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구두당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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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구병모 작가의 이름만 보고 그가 남자라고 생각했다. 무슨 상관이랴, 책 쓰는 데 있어 남자 작가인지 아니면 여자 작가인지. 사실 이번에 어디서 들어본 서사 혹은 동화들을 다룬 소설집을 구병모 작가가 낸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적잖은 걱정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로 꼽으려 했던 최제훈 작가가 <나비잠>으로 추락하는 것을 본 기억이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 늦은 여름휴가를 다녀와서, 구병모 작가의 신작을 게걸스럽게 읽으면서 든 생각은 판단유보라고나 할까.

 

내가 가장 먼저 읽은 이야기는 <카이사르의 순무>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라는 유명한 성경구절을 필두로 삼은 이야기는 엄청나게 큰 순무를 경작하게 된 농부의 이야기다. 그냥 순무라면 아무 이상이 없겠지만, 지키지 않은 약속에 대한 은근한 응징의 서사가 숨어 있다. 고래로 모든 터부와 약속들은 깨지기 마련이 아니었던가. 좀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깨지지 않은 터부와 약속은 서사의 기본 구조에 역행한다고 봐야할 지도 모르겠다. 어찌어찌해서 얻은 순무를 황제에게 공납할 세금 대신 퉁치려는 얄팍한 수를 부렸던 농부 일가의 비극은 정체불명의 거한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순간부터 잉태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에 덧붙여서 남동생을 버린 소녀의 행위 역시 독자의 양심을 건드린다. 살기 위해 정신없이 숲으로(여기서 숲이란 무언가 상실하기 위한 아주 적절한 장소로 등장한다) 도망치는 도중에 동생의 손을 놓아 버린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살던 마을에 도착한 소녀는 폐허가 된 마을의 모습을 보고 망연자실할 따름이다. 아무도 예언을 듣지 않았던 카산드라의 경우처럼, 처음부터 소녀의 예시를 듣지 않은 소녀 부모들 역시 가혹한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구병모 작가가 풀어 놓은 동화 혹은 서사 비틀기는 현실세계에서 동떨어진 것 같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정교하게 붙어 있기도 하다. 성냥팔이 소녀 이야기의 현대판 자본주의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화갑소녀전>을 보자.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좇아, 그리고 당장의 추위와 배고픔을 피하기 위해 거리에서 죽은 시신에서 신발을 벗겨내어 신을 정도로 비참한 상태에 놓인 화갑소녀는 살기 위해 자발적으로 화광 공장을 찾는다. 세상을 움직이는 화광 공장은 확실히 안락하지만, 서서히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생명을 앗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섬뜩할 정도의 기시감이 느껴진다. 어떤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전자회사의 반도체공장 이야기가 생각나지 않는가. 사람이 공장에서 사용되는 소모품으로 전락한 판타지는 어쩌면 그렇게 현실을 닮았는지. 모두가 생존을 위한 재화를 획득하고 소모하기 위해(소모의 악순환이라고 해야 할까)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악전고투를 마다하지 않지만, 코너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운명으로부터 어느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게 돌아가는 사회의 법칙이 조금이라도 개선될 여지가 전혀 보이지 않고 그저 직진할 따름이라는 점에서 더욱 절망적이다.

 

왜 여성은 자존감을 가지고, 존재에 대해 물으면 안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작가의 도발적인 대답이 <엘제는 녹아 없어지다>에 들어 있다. 시대를 알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판타지의 기본이 아닌가. 남녀 동등한 권리가 보장된 21세기라고 하지만, 사회의 여전한 편견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집안일을 배워 장차 참한 신부가 되라는 전래의 위선적 정언명령을 전면으로 거부한 농부의 딸이자 현학가 엘제를 기다리고 있는 운명은 남편이 촘촘히 짠 그물이다. 단순함과 현실안주를 추구하는 나같은 사람에게 그런 복잡한 논쟁과 토론은 그저 골치 아플 따름이지만, 엘제의 논리는 명징하고 거부할 도리가 없다. 그러니, 그런 말싸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남편의 방법은 폭력적일 수밖에(그물씌우기) 없다. 비겁한 남편은 장인인 엘제의 아버지에게 받은 결혼지참금이라는 조건 때문에 엘제를 처가로 돌려보내는 것도 거부한다. 생활을 풍족하게 만들어줄 결혼지참금 때문에 이혼을 거부한 남편은 노동 대신 한 줄의 독서를 선택한 아내 엘제를 가혹하게 응징한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거부당하는 이런 비합리적인 상황에서 엘제의 탈출 방법은 스스로 녹아 사라지는 것일 수밖에.

 

수상쩍은 풋내기 의사의 비밀을 다룬 <헤르메스의 붕대>는 또 어떠한가. 어디서 본 듯한 서사는 그렇게 반복된다. 일단 이 서사에서 기본 갈등은 마을의 터줏대감을 자처하는 토박이 의사와 도시에서 산전수전 다 경험한 젊은 의사 혹은 수련의의 갈등구조를 기반으로 한다. 잘 나가던 집안이 풍비박산 나서 촉망 받던 대학생활을 접고, 나무꾼 생활을 하다가 어찌어찌해서 다시 일어서서 의과 대학을 다니던 젊은이가 아무도 찾지 않는 한적한 마을을 찾는다는 설정부터가 알력과 갈등을 예고한다. 의외에도 이 젊은이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사실에 기득권을 대표하는 선수로 등장한 늙은 의사는 위기를 느낀다. 여기까지는 당연한 구조다. 그렇다면, 늙은 의사가 알 수 없는, 마을 사람 모두가 칭송해 마지않는 젊은 의사의 뛰어난 의술의 비결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로 서사는 달려가기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젊은 의사가 우연한 기회에 얻게 된 제목인 상징하는 의술의 신 헤르메스가 준 더럽고 낡은 붕대가 바로 비밀이다. 대부분의 서사 구조에 등장하는 의외의 횡재를 제대로 다루지 못해 나락으로 추락해 버리는 주인공과 달리, 젊은 의사는 점진적으로 자신이 얻은 횡재를 사용하는 현명함을 보여준다. 다만, 마지막 순간에 그의 평생을 책임져줄 비법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덕분에 아니면 늙은 의사의 부질없는 오지랖 때문에 모든 것은 일장춘몽이 되고 만다. 과연 마을을 떠난 그 젊은 의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구병모 작가가 다룬 8편의 판타지는 모티프로 삼은 기존의 동화와는 확실히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현실과 판타지의 위험한 경계를 넘나들며, 짜내린 이야기는 매혹적일 수밖에 없다. 무의식이 의식의 세계를 지배한다고 했던가. 우리가 꿈꾸는 판타지가 현실의 반영이라고 한다면, 구병모 작가 이야기의 행간에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더 많은 이야기들이 오롯이 숨어 있을 지도 모르겠다. 내가 책을 읽으면서 찾아낸 이야기는 조각에 불과하겠지 아마. 글쓰기가 작가의 몫이라면, 행간을 읽어내는 건 언제나 그렇듯 독자의 몫이겠다.

 

[리딩데이트] 2015년 9월 12일~13일 오전 10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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