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포르노그래픽 어페어
애덤 써웰 지음, 황보석 옮김 / 이숲에올빼미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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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좀 그렇지. 영국의 문예지 <그랜타>를 통해 알게 된 작가 애덤 써웰, 한창 <그랜타>가 선정한 젊은 유망주 작가 이름으로 나온 책들을 찾다가 그의 문제적 데뷔작(2003)이 최근에 출간된 사실을 알게 되어 바로 주문했다. 얼마나 야하길래 19금 소설이라며 성인인증을 받아야 검색이 가능한 걸까. 더 역설적인 사실은 원작의 제목이 <Politics>라는 것이다. 놀랍군. 지난번 독서모임에 가서 이 책을 소개하니 모두들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하는 진풍경도 경험할 수가 있었다. 쇼킹할 정도로 야하다는 전언에 모두가 주문장을 날릴 기세였다.

 

나는 이 책을 지난 3월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지난달에 이런저런 책들을 읽어야 했던 관계로 1/4 가량 읽은 시점에서 멈췄다. 그리고 이달(5월) 들어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그전에 읽었던 부분들이 기억이 나지 않아 주인공 나나와 모이샤 그리고 안잘리 같은 캐릭터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느라 고생깨나 했다. 제목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를 사기 싫어서 진짜 100만년 만에 책포장을 해서 들고 다니며 읽었다. 물론 자극적인 장면이 없진 않았지만 생각처럼 그렇게 흥미롭지 않았고 다 읽는데 자그마치 석 달이나 걸렸다. 물론 집중해서 읽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애덤 써웰이 이 책을 발표할 당시 25세 약관을 절반가량 보낸 나이였다. 소설에는 역사건축학을 전공하는 상류층의 매력적인 아가씨 나나와 그의 유대인 애인이자 연극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모이샤 그리고 마지막으로 3자동거의 마지막 퍼즐인 안잘리가 등장한다. 소설에는 참 많이 섹스 라이프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마치 그들은 섹스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듯이 그렇게 말이다. 그리고 작가는 화자(나레이터)로 등장해서 전지전능한 신처럼 주인공들의 심리상태를 꿰뚫고 있다. 이 소설이 관음증을 즐기는 이들을 위한 작품이라면 작가의 설정은 대단히 성공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관계를 혼란스러워 하는 주인공들의 심리 저변을 훑는 탁월한 묘사가 일품이다.

 

작가는 계속해서 <나의 포르노그래픽 어페어>가 다정함과 친절함에 관한 이야기라고 독자에게 주입해서 말한다. 과연 그럴까?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같은 평범한 독자는 단순하게 애덤 써웰의 집필의도에 동의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영국 젊은이들의 퇴폐적인 섹스 라이프를 집중적으로 다룬 포르노 소설도 아니다. 그렇게 치부하기엔 정치적인 이야기들이 너무 들어 있다. 작가 나름의 균형감각이라고 불러야 할까. 호색을 즐기던 지도자였던 마오쩌둥에 관한 이야기나, 고국 체코를 떠나 망명작가로 성공한 밀란 쿤데라 등의 에피소드를 나나-모이샤-안잘리 3자동거에 대입해서 분석하는 장면을 보면 왜 작가가 자신의 야심찬 데뷔작의 제목을 <정치학>이라고 붙였는지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나의 포르노그래픽 어페어>가 성적으로 아주 재밌거나 그런 책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 아슬아슬한 재미가 있었다면 다 읽는데 석 달이나 걸리진 않았겠지. 보통의 책들처럼 어떤 부분은 지루하기도 했다가, 자극적인 장면에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기도 했다가 또 어떤 장면에서는 공감하기도 했다. 주절주절했는데, 원론으로 돌아가 제목이 주는 것만큼의 자극은 존재하지 않았더라 뭐 그런 정도.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네들의 다양한 형태의 섹스 라이프보다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느끼는 불안 혹은 혼란에 더 호기심이 갔다. 되돌아보면, 우리네 삶에서 불안과 혼란은 원하지 않는 불청객이 아닐까. 살아 보면 알게 되겠지만, 삶이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 삶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나나와 모이샤 커플은 둘만의 사랑으로도 충분했지만, 스멀스멀 관계를 파고드는 불안 때문에 안잘리를 3자동거에 끼웠다가 결국 낭패를 당하게 된다. 물론 결정적인 원인은 나나의 파파가 아파서였지만, 부서진 관계는 복원되지 않았다. 해피엔딩을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갑작스러운 결말도 만만치 않았다. 쇼킹한 것 중의 하나는 파파에게 자신의 3자동거를 알린 부녀간의 대화였다. 사랑하는 딸 나나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파파라고 하지만, 아무래도 한계가 있지 않을까. 작가의 위험한 줄타기가 우려스러웠다 사실.

 

그들의 관계가 어느 면에서는 로맨스였다고 작가가 표현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편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려면 어떡해야 할까? 아름다움은 그리고 사랑은 무조건적으로 숭배하고 찬양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기존의 윤리에 애덤 써웰은 마치 도전장을 낸 사람처럼 그렇게 달린다. 허영과 망상이야말로 이 세상의 소설의 존재 이유라는 선언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애덤 써웰이 이 소설을 쓴 진짜 이유가 아닐까. 등장인물들의 복잡한 섹스 라이프가 아니라 그들이 그 안에서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더 나아가 윤리와 도덕에 대한 설교는 편하지 않게 다가온다.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3자동거 가운데 윤리타령이라니, 차라리 환상적인 섹스를 묘사하면서 도덕이나 현실과는 무관하다는 주장이 오히려 더 호감이 간다.

 

소설을 읽다 보면 무언가 얻어 걸리는 그런 횡재하는 기분을 기대하게 되는데 애덤 써웰의 작품에서는 그런 게 좀 약했던 것 같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은데, 아마 어렵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북디파지토리를 이용해야 하는 걸까. 다 읽은 것만으로도 하나의 성취감을 느낌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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