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첫 번째 태양, 스페인 - 처음 만나는 스페인의 역사와 전설
서희석.호세 안토니오 팔마 지음 / 을유문화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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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유럽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나라는 이탈리아였다. 이제는 그렇게 열광하지 않게된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고 이탈리아에 너무 가보고 싶었다. 이제 이탈리아 다음으로 가보고 싶은 나라는 스페인이다. 전문 역사가가 아닌, 스페인이라는 나라가 좋아서 스페인에 머물면서 스페인 역사와 신화에 대해 서희석 씨가 쓴 <유럽의 첫 번재 태양, 스페인>은 그동안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스페인 역사의 입문서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서유럽사에서 고대 로마 제국이 빠지면 안되는 것처럼 스페인 역시 마찬가지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가 세웠다는 안달루시아 지방의 세비야는 고대 스페인의 중심지였던 모양이다. 바로 그 세비야를 중심으로 한 고대사가 파노라마처럼 휘몰아치니 말이다. 레반트 지역에 기반을 두었던 페니키아 인들은 그리스 인들과 지중해 무역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며 당시 세상의 끝이라고 알려졌던 스페인까지 진출한 모양이다. 페니키아 인들에 뒤를 이어 지중해 해상 무역을 독점한 카르타고 인들이 후속타자였다. 스페인의 물산과 은광은 북아프리카에 자리 잡은 본국 카르타고의 화수분이었던 모양이다. 세 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으로 해상국가 카르타고를 제압하고, 한니발의 이탈리아 침공까지 막아낸 로마 제국의 부상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고대사의 흐름으로 보인다.

 

지중해 세계의 패자로 등장한 공화정 로마는 제국으로 이행되어 가면서 이민족의 끊임없는 침입과 그에 대비하기 위한 재정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그 중에서도 갈리아와 더불어 히스파니아는 로마 속주 중의 우등생이었다. 심지어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 같은 로마 제국 전성기의 황제들도 배출해낼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좋은 시절이 가고, 고대 말기로 가면서 서고트족과 동고트족 그리고 게르만족의 연이은 침입 앞에 결국 로마 제국은 멸망하고 이베리아 반도의 패권은 서고트족이 쥐게 되었다. 그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로마제국에 공인된 기독교 역시 이베리아 반도에 유입되었다. 역설적으로 이베리아 반도의 원주민들은 정통 가톨릭이었던 것에 반해, 지배계급인 서고트족의 귀족들은 정통 가톨릭 교리의 삼위일체를 부인하고 이단시된 아리우스 파였다는 사실이다. 이 시대 종교를 대표하는 인물로 스페인 출신의 산 이시도로는 형 레안드로의 뒤를 이어 세비야의 대주교가 되었는데, 고대 스페인 역사에 대해 걸출한 저작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가 없었다면 스페인 역사는 공백으로 남겨 두어야 할 부분들이 많았을 지도 모르겠다.

 

세습제 왕조국가라기 보다는 귀족들의 추대에 의해 왕조가 유지되던 서고트왕국의 마지막 왕은 로드리고로, 그가 자신의 딸을 범했다는 사실에 격분한 세우타 총독 돈 훌리안이 아라비아 반도에서 발흥한 이슬람 세력을 끌어 들여 결국 이베리아 반도의 가톨릭 세력은 전멸하기에 이른다. 고대 이래 각종 물산이 풍부했던 이베리아 반도를 장악하는데 성공한 이슬람 세력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크 왕국까지 세력을 확장하려고 시도했지만, 732년 투르-프와티에 전투에서 칼 마르텔에게 패배하게 되었다. 그리고 1492년 이슬람 세력의 마지막 교두보였던 그라나다가 함락되기 전까지 780년간 이베리아 반도는 무슬림의 지배를 받았다고 책은 자세하게 서술해 준다.

 

산 이시도로에 이어 우리에게는 <엘 시드>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에 대한 신화에 대해서도 저자는 냉정하게 분석해 준다. 평민에서 가톨릭 세계를 수호한 기독교 영웅으로 칭송되고 있지만, 사실과 상당 부분 다르다는 것이 작가의 주장이다. 로드리고 디아스는 11세기 카스티야 귀족 출신으로, 처음에는 페르난도 1세의 휘하에서 뛰어난 지휘관으로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왕의 뒤를 이은 산초 2세와 알폰소 6세의 왕위 다툼 과정에서 훗날 왕위에 오르게 되는 알폰소 6세에게 찍히는 바람에 추방당하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자신의 능력을 높이 산 사라고사 타이파의 이슬람 군주 알무타만에게 충성을 다하기도 했다. 뛰어난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엘 시드는 발렌시아 지역을 정복하고, 아예 자신의 영지로 만들어 버렸다. 11세기 후반, 스페인 정복에 나선 보수 이슬람 세력인 알모라비데족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비로소 엘 시드의 신화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기독교 영웅이라기보다, 시류에 편승한 세일즈맨에 가까운 인물이었노라고 이 책에서 그를 평하고 있다.

 

8세기 초반, 이슬람 세력의 이베리아 반도 정복을 용이하게 했던 이유를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톨릭 통치 아래 박해받던 유대인의 협력과 세력이 미흡하던 초기 이슬람의 관용적 태도에 기인한다고 분석한다. 12세기 알모아데족이 이베리아 반도에 진출해서 타이파 소왕국으로 나뉜 이슬람 세력을 다시 통일하면서 기세를 올리기도 하지만, 카스티야 왕국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연합군에게 패하면서 알안달루스의 영광을 재현하는데 실패하게 된다. 또 스페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유대인 박해도 고대 이래 계속되어 왔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재정복을 완성한 1492년에 대대적인 강제 개종과 추방 전에도 서고트 족 시대에도 그리고 세비야 유대인 대학살 같은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왕조 중심의 역사 이외에도 서희석 작가는 항간에 떠도는 민간 전승과 전설에도 주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준다. 그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비극 <오셀로>의 원형이 되는 이야기도 사실은 스페인이 원조였다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됐다. 카스티야 왕국의 왕위 계승다툼 때문에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슬림 세력을 축출하는데 1세기나 늦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스페인 알안달루스 시절의 긍정적인 면으로는 고대 그리스 로마 문헌의 번역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이슬람 지배층의 노력으로, 훗날 르네상스의 기초를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중세 유럽에서는 기독교 문화의 전성으로 이교 문화로 단정되어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상황에서 그리스 로마의 고전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해서 대항해시대의 도래와 재정복으로 마무리되는 스페인 역사가 상대적으로 아쉬웠다. 좀 더 나가서 근현대사에 대해서도 다뤘으면 어떨까 싶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 소개된 스페인 역사가 정사에 가까운 이야기들이었다면 이 책에서는 정통 역사를 줄기로 해서 그에 얽힌 재밌는 야사와 다양한 전설을 소개했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그동안 바르셀로나나 마드리드 같은 스페인의 대도시를 가보고 싶었는데, 그보다 진짜 스페인을 만날 수 있는 세비야나 코르도바(쿠루투바)에 더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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