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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다이 시지에 지음, 이원희 옮김 / 현대문학 / 2005년 4월
평점 :
지난주 독서모임에서 내년 첫 번째 독서모임 책으로 김숨 작가의 신간 <바느질하는 여자>를 골랐다. 그러다 나온 책의 제목 이름이 바로 중국 출신 작가 다이 시지에의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라는 책이었다. 같은 모임에서 헬렌님이 이 책 정말 좋다는 말을 듣고 주저하지 않고 인근 램프의 요정 서점에서 거의 새책 같은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를 발견하고 데려왔다. 이미 읽고 있던 리디 살베르의 신간을 읽고 나서 바로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를 집어들었다. 한 250쪽 남짓한 분량이었는데 너무 재밌어서 이틀 만에 다 읽었다. 고마워요 헬렌님.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1972년 중국의 어느 시골마을이다. 중국 대륙의 수령 마오쩌둥의 영도 아래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그야말로 야만의 기록이자 퇴행의 역사였다. 역설적으로 마오 주석의 명령을 치열하게 수행했던 바로 그 홍위병들이 인민의 적으로 몰려 숙청되고, 하방되어 시골마을로 내려가 기약 없는 농촌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 소설의 주인공 (화자인) 나와 뤄가 홍위병이었다는 건 아니다. 그들은 지식인 계급의 자식들로 이제 겨우 열여덟 살 먹은 청년들이다. 마오 주석의 어록을 기록한 책 외에는 모든 서방 부르주아 세계를 그린 책들은 금서로 지정되고, 그런 책을 읽는 건 반동분자들의 파렴치한 행위로 치부되던 그런 중세 암흑기 같은 시절을 소설은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 때 아편농사를 짓던 ‘하늘긴꼬리닭’ 마을의 촌장은 나와 뤄가 마을에 도착한 첫날, 소지품 검사를 하던 중에 생전 처음 보는 바이올린을 부르주아의 장난감이라며 불살라 버리려고 하지만, 타고난 이야기꾼인 뤄의 기지로 위기를 모면한다. 그 이후는 언제 재교육에서 벗어날지 모르는 기약없는 나와 뤄의 하방생활 생존기가 이어진다. 영화상영 시설이 부족했던 그 시절에, 나와 뤄는 촌장이 영화를 보고 나서, 구전영화를 상영하라는 기상천외한 임무를 수행하기도 한다. 단순하게 영화의 상황과 대사를 외우는 것만으로 영화 상영 시간을 맞출 수 없었으리라. 그렇게 다이 시지에 작가는 상상력과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피어나는 유머를 통해 이야기를 훌륭하게 전개해 나간다. 이즈음에 바느질 처녀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도 투입된다. 제목에 등장하는 바느질하는 중국소녀가 바로 바느질 처녀다.
나와 뤄처럼 하방된 안경잡이가 가지고 있는 금서가방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그들의 운명은 급속하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하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동아줄의 방법으로 방앗간 노인의 민요수집이라는 절호의 기회를 잡지만,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된 안경잡이는 나와 뤄에게 모종의 거래를 성사시키고 마침내 비밀의 금서를 획득하게 된다. 발자크의 <위르쉴 미루에>를 필두로 해서, 로맹 롤랑의 <장 크리스토프>와 알렉상드르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 같은 고전 걸작들을 그야말로 수백 페이지의 강물처럼 주인공을 덮쳤다. 재교육이라는 비참한 상황 가운데, 세계에 맞설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그 책들이 주는 위안은 대단했을 것이다.
화자가 고전문학 세계에 온전하게 정신이 팔린 동안, 뤄는 나름대로 사랑하는 바느질 처녀를 자신이 상상하는 문명인으로 교화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자신이 읽은 책의 내용을 그녀에게 전달하기 위해 고소공포증와 싸우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을 찾은 바느질 처녀의 아버지 재봉사에게 자신들이 읽은 소설을 구전으로 전달해 주던 나와 뤄는 집 밖에서 엿듣고 노회한 마을 촌장에게 발각되어 공안부에 끌려갈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렇지 이렇게 이야기가 이렇다 할 위기 하나 없이 좋은 방향으로만 흘러갈 리가 없지. 그 위기를 한때 아편재배로 생계를 꾸려가다 골수공산당으로 변신한 촌장은 자신의 충치를 저명한 치과의사 아들인 뤄가 치료해 준다면 무마해 주겠다는 거래를 시도한다. 그리하여 재봉틀을 이용한 촌장의 썩은 치아 치료 과정에서 저자는 이 소설 최고의 희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에 이른다. 앞서 말라리아에 걸린 뤄를 치료하기 위해 바느질 처녀가 소환한 네 명의 무당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표면적으로는 사회주의 유물론이 지배하는 중국사회가 가진 이중성을 드러내지 않았던가. 안경잡이가 어렵사리 구한 민요 가사가 너무 저속하다며, 자신의 안위와 영달을 위해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맞게 표절하는 장면처럼 공산주의 시스템의 허위와 위선을 고발하는 것처럼 다가왔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뤄와 바느질 처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화자 나에 대한 심리묘사가 돋보인다. 나는 뤄 못지않게 바느질 처녀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기존의 도덕률 때문인지 나의 행보는 갈지자처럼 엇갈린다. 나는 무의식의 세계를 대변하는 일련의 개꿈을 통해 미래에 대한 예시 혹은 징조를 엿보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도리가 없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야만의 시대를 사는 청년의 불안감을 형상화한 나의 꿈은 암울하기만 하다. 그렇기 때문에 금서에 대한 유혹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현실이 암울할 때, 이상적인 탈출구로서 고전문학은 도피할 수 있는 강력한 이상향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다이 시지에 작가는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해준다. 프랑스에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는 영미문학의 저자들보다 상대적으로 프랑스 독자들에게 좀 더 쉽게 어필할 수 있는 발자크를 선택한 게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이 되기도 했다.
이 소설에서 하일라이트는 발자크 문학을 통해 자아의 정체성을 깨달은 바느질 처녀는 고향마을을 떠나기로 결정하는 장면이다. 그녀를 무식한 시골처녀로 인식하고 ‘재교육’의 대상으로 여긴 사이비 지식인 뤄의 생각은 오산이었다. 하방 중인 두 명의 청년들에게 무한한 사유와 상상력의 자유를 주었던 문학의 힘은 바느질 처녀에게도 마찬가지로 작동했고, 발자크 덕분에 그녀는 자신이 가진 아름다움의 비밀을 깨달았던 것이다. 어쩌면 혁명이 이루지 못한 사고의 혁신적인 전환을 문학 혹은 문화예술이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상징이었을까. 대단히 멋진 결말이 아닐 수 없다. 다이 시지에 작가가 직접 연출한 동명의 영화도 있다고 하는데(그런데 자신이 직접 이 이야기만큼은 영화로 다루고 싶지 말하지 않았었나) 그 영화도 한 번 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