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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아래 봄에 죽기를 ㅣ 가나리야 마스터 시리즈
기타모리 고 지음, 박정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기타모리 고 작가의 가나리야 시리즈를 읽다 보면, 정말 당장에라도 산겐자야 골목에 있다는 등신대 모양의 호롱불 초롱을 지나 그슬린 삼나무 문을 박차고 가나리야에 뛰어들어 마스터 구도가 건네주는 시원한 맥주 한잔을 걸치고 싶어진다. 어쩌면 그렇게 우리의 마스터는 손님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순간 알코올과 그에 딱 맞아 떨어지는 요리를 제공해 줄 수 있단 말인가. 그건 마치 팔이 닿지 않는 등짝을 속 시원하게 긁어주는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작년부터 별러 오던 가나리야 시리즈에 그만 매료가 되고 말았다. 읽을수록 재밌어지는 안락의자 탐정물이라고나 할까. 사실 개인적으로 탐정물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기타모리 고 작가의 가나리야 시리즈는 독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굳이 내가 머리를 쓰지 않아도 등장인물들의 자연스러운 토론을 통해 정답을 얻게 되는 그런 점이 마음에 든다. 굳이 사건 현장에 나가지 않더라도 주방과 비어서버를 분주하게 드나들며 손님들이 안주처럼 돌리는 사건에 대한 정보들을 산적꼬치처럼 꿰어서 통찰해서 분석해내는 박학다식한 마스터 구도의 서비스가 그만이다. 다만 아쉬운 건 이 멋진 구도의 서비스가 원작자인 기타모리 고 작가의 사망으로 더 이상 접할 수 없다는 점이다.
모든 탐정물이 그렇듯, 기타모리 고 작가의 가나리야 시리즈에 등장하는 사건도 프레임 안에 해답이 숨어 있다. 나같이 머리 굴리기 싫어하는 평범한 독자는 그저 작가가 이끌어 주는 대로 안락하게 정답으로 가는 길을 더듬기만 하면 된다. 잘못된 길조차 가나리야의 다양한 손님들 중의 누군가가 이끌어 주지 않던가. 천성적 게으름 덕분에 그런 잘못된 상상조차 거부하는 박약한 정신세계 탓을 해야 할까. 개인적으로 모든 문제는 어쩌면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망상을 해보기도 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하이쿠 동호회 회원이었던 가타오카 쇼고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이지마 나나오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리 프리랜서 작가라고는 하지만, 시간과 비용을 들여 죽은 사람을 신원해 주겠다는 결심은 쉽지 않아 보인다. 처음 주인공은 마지막 에피소드인 <물고기의 교제>로 다시 돌아와 긴 여운을 남기며 대단원의 막을 장식한다.
현명하지 못한 나같은 독자는 작가가 여기저기에 흩뿌린 정보와 결정적 단서들을 아무 생각 없이 슥슥 읽고 지나가는 숱하게 범한다. 독자 한 수 위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고수인 기타모리 고 작가는 탐정물의 원칙에 충실하다. 항상 첫 번째 목격자를 의심하라. 다만, 범행의 목적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발적인 범행은 사실 거의 존재할 수 없다. 원한이든 아니면 금전적 관계에 의한 것이든 사람의 행동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런 이유 없이 마구잡이로 사람을 해치는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의 일탈적 행동을 어떻게 주어진 정보만으로 추론해낼 수 있겠는가. <살인자의 빨간 손>에서 작가는 그런 탐정물의 원칙을 고수하는 훌륭한 작법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6개의 에피소드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야기는 바로 <마지막 거처>다. 사진촬영에 대한 관심을 많아서인진 몰라도 카메라맨이 등장해서 특정한 주제를 가지고 일관적인 작업활동을 하던 중에 만나게 된 노부부의 안식처에 대한, 친환경적 주제 그리고 조화와 상실이라는 이야기를 다룬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이런 삼박자에 개인사진전 포스터 절도라는 흥미로운 요소까지 소스로 장식했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이제는 당당한 사진작가가 된 쓰부키 오부히코가 모터크로스를 즐기는 폭주족에 가까운 청년들을 담대하게 설득해서 그들이 망친 노부부의 텃밭을 원상복귀하고, 사진촬영을 거부하는 노인장의 마음을 풀기 위해 땅바닥에 엎드리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 그의 프로정신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마음이 훈훈해지는 결말은 보너스다.
마스터 구도 데쓰야와 손님 일당이 계획한 <가족사진> 설계는 독자를 함정에 빠뜨리는 트랩포인트가 일품이었다. 일에 미쳐 가정을 소홀히 하다가 이혼에 다다른 노다 가쓰야 아저씨의 동거인이 사라졌다고 이야기의 서두에 나오지만 독자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바로 그런 설정이야말로 상황을 헷갈리게 하며 독자가 추리의 허방다리를 짚게 하는 결정적 순간이다. 흑백 가족사진이라는 고전적 방식을 이용해서 모든 것을 다 용서해 줄테니 집으로 돌아오라는 메시지 전달을 맡은 마스터 구도의 겸손하면서도 누군가의 잘못된 행동을 비난하기 보다는 유무상생(有無相生)의 조화가 필요한 시대의 자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모름지기 자기가 보고 싶은 사실만 원하는 법이다. 마지막 에피소드에 다시 등장하는 이지마 나나오처럼. 그런 욕망을 상상 아니 망상이라 부르며 폄하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손님들의 그런 갈망을 시원한 맥주와 구미를 당기게 만드는 요리로 순화시키는 역할을 가나리야 맥주바의 주인장 구도 데쓰야야말로 마스터답게 훌륭하게 수행해낸다. 기타모리 고 작가의 긴 여정은 이제 국내에 출간된 세 번째 책인 <반딧불 언덕> 하나만을 남겨 두고 있다. 마지막 인스톨은 아직 국내에 출간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아마 그 책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스터 구도 데쓰야의 미스터리가 풀린다고 했던가. 피니스 아프리카에에서 속히 출간을 서둘러 주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