 하다 보니 사실을 판별할 수 있는 카메라가 고장이 나버리고 클리브의 윙맨 헌터 소위마저 연료부족으로 추락하면서 아무도 클리브의 전훈을 입증할 수 없게 되버렸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클리브의 선택은 어떻게 귀결될 것인가.

 

제임스 설터 작가는 새로 등장한 애송이 에이스의 눈부신 활약에 반비례해서 갈수록 침잠해 가는 주인공 클리브 코넬의 심리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모든 것이 정량화되어 비교대상이 되어 버린 각박한 현실세계의 시각화는 보는 사람을 다 답답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서 클리브의 애송이 펠에 대한 정당한 지적이 수용되지도 않는다. 어쩌면 이미 사회는 그 때부터 야비한 성공을 희구해 왔는지도 모르겠다. 과정 따위는 필요없다, 오로지 상황판에 표시된 미그기의 격추 숫자만이 중요한 것이다. 이런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주인공의 선택지는 시간이 갈수록 좁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다할 실적이 없던 도터스처럼 오로지 100번의 출격을 마치고 무사히 고향으로 귀환하고 싶다는 소망마저 야박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읽기 시작한 지는 열흘 정도 되었지만 사실 이틀 만에 완독해 버렸다. 그 정도로 몰입도가 뛰어난 작품이었다. 어쩌면 소설의 배경이 한국이라는 점에서 다른 작품에 비해 친밀도를 느꼈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제임스 설터 작가 특유의 간결하면서도 정제된, 그리고 삶의 진실과 인간 내면세계에 대한 정밀한 고찰이 극명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그리고 향후 반세기 가량 지속될 작가의 문학적 오딧세이의 출발점을 알린 작품이 바로 <사냥꾼들>이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정말 멋진 소설이다. 계속해서 작가 중의 작가라는 제임스 설터의 책들이 출간되길 바란다. 올해 지금까지 읽은 소설 중에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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