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족의 역사 북멘토 그래픽노블 톡 1
리쿤우 지음, 김택규 옮김 / 북멘토(도서출판)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그래픽노블을 좋아하는 편이다. 약간 판화 스타일의 거친 듯한 그런 그림체를 좋아하는데 그런 점에서 이번에 읽은 리쿤우 작가의 <내 가족의 역사>는 일단 합격점에 가깝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중국사에 대해 관심이 많아 고사성어 선집과 태사공 선생의 <사기열전> 따위를 즐겨 읽어서 그런지 인민해방군 출신 작가가 사진과 그림으로 보여주는 중국현대사에 대한 기록이 인상적이었다. 리쿤우 작가의 전작 중에 우리나라에도 소개된 <중국인 이야기>란 책이 있다고 하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전작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이야기의 발단은 중국 쿤밍의 어느 골동품시장에서 시작된다. 이 그래픽노블의 내레이터인 리 선생이 골동품 시장에서 라오치라는 골동품 중개상으로부터 <지나 정벌 쌍륙도>이라는 이름의 그림을 소개받게 되는데, 이것이 청일전쟁에 대한 희귀한 자료였다는 것이다. 메이지 27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딱 120년 전인 1894년 우리나라에서는 갑오동학운동이 벌어졌던 해이자 당시 동아시아의 강국 청제국과 부국강병의 기치를 내세운 일본 메이지 정부가 조선의 미래, 나아가 동아시아 패권을 두고 한판대결을 벌인 도박판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장차 제국주의의 초석을 다지게 된다. 여기까지만 해도 대단한 자료임에 틀림 없다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라오치는 자신의 스승이 더 놀라운 자료를 가지고 있다면서 리 선생에게 예의를 갖추고 자신의 사부를 한 번 찾아오라는 말을 건넨다.

 

라오치의 스승이 가지고 있는 자료는 바로 193777일 베이징 남부의 루거우차오에서 벌어진 총격전이 중일 간의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과정을 일본 종군기자들이 사진 기록으로 남긴 대단히 귀중한 자료였다. 리 선생은 준비한 카메라로 수천 장에 달하는 사진을 찍으면서 중국에서는 항일전쟁으로 부르는 중일전쟁이 끝난 지 70~80년이 다 되어 가도록 어떻게 이런 자료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는지 궁금해 한다. 그리고 그렇게 기록한 자료를 가지고 동료들과 분류 작업을 하는 과정을 통해 독자들에게 그대로 전달한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비록 왕조제에서 공화제로 이행하기는 했지만, 19세기 아편전쟁 이래 서양 세력의 침탈에 시달리던 1930년대 중국은 이웃 일본처럼 부국강병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 오히려 제국주의 열강의 먹잇감이 되어 굴기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 정부와 마오쩌둥의 공산당 간의 국공내전으로 눈앞에 닥친 일제의 침략에 공동전선조차 형성할 수가 없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 전차와 같은 신식무기와 공병부대, 병참부대, 우편부대 등 다양한 병제를 갖춘 일본군의 전략 전술 앞에 중국군은 무력하게 무너졌다. 중국을 대표하는 대도시인 베이징과 상하이는 물론이고 국민당 정부의 아성이라 할 수 있는 난징까지 함락당하는 장면들이 리쿤우 작가가 찍은 라오치의 사부가 어렵게 모은 자료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유구한 중국 역사 중에서도 유독 치욕적인 일제 침략 시기를 리쿤우 작가는 <내 가족의 역사>에서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외면하고 싶은 치욕스러운 역사적 사실을 후세에 알려 다시는 그런 치욕을 겪지 말자는 작가의 의도일까. 만화 작가로서의 창작열보다 어떤 면에서는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집요하게 중일전쟁 당시 이모저모를 작가를 예리하게 파헤친다. 일본 침략군에 대항해서 항거에 나서라는 벽에 쓴 격문은 물론이고,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혔지만 당당한 중국군 포로들의 모습도 빠지지 않는다. 일본군 역시 전근대적 무기로 무장한 중국군을 깔보기는 했지만, 악조건을 무릅쓰고 싸운 중국군에게 경의를 표하는 장면도 사진에 남아 있다. 난징공략전에서 무자비한 살상을 벌인 일본군이 보여줬던 그것과는 다른 장면이라 그런지 인상 깊었다. 친일 괴뢰정권의 수반이었던 왕징웨이와 부역자들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매국노들이라고 외치는 작가의 일갈은 <내 가족의 역사>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서 라오치의 사부가 대륙을 돌며 어렵사리 구했다는 자료의 정체를 일본인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와서 거액을 줄테니 물건을 넘기라고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리쿤우 작가가 문제의 자료를 만나게 되는 과정은 마치 중국 고사에 나오는 장량이 황석공으로부터 얻은 <태공병서>의 사례가 떠올랐다. 나중에 라오치와 그의 사부를 작가가 찾아 나서지만 종적을 찾을 수가 없지 않았던가. 자료를 조사하던 중, 일본 항공대의 쿤밍 폭격으로 작가의 장인어른이 한쪽 다리를 잃었다는 비극에 도달하게 되는 과정을 끝으로 이 그래픽노블은 대단원에 이른다.

 

이웃나라 일본은 여전히 중일전쟁 당시 그들이 중국 각지에서 벌인 전쟁범죄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아니 나아가 역사 교과서에서조차 부인하고 있는 실정이다. 과거에 그들이 벌인 역사에 대한 진상조사와 진정성 있는 사과 없이 그들이 주장하는 평화공존은 요원하게만 들릴 뿐이다. 그래서 만델라가 남긴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는 말을 되새기게 하는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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