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강들 런던의 강들 시리즈
벤 아아로노비치 지음, 조호근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소호의 달>을 먼저 읽고 나서 바로 역주행에 들어갔다. 어떤 책과 만나게 될 때, 좀 기대를 접어야 하나.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만난 책이 너무 재밌어서, 전작까지 찾아 읽게할 정도의 작가라면 실력이 대단하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나에겐 벤 아아로노비치가 그랬다. <소호의 달>을 읽고 나가, 당장에 전작인 <런던의 강들>을 사서 읽기 시작했으니까 말이다.

 

<소호의 달>을 읽으면서 좀 이해가 가지 않고 이야기의 맥락을 잘 파악하지 못하던 부분들이 시리즈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런던의 강들>을 읽으면서 어디서 잃어버렸던 퍼즐 조각을 딱딱 끼워 맞추는 느낌이 들었다. 그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고나 할까. <런던의 강들>에서는 어머니 템즈와 아버지의 템즈 간의 갈등을 필두로 해서(이야기의 순서는 좀 바뀌었으니 이해해 주시도록), 우리의 혼혈 주인공 피터 그랜트가 어떻게 해서 디시뮬로 사건의 최초 목격자라고 할 수 있는 니컬러스 월페니라는 이름의 유령을 만나 사건에 개입하게 되는지 그리고 자신의 스승이자 마스터라 불리는 토머스 나이팅게일 경감에게 발탁되어 소위 ‘폴리’라 불리는 마법사 경찰 조직에 입문하게 되는지 등의 과정이 상세하게 진행된다. 그저 독자는 자신을 내려놓고, 이야기의 흐름에 몸을 맡기면 벤 아아로노비치가 잘 알아서 부드러운 독서의 항해를 시켜 주니 걱정 놓으시라.

 

텔레비전 드라마 판에서 실력을 갈고 닦은 시나리오 작가 출신의 벤 아아로노비치는 고수답게, 썰을 풀어내는 뛰어난 재간을 문학판으로 옮겨 시전해 보인다. 우선 기본은 21세기 영국 수도경찰국에서 마법사 경찰 조직이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소재부터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게다가 디시뮬로라는 유령의 조종을 받아 얼굴까지 바꾸는 흑마술을 이용한 연쇄살인 범죄, 그것도 <펀치와 주디의 비극적 코미디>라는 잔혹한 내용의 인형극 내용을 그대로 현실 세계에서 재현해 내는 유령으로 추정되는 헨리 파이크의 뒤를 쫓는다는 것이 전체적 소설의 줄거리다. 거기에 우리의 초보 마법사 도제 피터 그랜트는 부지런히 마스터 나이팅게일로부터 진짜 마법사가 되기 위한 수련도 빼먹어서는 안된다. 거기에 어머니 템즈의 구역인 런던을 넘보는 아버지 템즈와의 갈등도 빼놓을 수 없다. 묘한 매력을 어머니 템즈의 딸 비버리 브록과 썸을 타는 피터 그랜트, 그리고 그런 그를 조종하려 드는 팜므파탈 같은 존재의 레이디 타이 같은 물의 정령들까지 등장하니 캐릭터만으로도 그야말로 풍년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마법 경찰의 기원이 되는 사람이 바로 근대 과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아이작 뉴턴 경이라니 놀랄 노자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그가 발표한 <프린키피아>야말로 마법사들에겐 경전처럼 떠받들어진다고 했던가. 과학과 마법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설정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과학이 이성과 계몽의 영역을 담당한다면, 마법 혹은 주술은 그 외의 영역을 담당한다는 주장이 자못 합리적이지 않은가 말이다. 아울러 나 같은 문외한 독자를 위해 런던 경찰청의 흑역사를 비롯해서 소설의 배경이 되는 런던 명소가 가지고 있는 디테일에 대해서도 풍부한 설명을 빼놓지 않는다. 이 정도면 드라마 만들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작가가 예의 시리즈를 기획하면서 훗날 드라마될 거라는 예상을 하지 않은 건 아니겠지만. 선수끼리 왜 이러시나.

 

<소호의 달>에선 일취월장하긴 했지만, <런던의 강들>에서 비로소 마법사의 도제로 업계에 입문해서 초보 기술을 배우는 피터 그랜트의 모습은 귀엽기까지 하다. 기존 경찰 체계에 이미 진입해 있는 인물로서 해당 분야에 대해 날리는 블랙유머도 아주 인상적이었다. 시쳇말로 어쩔 수 없이 초보인 자신의 실수에 대해 쿨하게 인정하는 모습도 그렇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아직까진 별 볼일 없는 마법이긴 하지만 연구하고 노력하는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나같이 귀찮은 사람이라면 라틴 어 공부나 마법 연습을 게을리 할 게 불 보듯 뻔하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앞으로 계속해서 출간될 시리즈에서 활약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는 처지가 아니지 않은가.

 

일련의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헨리 파이크로 추정되는 유령 혹은 그를 조종하는 흑마술사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주인공 피터 그랜트가 보여준 연역적 추리의 귀결은 놀라운 결론에 도달하게 만든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흔히 저지르게 되는 편견으로부터 혹은 확신이라는 함정에서 벗어나라는 작가의 경고장이다. 그 편견과 확신에서 자신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지금 이 모든 사건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누구란 말인가. 여기에 바로 해답이 숨겨져 있다. 모든 이야기는 <런던의 강들>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오페라하우스 폭동에서 정점을 찍는데, 의외로 후속작을 읽어서 그런 진 몰라도 김 빠진 콜라를 마시는 느낌이 들었다. 사건의 주범이라고 할 수 있는 펀치 씨를 고대 론디니움까지 추적해서 처리하고, 엄마 템즈와 아빠 템즈의 중재에 나서 멋지게 처리하고 후속작에 등장할 바기나 덴타타의 희생자까기 심문한 다음 저자의 흥미진진한 시리즈 1탄은 막을 내리게 된다.

 

역자 후기를 읽고 나서, 공산주의자였다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벤 아아로노비치도 소설의 곳곳에서 약간의 시니컬한 면모를 보이게 된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불쑥 들었다. 되짚어 보니 이야기의 모티프를 오래된 잔혹인형극에서 출발시켰다고 추정되는 데, 고대설화와 런던이라는 지역적 특색을 가미하고 최후의 마법사 도제라는 주인공까지 등장시키느라 들인 공을 생각한다면 뜨거울 때, 달리는 드라마 스타일을 소설에도 제대로 적용시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미 출간된 나머지 소설들도 빨리 만나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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