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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 남자
칼요한 발그렌 지음, 최세진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제목이 <인어 남자>라고 한다. 그래서 무슨 판타지 소설이 아닐까 싶었다. 아니 어쩌면 동화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책을 펴고 읽기 시작했는데, 책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소설 <인어 남자>의 배경은 1983년 지금은 세상을 떠난 마이클 잭슨이 앨범 <Thriller>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던 그 시절 이야기다. 그리고 배경은 복지천국으로 알려진 스웨덴의 팔켄베리(Falkenberg:스웨덴 말로 ‘매의 산’이라는 뜻이라고 한다)라는 바다 건너 덴마크의 안홀트 섬이 보이는 그런 항구도시다. 주인공은 넬라와 그녀의 남동생 로베트르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바다생물, 소설에서는 남자 인어라고 불린다. 전설에 등장하는 인어는 사이렌의 그것처럼 남자를 홀리는 그런 요사스러운 존재라고 하는데, 남자 인어는 그것과는 좀 다른 이미지로 다가온다.
소설을 읽으면서 놀라웠던 점은 이제 겨우 복지의 걸음마를 시작한 우리나라와는 달리 이미 스웨덴에서는 30년도 전에 이미 아동수당과 복지수당을 국민들에게 제공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회적 편의 때문에 주인공 넬라의 엄마는 제대로 된 일자리도 구하지 않은 채, 사회에 무임승차해서 하루하루를 연명해 간다. 넬라의 아버지는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데, 부모로서 자식을 돌보는 일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제대로 자라나길 바라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그래도 주인공 넬라는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는 남동생 로베르트를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할 태세다. 사실 로베르트의 보호자는 부모가 아니라 넬라인 셈이다. 넬라는 학교를 졸업하는 다음 해에, 독립할 계획을 꾸미고 있다.
그렇게 넬라와 로베르트 남매의 가난을 이겨낸 고군분투가 아름답게 마무리되면 좋으련만, 세상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들의 삶을 고달프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 중의 하나는 부모의 철저한 무관심과 가난 뿐 아니라 학교에서 그들을 괴롭히는 예라르드 일당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동물학대는 예사고, 부진아로 아이들의 놀림감이 된 로베르트를 인질로 삼아 넬라마저 괴롭힌다. 칼요한 발그렌 작가는 그런 아이들의 세계에 대한 너무 현실적이다 못해 소름이 돋을 정도로 극한대의 리얼리즘을 추구한다. 청소년들이 더 이상 꿈을 꾸지 못하고, 무한경쟁에 내몰린 우리사회의 현실이 보이는 것 같아 소설을 접하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와중에 넬라의 삶에 뛰어든 에일리언(이방인)이 하나 있었으니 그 존재가 바로 남자 인어다. 넬라의 유일한 친구라고 할 수 있는 토뮈의 형들이 바다에서 건져 올린 우리가 상상하는 인어와는 전혀 다른 생김새의 남자 인어를 만나게 되고, 남자 인어를 중심으로 모든 문제들이 휘말리게 되는 그런 상황이 전개된다. 로베르트를 인질로 삼은 예라르드가 지속적으로 돈을 요구하자, 넬라는 로베르트를 볼 때만 솟아나는 특별한 사랑의 감정으로 돈을 마련하기 위해 도둑질도 마다하지 않는다. 옷가게와 신발가게 그리고 전자제품 상점에서 넬라와 로베르트가 벌이는 절도 행각은 복지천국이라 알려진 나라의 피폐한 삶 역시 우리네와 별반 다른 것이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칼요한 발그렌 작가는 리얼리즘과 판타지를 섞은 이종교배 소설을 성공적으로 창조해냈다. 소설에서 리얼리즘을 담당하는 부분은 세상에 뛰어들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십대 소녀가 헤쳐 나가야 할 세상의 파도에 초점을 맞춘다. 넬라가 아무리 수를 써도 그녀가 처한 기가 막힌 상황에서 빠져 나갈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바로 그 시점에서 작가는 판타지/남자 인어를 투입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남자 인어가 슈퍼맨처럼 불가사의한 힘을 발휘해서 넬라를 괴롭히는 예라르드 일당을 쳐부수고, 그녀에게 바닷속 보물까지 안겨 주면 어떨까하는 판타지의 극한에까지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기도 했다. 그런데 작가는 판타지와 현실 세계의 경계를 그렇게 터무니없이 허물어뜨리진 않는다.
토뮈 형들에게 산 채로 잡힌 남자 인어의 운명과 예라르드에게 인질로 잡힌 로베르트의 운명은 정확하게 일치한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그런 상황 말이다. 너무 가난해서, 끼니조차 때우지 못하는 넬라와 로베르트에게 학교 급식이야말로 생명줄이라는 상황이 무상급식 논란에 휩싸인 오늘 우리네 현실을 반추하게 만들어 주기도 했다. 결국 어느 정도의 운과 사회 시스템의 도움으로 넬라는 새로운 삶을 찾기에 이른다. 물론 그에 따른 희생도 필요하다. 칼요한 발그렌 작가는 이런 다양한 요소들을 마치 곡예사가 현란한 저글링을 하듯 그렇게 솜씨 좋게 풀어낸다. 한 가지 개인적으로 옥의 티라고 생각하는 점 하나는 넬라/토뮈와 남자 인어와의 교감 혹은 공감을 바탕으로 한 대화다. 남자 인어가 인간의 말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 걸까? 텔레파시 같은 방법 대신 인어답게(?) 인간과 서로 대화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칼요한 발그렌 작가의 작품 중에서 우리나라에 두 번째로 소개된 <인어 남자>를 읽으면서 그의 전작 <가면>도 한 번 기회가 되면 읽어 보고 싶어졌다. 스웨덴 출신의 이 작가는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괴물’이라는 존재를 주제로 삼고 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